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영화의 손을 잡고 미래로 간다

‘20+1, 벽을 깨는 얼굴들.’ 21회를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여성영화제)의 슬로건이다. “앞으로의 10년을 기약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영화제의 마음”을 슬로건에 담았다는 것이 영화제측의 설명이다. 올해 여성영화제의 ‘파격’은 개최 시기, 상영 장소의 변화에서도 느껴진다. 봄에서 여름으로, 신촌에서 상암으로 시기와 터전을 옮긴 여성영화제는 어떤 모습일까. 더불어 올해 초 조직 정비 문제로 갈등을 겪은 뒤 새롭게 구성된 김은실 이사장, 변재란 조직위원장, 박광수 집행위원장 체제의 여성영화제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여성영화제의 변화가 궁금하다면 8월29일부터 9월5일까지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일대를 찾길 바란다.

올해의 영화제에서는 마케도니아영화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를 필두로 31개국 119편의 상영작이 소개된다. 지난해 신설된 국제장편경쟁과 한국장편경쟁 부문을 비롯한 네개의 경쟁부문은 역대 최다 출품작 기록을 경신했다고 영화제는 밝혔다. 이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영화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의 증가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올해의 여성영화제는 다양한 특별전을 마련했다. 올해 초 작고한 여성영화의 거장 아녜스 바르다와 바버라 해머를 기리는 추모전을 비롯해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한 <100년의 얼굴들>전, 한국 최초의 여성 영상집단 바리터 창립 30주년의 의의를 되새기는 자리, 한국과 수교 30주년을 맞이한 폴란드 여성영화 특별전 등이 준비되어 있다. 10회를 맞은 여성영화 지원프로그램 피치&캐치의 성과를 돌아보는 특별전과 행사, 밀실에서 이뤄지는 남성 중심의 유흥 문화의 비즈니스의 문제를 ‘룸의 성정치’라는 이름으로 쟁점화한 섹션도 기대를 불러모은다. <씨네21>은 올해의 상영작 중 10편의 추천작을 엄선했다. 이들 작품은 여성영화의 경계가 점점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젠더, 섹슈얼리티, 노동, 경제, 세대, 계급 등 여성과 관계맺는 이슈의 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으며 이를 조망하는 여성감독들의 시선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점을 올해의 상영작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God Exists, Her Name Is Petrunya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마케도니아, 벨기에, 슬로베니아, 프랑스, 크로아티아┃2018년┃101분┃개막작

페트루냐는 마케도니아의 작은 마을에 산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마을에선 매년 1월이면 강물에 십자가를 던지는 종교의식이 행해지는데, 성직자가 번영과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나무 십자가를 강물에 던지면 남자들 수백명이 십자가를 쟁취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든다. 마침 그 길을 지나던 페트루냐는 물속에 뛰어들어 십자가를 손에 넣는다. 남자들만 참여할 수 있는 종교행사에 여자가 참여해 가장 먼저 십자가를 손에 넣었으니 남자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무효라 주장한다. 페트루냐는 경찰 조사까지 받지만 십자가를 내놓을 생각이 없다. “이건 내 거야!”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그는 꿋꿋하다. 여성을 배제해온 종교, 차별이 만연한 가부장 사회에 대항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싸움을 끌고 가는 페트루냐의 모습이 시종 흥미롭다. 침체돼 보이는 마을 공동체를 원경으로 조망한 화면과 감정으로 들끓는 페트루냐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낸 화면의 대비는 삐져나온 송곳 같은 페트루냐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든다. 마케도니아의 여성감독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의 작품으로,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이다.

이주현


해일 앞에서

The Fearless and Vulnerable

전성연┃한국┃2019년┃85분┃한국장편경쟁

2016년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됐다. 대한민국에 “페미니즘의 해일”을 몰고 온 충격적 사건이었다. 같은 해 6월,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모임인 페미당당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이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 ‘페미존’을 꾸려 행진하며 “민주주의와 여성혐오는 함께할 수 없다”는 구호를 외쳤고,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들의 여성관련 공약을 검증했고, 낙태죄 폐지에 힘을 보태는 거리 이벤트와 행동을 이어갔다. <해일 앞에서>는 페미당당의 지난 활동과 활동 과정에서 페미당당 구성원들이 느낀 고민을 들려주는 다큐멘터리다. 누구는 엘리트주의적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을, 누구는 이성애 중심의 세상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느끼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다수는 친목의 공동체 이상의, 지속 가능하며 유의미한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페미당당의 미래를 고민한다. 20대 페미니스트 집단으로서 페미당당이 보여준 놀라운 에너지와 그 에너지가 발현되기까지 이들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눈물 흘렸던 시간을 비추는 작품이며, 지난 3년간 대한민국을 휩쓴 페미니즘의 ‘해일’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주현


