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이상근 감독

여름방학 시즌 극장가의 승자로 올라선 <엑시트>는 미쟝센 단편영화제(이하 '미쟝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상근 감독의 입봉작이다. '비정성시', '절대악몽', '희극지왕', '사랑에관한짧은필름' 4개의 섹션을 통해 사회드라마, 호러, 코미디, 로맨스 장르의 단/중편을 소개해온 미쟝센 단편영화제는 2002년 처음 닻을 올린 이래 수많은 감독들을 한국영화 시스템에 배출해왔다. '미쟝센'에서 주목 받기 시작해 이후에 자기 영화 세계를 구축한 감독들을 소개한다.


이경미

<잘돼가? 무엇이든>

*2004년 '비정성시' 최우수작품상

잘돼가? 무엇이든

박해일을 캐스팅 한 단편 <오디션>(2003)을 발표했던 이경미 감독은 이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으로 만든 36분짜리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을 '미쟝센'을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 출품했다. 전혀 다른 성격 때문에 서로를 싫어하는 지영(최희진)과 희진(서영주)은 회사 회계장부 조작을 위해 야근을 하면서 기묘한 우정을 쌓는다. 노동현장에서 만난 두 여성 캐릭터의 갈등을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스타일로 풀어내 박수를 받았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에 스크립터로 참여한 뒤, 박찬욱의 영화사 모호필름이 제작한 첫 장편 <미쓰 홍당무>(2008)을 발표했다. <미쓰 홍당무>의 미숙(공효진)과 종희(서우),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과 미옥(김소희)이라는 전대미문의 여성캐릭터를 한국영화사에 남긴 이경미 감독은 이영애와 아이유 등 영화작업이 드문 톱스타를 캐스팅해 단편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미쓰 홍당무


윤종빈

<남성의 증명>

*2004년 '희극지왕' 최우수작품상

남성의 증명

윤종빈 감독이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건 학부 3학년 때 만든 단편 <남성의 증명>부터다. 서울에서 영어 공부하는 부산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관심 있는 여자를 룸메이트에게 뺏겼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힌 찌질한 남자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남성성'에 관한 윤종빈의 관심사는 계속 이어졌다. 1년 뒤 학부 졸업작품으로 연출한 장편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실제 군부대에서 촬영해, 억압적인 병영 문화가 결국 죽음을 불러온다는 서늘한 비관을 전달해 당시 영화계의 주목을 독차지 했다. <비스티 보이즈>(2008),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군도: 민란의 시대>(2014), <공작>(2018) 등 윤종빈 감독의 영화는 여전히 남자의 세계를 그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무르익는 연출력을 선보이는 한편 본인의 영화사 월광을 통해 제작한 <검사외전>(2015), <돈>(2019)을 연달아 수완 있는 제작자의 입지도 굳히고 있다.

용서받지 못한 자


나홍진

<완벽한 도미요리>

* 2005년 '절대악몽' 최우수작품상

제목 그대로다. <완벽한 도미요리>는 한 요리사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완벽한 도미요리를 만들고자 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제 손을 지지고 자르는 등 잔혹한 과정이 따르는 가운데서도 영화는 코미디의 분위기를 놓지 않는다. 이 단순한 이야기를 10분 남짓한 러닝타임 아래 풀어놓는 유려한 편집과 리듬에 특히 칭찬이 잇따랐다. 나홍진 감독은 <완벽한 도미요리>와 마찬가지로 대사 없이 진행되는 단편 <한>(2007)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듬해 김윤석과 하정우를 기용한 장편 데뷔작 <추격자>(2008)를 발표해 한국 스릴러의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과 함께 높은 흥행 성적까지 기록했다. 다시 한번 하정우-김윤석과 함께 만든 <황해>(2010)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곡성>(2016)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영화 팬들을 열광시켰다.

추격자


이상근

<베이베를 원하세요?>

* 2006년 '희극지왕' 최우수작품상

이상근 감독은 '미쟝센'과 특히 연이 깊다. <감상과 이해, 청산별곡>(2004)이 심사위원특별상을 <베이베를 원하세요?>(2006)가 '희극지왕'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출품한 <명환이 셀카>(2007)는 무관에 그쳤지만, <간만에 나온 종각이>(2010)가 다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이었던 류승완 감독의 눈에 들어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에 연출부로 참여한 그는 무려 11년 만에 류승완의 영화사 '외유내강'이 제작한 <엑시트>를 발표했다. 한국적인 상황을 경유해 재난, 코미디, 가족, 로맨스를 가볍게 아우르는 연출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을 뿐만 아니라, 개봉 일주일 만에 4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엑시트


박정범

<125 전승철>

* 2008년 심사위원특별상

박정범 감독은 두 수도승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단편 <사경을 헤매다>(2001, 공동연출) 이후 7년 만에 전혀 다른 스타일의 단편 <125 전승철>로 '미쟝센'의 문을 두드렸다. 학부 시절 만나 형제처럼 어울려지내던 탈북자 전승철의 삶을 영화로 만든 <125 전승철>은 박정범 감독이 주인공 전승철을 연기했다. 이 작품을 본 이창동 감독은 <시>(2010)의 조감독으로 박정범을 영입했고, 생전에 자신의 삶을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전승철이 남긴 "형이 만든 장편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는 메시지를 보고 <125 전승철>을 장편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년 뒤 <무산일기>(2010)가 완성돼 로테르담영화제 대상,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무산일기


