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맥머피, 등장
무대는 미국의 한 정신병동, 유들유들하고 거칠어서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한 사내가 경찰에 이끌려(실은 앞장서듯 당당하게) 건물에 들어선다. ‘의학권력’(생명정치 시대에 의학은 완연한 법적 효력을 갖는다. 최종적으로 한 신체의 처벌 가능성 여부는 의학 권력이 결정한다)이 호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랜들 패트릭 맥머피(젊은 날의 잭 니콜슨이다), 그러나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를 ‘댄’이라고 불렀듯 그 역시 편하게 ‘맥머피’라 부를 참이다. 그의 타고난 반항적 기질이 매력적이어서이기도 하지만, 그의 죽음이 또한 댄의 죽음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댄이 ‘생명권력’에 의해 ‘죽도록 내버려졌다면’, 맥머피는 ‘규율권력’에 의해 ‘순종적 신체’로 개조되어 죽음을 맞는다. 나는 그런 죽음, 그러니까 ‘쓸모없다’거나 ‘비정상적’이라고 판정된 신체들의 사인(死因)에 관심이 많다.
“이제 같이 가면 돼”
맥머피는 왜 죽었나? 영화 말미, ‘추장’이 그의 얼굴을 베개로 눌러 호흡을 멎게 했으니, 맥머피의 직접적인 사인은 물론 질식사다. 그러나 관객들이 이 공식적인 사인에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그토록 활달하고 다루기 힘들던(이 말은 그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바로 그 이유로 치료를 필요로 하는 비순종적 신체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맥머피가 2층에서 ‘치료’(?)를 받은 후 “양처럼 순해져” 혹은 “산송장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 그의 얼굴을 베개로 덮어 누르면서 추장은 이렇게 말한다. “탈출했다더니. 날 두고 가지 않을 줄 알았지. 이제 같이 가면 돼. 나 자신 산처럼 든든해. 가자!”
그렇다면 추장이 그를 ‘죽였다’기보다는 이미 죽은 그를 ‘데리고 갔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인디언들은 영혼을 믿는다거나 특별히 자유로움을 선호한다는 식의 해석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제 목조차 가누지 못하고, 눈에 초점마저 사라져버린 신체는 이미 산송장, ‘살아 있는 시체’에 불과하다. 그런 신체의 호흡을 멈추게 했다고 해서 추장을 살인자라 부를 수는 없다.
더더군다나 맥머피가 해내지 못한 일을 수행하는 이가 바로 추장이기도 하다. 추장은 영화 초입 맥머피가 들어 올리려다 실패한 대리석 급수대를 들어 올려 창문을 부수고 탈출한다. 그럴진대 맥머피는 차라리 추장이 실현할 자유를 예비하고 죽은, 요한적 존재라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요컨대 질식사는 그의 사인으로 볼 수 없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질식사(의학적 죽음)하기 이전에 맥머피는 이미 ‘치료’에 의해 죽임(상징적 죽음)을 당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런데 ‘치료에 의한 죽음’이라니…… 이 말은 꽤나 역설적이다. 치료란 한 신체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의료 행위일진대, 그 행위에 의해 한 신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이쯤 맥머피에게 가해진 치료 행위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병동 2층에서 그에게 행해진 치료는 아마도 (그의 이마에 생긴 수술 자국으로 미루어볼 때) 전두엽 제거술이었던 듯하다. 지금은 시행되지 않는 시술이다. 그러나 이 시술을 곧이곧대로 지금은 사라진 의학적 구습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의학 권력(생명권력과 규율권력이 의학을 매개로 착종된 권력)이 ‘말 안 듣는’ 신체를 “양처럼 순한” 신체로 개조하기 위해 절개한 ‘전두엽’은 아마도 ‘한 신체의 자유를 관장하는 부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말하자면 의학권력의 치료가 한 신체의 자유를 절개했다. ‘자유’가 자신의 가장 유력한 정체성이었던 맥머피는 그때 이미 죽은 셈이다.
그를 치료해야 했던(상징적으로 거세해야 했던) 이유는 이제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감독이 의도했음에 틀림없는바, 정신병동은 당시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수간호사 랫취드는 그 사회를 보호해야 하는 생명권력의 수장, 그녀가 부여한 온갖 규율들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규율은 (강제된 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복종을 통해 범법과 비정상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때문이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한 정신병동을 모델로 삼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규율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이다. 마치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에 대한 영화적 오마주라도 되는 것처럼(감독이 이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카메라는 기꺼이 규율권력의 작동 방식을 면밀히 관찰하는 현미경이 된다.
공간의 폐쇄와 분할(병동의 문은 항상 잠겨 있고, 내부는 의학적 시선의 편의에 따라 정교하게 분할되어 있다), 일망감시적 건물구조(유리로 된 투약실 내부에서 랫취드는 모든 환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지식과 권력의 결탁 관계(경찰과 병원의 상호 협조는 말할 것도 없고, 의학적 지식이 이른바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판별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감시의 내면화(맥머피를 제외한 환자들은 자발적으로 규율을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병동 속에 유폐시킨다) 등등, 밀로스 포먼 감독은 푸코가 제시한 그 어떤 규율 권력의 세부도 간과하지 않는다. 맥머피만 아니라면 이 병동의 규율 메커니즘은 벤담의 ‘파놉티콘’만큼 완벽하다.
