2019년은 한국의 라디오헤드 특히 톰 요크의 팬들에겐 각별한 한 해로 기억될 법하다. 요크의 첫 영화음악 <서스페리아>(2018)가 지난 5월 개봉한(해외에서는 작년에 공개돼 OST는 먼저 발매됐다) 데 이어, 오는 7월 28일엔 요크의 한국에서의 첫 솔로 라이브가 열린다. 2012년 지산락페스티벌의 라디오헤드 공연에 이어 7년 만에 내한이다. 공연을 기다리는 와중, 돌연 세 번째 솔로 앨범 <Anima>가 발표됐고,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폴 토마스 앤더슨 연출의 단편영화가 지난 6월 2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기까지 했다. 이 여세를 몰아 단편영화 <아니마>와 더불어 톰 요크의 음악을 사용한 영화들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아니마>
<Anima>는 톰 요크가 <Tomorrow's Modern Boxes>(2015) 이후 4년 만에 내놓는 새 앨범이다. "무의식적인 행동을 반영하는 내면의 자기자신"을 뜻하는 칼 융의 개념 '아니마'를 따온 제목처럼 꿈에서 유영하는 듯한 사운드와 노랫말이 담겨져 있다. 공식적인 발매 발표 이전 런던, 밀라노, 댈러스 등지에 스타트업 회사인양 내건 광고에서는 "꿈을 기억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까? (...)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초현실적인 세계에 머무릅니다. (...) 당신의 꿈을 찾아드립니다"라는 문구로 궁금증을 자아낸 바 있다. 요크는 앨범 발매와 더불어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이 연출한 15분 남짓한 동명의 단편영화를 넷플릭스를 통해 내놓았다.
톰 요크와 PTA의 만남은 처음이되 익숙하다. PTA는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와 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협업 체제를 이어가고 있고, 요크를 주인공 삼아 라디오헤드의 'Daydreaming'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다. 저명한 두 아티스트의 협업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PTA는 자신은 "세 번째 톱니바퀴"고 <아니마>의 전제는 톰 요크와 안무가 데미앙 잘렛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데미앙 잘렛은 요크가 영화음악으로 참여한 <서스페리아>의 안무를 총괄한 인물이다. 그의 존재는 <아니마>가 러닝타임을 채운 서사만큼이나 요크를 비롯한 조연들이 선보이는 몸짓을 제대로 구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걸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다. PTA가 요크에게 가장 많이 한 주문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가) 버스터 키튼처럼!"이었다. 데이빗 핀처의 <세븐>(1995), 봉준호의 <옥자>(2017) 등의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는 각기 다른 공간 안에서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적극 활용해 잘렛이 만든 안무의 힘을 한껏 부풀렸다.
<아니마>는 앨범 <Anima>에 수록된 9곡 가운데 'Traffic', 'Not the News', 'Dawn Chorus' 세 개 트랙의 뮤직비디오처럼 진행된다. 파트마다 공간과 동작 등은 각기 다르게 펼쳐지지만, 이 셋을 동시에 관통하는 건 '로맨스'다.열차에서 눈을 마주친 여자(요크의 실제 연인 다야나 론치오네가 연기한다)가 두고 내린 가방을 들고 그녀를 따라가는 남자는 거대하고 고된 여정을 통과해야 한다. 요크와 오랜 음악 파트너 나이젤 고드리치가 만든 혼란스러운 비트 아래, 내내 얼빠진 표정을 지어보이는 남자는 주변 사람들의 동작을 따라하거나 그들의 동선을 역행하면서 끝내 홀로 남게 된다. 그걸 연거푸 반복하고 나면 남자에게 비로소 자연광이 쏟아진다. 저마다 다른 톤의 건반 소리들을 중첩시켜 우리가 흔히 톰 요크와 라디오헤드에 기대하는 멜랑콜리를 선사하는 'Dawn Chorus'는 마지막 남자의 얼굴에 대한 열린 결말을 가능케 한다.
"Analyse"
<프레스티지>
크리스토퍼 놀란은 본래 출세작 <메멘토> 엔딩 크레딧에 깔리는 음악으로 라디오헤드의 'Paranoid Android'를 원했다. 하지만 9백만 달러 예산의 영화에 밴드의 대표곡 'Paranoid Android'의 저작권은 거대했고, 영화 공개될 즈음에 발매된 'Treefingers'를 OST에만 수록할 수 있었다. 할리우드의 새로운 실력자로 인정 받아 <배트맨 비긴즈>(2005)의 연출을 맡게 된 놀란은 차기작 <프레스티지>(2006)의 마지막을 톰 요크의 'Analyse'로 장식했다. <프레스티지>가 개봉하기 불과 몇 달 전 발매된 톰 요크의 첫 솔로앨범 <The Eraser>에 수록된 노래다. 톰 요크는 1860년대에 지어진 집들이 모인 옥스포드의 자기 동네에 전기가 나가 거리가 온통 어둠에 잠식된 풍경을 보면서 'Analyse'의 영감을 얻었다. 두 마술사 친구 로버트(휴 잭맨) 알프레드(크리스찬 베일)에 얽힌 비밀이 모두 밝혀지고 마주하는 새까만 배경의 엔딩 크레딧과 더없이 어울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Black Swan", "Amazing Sound of Orgy"
"Fog", "Skttrbrain (Four Tet remix)"...