조성희

<남매의 집>

* 2009년 대상 & '절대악몽' 최우수작품상

2009년, '미쟝센'이 시작한 지 8년 만에 드디어 첫 대상 작품이 나왔다.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이다. 반지하 집에서 갇혀지내는 오누이가 정체불명의 외부인의 침입을 받으면서 벌어지는 기괴한 상황을 다룬 43분짜리 중편이다. "'알지 못함'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표현"한 영화는 가난한 집의 눅눅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SF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내며 관객을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1년 만에 완성한 첫 장편 <짐승의 끝>(2010)은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잔혹한 상황을 펼쳐내는 <남매의 집>의 방향을 더 밀어붙인 작품이었다. 상업영화 시스템에 들어와 만든 <늑대소년>(2010)은 송중기와 박보영이 보여준 순애보에 힘입어 700만 관객을 만났고,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은 조성희의 관심이 여전히 동화적인 세계 안에서 사회의 결을 드러내려는 데에 있다는 걸 증명했다. 지난 7월 크랭크인 한 신작 <승리호>는 한국영화 최초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SF영화다.

짐승의 끝


이용승

<런던유학생 리차드>

* 2010년 '비정성시' 최우수작품상

<런던유학생 리차드>는 세무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석이 런던에서 유학했다는 이유로 사무장의 총애를 받는 리차드가 사실 술집 웨이터였다는 걸 알게 되면서 변화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출신'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만으로 대우 자체가 달라지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노동 현장의 문제를 정조준 한 이용승 감독은 이후 만든 장편들에서도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계속 파고들었다. 장편 데뷔작 <10분>(2013)은 "말은 많은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회사에 정규직이 되고자 고군분투 하는 인턴사원을, 신하균과 도경수를 캐스팅 한 <7호실>(2017)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은 시체를 둘러싸고 DVD방 사장과 아르바이트생이 사투를 벌이는 상황을 그렸다.

10분


허정

<저주의 기간>

* 2010년 '절대악몽' 최우수작품상

집값은 떨어지고, 누나는 갑자기 기억력을 잃어버린다. 엄마는 교회에, 아빠는 무당에 빠져 있다. 누나는 2년 전 잃어버린 강아지가 문제라면서 그걸 찾아나선다. 허정 감독의 <저주의 기간>은 무언가에 강박적으로 이끌리는 한 가정을 비추면서 '욕망'과 '불안'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었다. <저주의 기간>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집착이 얼마간 관념적인 선에서 그쳤다면, 아이들의 주술 의식을 소재로 한 단편 <주희>(2012)로 다시 한번 '절대악몽'부문에서 수상하고 곧 발표한 장편영화 <숨바꼭질>(2013)은 공포의 주체가 품은 광기가 바로 '내 집'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줬다. 허정 감독은 <숨바꼭질>의 흥행 이후 소리를 적극 활용하는 시도를 꾀한 <장산범>(2017)을 연출하며 공포영화에 집중한 필모그래피를 구축하고 있다.

숨바꼭질


엄태화

<숲>

* 2012년 대상 & '절대악몽' 최우수작품상

엄태화 감독은 2003년부터 꾸준히 단편영화를 연출하면서 <친절한 금자씨>(2005)와 <기담>(2007)의 연출부로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숲>(2012)은 <남매의 집> 이후 3년 만에 '미쟝센' 대상으로 선정됐다. 어릴 적부터 친했던 세 친구가 과수원에서 게임을 하고, 그 중 두 친구가 숲속에서 자살하는 남자를 담을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찍는 이야기가 혼재되어 펼쳐지는 작품이다. 두 개의 시점을 교차하며 진행되는 영화를 가능케 한 배우 엄태구와 류혜영의 활약은 엄태화 감독의 장편 <잉투기>(2013)로 이어졌고, 범람하는 인터넷 콘텐츠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자화상을 우습고도 씁쓸하게 담아내는 솜씨에 찬사가 잇따랐다. 보다 넉넉한 자본 아래,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방향을 한껏 밀어붙여 <가려진 시간>(2016)을 만들었지만 관객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높은 흥행 성적을 기록하진 못했다.

잉투기


장재현

<12번째 보조사제>

* 2014년 '절대악몽' 최우수작품상

장재현 감독은 단편 <12번째 보조사제>로 '절대악몽'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뒤 1년여 만에 장편 <검은 사제들>(2015)로 업그레이드 했다. 사실, 4년 만에 <검은 사제들>이 완성됐다고 보는 게 맞다. 장재현은 3년 전에 <검은 사제들>의 트리트먼트를 만들었고, 한국에선 생소한 구마를 소재로 삼은 영화를 만들기 앞서 <12번째 보조사제>를 먼저 선보였다. 이 작품이 '미쟝센'에서 수상한 덕분에 제작사와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 26분짜리 단편은 <검은 사제들>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구마의식 부분에 집중됐다. 구마 의식의 과정, 악마가 별별 언어로 쏟아내는 저주 등이 일찍이 구체적으로 계획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포영화의 화법으로 종교를 탐구하는 장재현의 관심은 류승완의 영화사 외유내강이 제작한 <사바하>(2019)로 이어졌고, 보다 깊어졌다.

검은 사제들


문동명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