그런데 맥머피가 자꾸 그 규율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통쾌하고 해방적인 장면들이 연출되는 것도 그럴 때이다. 가령 어선 탈취 에피소드, 농구장 에피소드, 그리고 탈출 전야의 파티 에피소드…… 이 장면들을 보는 재미는 독자들에게 남겨 두고, 어쨌든 맥머피가 있는 곳에서 규율 메커니즘은 항상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랬으니 그를 치료할 수밖에……, 아니 상징적으로 살해함으로써 그를 ‘없는 존재’로 만들 수밖에…….
이제 다시 일과를
맥머피의 사인, 그러니까 결국 탈출에 실패하고 2층에서 전두엽을 절개 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랫취드의 목을 조른 사건 때문이다. 물론 생명 권력과 규율 권력의 수장 랫취드는 이 영화에서 가장 얄밉고 기계적인 냉혈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보다 더 악랄하게 여겨지는 뭔가가 있다. ‘시간표’가 그것이다.
푸코도 지적했듯이 규율과 시간표의 관계는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규율은 통제할 신체들의 동작에 일정한 시간을 부여하고, 동작 하나 하나를 유용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신체 사용 방식을 학습시킨 후, 이를 다시 신체 외부의 기계들과 연결시킨다. 간단히 말해 시간표를 작성한다.
규율은 우선 분․초 단위로 시간을 계산한다. 50분 수업 후, 10분 휴식, 점심식사는 40분 이내에, 청소시간은 6교시 후 20분, 6시 기상, 6시30분까지 구보, 9시 출근 6시 퇴근 등등. 또한 규율은 신체가 사용하는 시간의 질을 높이려는 경향도 있다. 즉, 끊임없는 통제, 감시자에 의한 압력, 작업을 방해하거나 산만하게 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시간의 최선의 소비를 도모하는 것 또한 규율 권력이 신체의 활동을 통제하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1시간에 몇 개 이상의 나사를 조일 것, 1분 안에 소총을 조립할 것, 하교 전까지 5장의 깜지를 쓸 것 등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 영화가 심한 경우 따분하다고 느껴지게 되는 이유도, 반대로 영화에서 우리를 가장 분노하고 흥분하게 하는 장면도 바로 이 시간을 통한 활동의 통제와 관련된다. 영화의 어떤 부분이 따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각 시퀀스들이 영화 전체를 걸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동일한 주기를 두고 동일한 공간에서의 일과를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랫취드 출근 → 침실 → 투약실 → 거실 → 토론치료 → 운동장 → 욕탕이나 수영장 → 투약실 → 다시 침실 → 랫취드 퇴근……’. 이러한 반복은 영화에 어떤 지루한 리듬을 부여하는데, 맥머피가 오기 전까지(그리고 그가 ‘양처럼 순해진’ 뒤로도) 병원의 일과는 랫취드의 출근과 함께 정확한 시간 단위로 분할되고 통제된다. 단지 맥머피가 병원에 순종적인 신체가 아닌 채로 존재했던 동안만, 일과표는 의문시되고 그 진행을 방해받는다.
반면에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롭고 역동적인 장면 역시 시간표와 관련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장면은 빌리의 자살 후에 맥머피가 랫취드의 목을 조르는 장면이다. 심하게 말을 더듬는 빌리는 탈출 시도 전날 밤, 격렬하고 해방적인 파티 후에 맥머피가 불러들인 그의 애인 캔디와 동침한다(그 후로 잠시 그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 맥머피가 더 훌륭한 의사다). 그러나 이 사실이 랫취드에게 발각되고, 랫취드가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겠다고 위협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다. 그러나 랫취드는 당황하지 않는다. 맥머피가 랫취드를 향해 돌진할 때까지 그녀가 뱉은 말,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 일과를 시작해야겠어요”이다. 빌리가 죽었는데, 그것도 랫취드 자신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그 순간에 그녀가 하는 유일한 말이 그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벌개진 얼굴과 거의 튀어나올 듯이 부풀어 오른 랫취드의 눈알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할 때, 관객은 제발 랫취드가 죽기를, 그대로 맥머피의 살인이 성공하기를 바라게 될 만큼 분노하게 된다. 맥머피가 일과표에 대해 가지는 적개심의 크기가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규율권력에 있어 일과의 준수, 시간표의 원활한 작동은 이처럼 몇 몇 일탈적인 개인의 죽음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잘 조정되고 원활히 진행되는 시간표는 느닷없이 죽어버리는 빌리처럼 불손하고 비순종적인 신체들을 리드미컬하게 굴복시키는 가장 탁월한 훈육의 수단이다. 시간표를 내면화한 인간은 절대 급작스럽게 죽거나 죽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우리들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일상의 일과표에 자살을 위한 시간이 배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추장의 행방
맥머피의 사인은 이제 분명해졌다. 규율권력이, 특히 그가 자주 어기곤 했던 일과표가 그를 죽였다. 그의 죽음 후, 병원은 다시 일과표대로 잘만 돌아간다. 그리고 그 병동이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란 말이 맞는다면, 우리도 그 안에서 일과표대로 참 잘 살아가고 있다. 감시받고, 기록되고, 처방받고, 비정상성을 스스로 의심하고, 법을 어기지 않고, 매순간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분절해서 사용하려고 기를 쓰면서, 참 잘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간혹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추장의 이후 행방이다. 자유를 절개당하지 않았으니 그는 자유롭게 잘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규율 없는 사회는 없는 법이니, 그 역시 지금쯤은 “양처럼 순해진” 신체가 되어 어디 정신 병동의 침실에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하고 누워 있는 건 아닐지…….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