<스캐너 다클리>
<스캐너 다클리>(2006)는 SF문학의 전설 필립 K. 딕의 동명 소설을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영화화 한 작품이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미래 사회를, 실사로 촬영해 애니메이션 같은 효과를 덧씌운 이미지로 구현했다. (훗날 링클레이터의 <버니>와 <비포 미드나잇>까지 작업하게 되는) 그레이엄 레이놀즈가 1년 반에 걸쳐 작업한 오리지널 스코어와 함께 라디오헤드와 관련한 곡이 무려 여섯 곡이나 사용됐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라디오헤드가 발표한 트랙이 곳곳에 배치돼 마약에 찌든 디스토피아의 어두운 풍경을 제대로 수식했다. 라디오헤드에 대한 애정은 비단 곡 사용의 빈도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정규 앨범에 수록된 곡뿐만 아니라 싱글의 B사이드, 리믹스 등 라디오헤드 팬이 아니라면 제목도 익숙지 않은 곡들을 놓는 세심한 활용이 돋보인다. 엔딩 크레딧에는 톰 요크의 솔로곡 'Black Swan'이 흐른다. <프레스티지>와 같은 해에 개봉된 <스캐너 다클리>에 쓰인 'Black Swan' 역시 요크의 첫 솔로작 <The Eraser>에 수록된 곡으로, 넘실거리는 베이스와 짤개 쪼개진 드럼이 요크의 솔로 초기작의 스타일을 대변한다. 사운드 소스의 톤은 침잠한데 그 리듬이 꽤나 동적인 아이러니함이 영화 결말의 정서와 꽤나 어울린다.
"Hearing Damage"
<뉴 문>
감독도 영화음악가도 다른 <트와일라잇>(2008)과 그 속편 <뉴 문>(2009) 사이의 공통점 중 하나다. 둘 모두 라디오헤드와 관련한 트랙이 영화에 포함하고 있다. <트와일라잇>의 엔딩 크레딧에 라디오헤드의 일곱 번째 앨범<In Rainbows>의 오프닝 트랙 '15 Steps'를 썼고, <뉴 문> 속 3분에 걸친 시퀀스 전체에 톰 요크의 노래 'Hearing Damage'가 사용됐다. 라디오헤드/톰 요크의 음악이 사용된 대개의 경우가 기존에 발표됐던 곡을 가져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Hearing Damage'는 <뉴 문>의 영화음악으로서 처음 공개됐다. 몽롱한 건반 소리가 주변을 감싸고 그 위를 경쾌하게 돌진하는 듯한 드럼이 더해진 가운데 톰 요크 특유의 읊조리는 보컬까지 이어져, 늑대 무리에게 쫓기는 빅토리아(레이첼 레페브스)의 도주를 수식한다. 그다지 인상적인 활용은 아니다. 'Hearing Damage'가 기존 요크의 트랙에 비해 그다지 특출나지 않을 뿐더러, 도주 신의 연출 자체도 너무 엉성했다. 솔직히 보기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트와일라잇>의 시리즈와 라디오헤드/톰 요크의 조합 자체가 미스매치 아닌가?
"Suspirium", "Has Ended"
"Volk", "Unmade"....
<서스페리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으로 걸출한 연출력과 감각을 선보인 루카 구아다니노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걸작 호러 <서스페리아>(1977) 리메이크작의 음악을 톰 요크에게 청탁했다. 몇 차례 거절한 뒤 결국 작업을 수락한 요크는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록 밴드 고블린이 만든 원작의 음악과 어떤 접점도 없는 음악을 만들기로 했다. 구아다니노 역시 1970년대 베를린의 무용 학교를 배경으로 삼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원작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원작의 형형색색의 원색들을 적극 활용해 사이키델릭한 공간을 연출했다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정치의 격랑을 통과하는 1977년 가을 베를린의 을씨년스러운 공기로 가득했다. 톰 요크는 그 무채색의 풍경 안에 들끓는 미스테리한 악령의 기운이 서서히 뻗어가는 과정을 소리로써 서포트 했다. 작업을 고사했던 게 무색하게도 OST는 모두 25개 트랙이 수록돼 있고, 러닝타임만 80분을 넘겨 2CD의 음반으로 제작됐다.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로 가득한, 그간 톰 요크가 내놓은 솔로 작업과는 전혀 다른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