와인스타인

Untouchable

우르슬라 맥팔레인┃영국┃2019년┃98분┃쟁점들: ‘룸’의 성정치 

‘쟁점들’ 부문은 여성영화제가 그해 가장 뜨거운 여성주의 이슈를 선정해 관련 영화들을 상영하는 섹션이다. 올해의 주제는 ‘룸’의 성정치로, ‘룸’살롱, 단톡‘방’ 등을 통해 공고화된 남성 카르텔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와인스타인>은 전세계에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공과 몰락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다. 수많은 오스카상과 거액의 돈을 벌어들이던 웨인스타인은, 어떻게 성범죄자로 전락하게 되었나. 영화는 웨인스타인에게 성폭력을 당했던 이들의 증언을 비롯해 업계 관계자와 친구, 지인들이 말하는 웨인스타인의 실체를 좇는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웨인스타인의 성범죄가 주변인들에게 미친 영향이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로서 상처를 딛고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되찾기 위해 노력 중인 피해자들의 인터뷰는 성범죄가 사회에 남긴 생채기를 확인하게 한다.

장영엽


우리는 매일매일

Us, Day by Day

강유가람┃한국┃2019년┃85분┃한국장편경쟁

최근 몇년 새 여성들이 야기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페미니스트이자 영화감독인 강유가람 감독은 자문한다. ‘나는 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함께 여성운동을 했던 친구들을 찾아가 답을 구하려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은 30, 40대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현재와 그들의 고민을 조명한다. 20대 때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여성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의 삶의 방향은 달라져 있다. 여성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여성주의의 실천을 고민하고, 더불어 ‘오래’ 잘 사는 삶을 꿈꾸는 페미니스트들이다. 영화는 페미니즘의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여성들이 ‘매일매일’ 실천하는 많은 것들이야말로 그 자체로 의미 있음을 전한다.

장영엽


#여성쾌락

#Female Pleasure

바버라 밀러┃스위스, 독일┃2018년┃97분┃새로운 물결 

현대사회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집착한다. 성적 매력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모습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든지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성에 대한 담론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배제되어왔다. 여성들은 왜 섹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자신의 성적 쾌락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된 걸까? 이 다큐멘터리는 세계 각국에서 살아가는 다섯 여성을 좇으며 가부장제 사회가 오랜 시간 여성의 성을 어떤 방식으로 억압해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야 했던 미국의 유대인 여성(데보라 펠드만), 공공장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이 일어나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인도 사회의 여성(비티카 야다브), 수도원에서 신부에게 성폭행당했지만 교회의 침묵에 좌절한 독일 여성(도리스 바그너), 버자이너에 대한 사회적 침묵을 깨고자 3D 프린팅으로 자신의 질을 재현했으나 음란죄로 법정에 선 일본 여성(로쿠데나시코), 아프리카 대륙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할례의 부당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소말리아 출신 영국 여성(레일라 후세인)의 사연이 펼쳐진다. 이들의 경험담은 자신의 몸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길 강요 받았던 여성들의 오랜 억압의 역사를 주지시키는 한편, 변화를 위한 한 걸음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장영엽


마지막 무대

The Last Stage

반다 야쿠보프스카┃폴란드┃1948년┃111분┃폴란드 여성영화의 힘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올해 폴란드와 한국의 수교 30주년을 맞아 폴란드의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AMI)과 함께하는 ‘폴란드 여성영화의 힘’ 섹션을 마련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공식 상영되는 <마지막 무대>는 그중 한편이다.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 영화로 유명한 폴란드영화계의 대모, 반다 야쿠보프스카의 대표작이다. 폴란드 사회주의 당원으로 나치에 저항하던 야쿠보프스카는 게슈타포에 체포된 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마지막 무대>는 그러한 감독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수용소에서 아이를 낳은 뒤 죽은 사람을 산모로 둔갑시켜 가까스로 살아난 여성부터 하나밖에 없는 백신을 맞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이들의 비극적인 사연까지, <마지막 무대>는 지금까지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종종 소외되어왔던 여성들에게도 다종다양한 서사가 있었음을 알린다. 오케스트라 단원, 통역사, 의사, 감독관 등 비극의 현장에서 저마다의 역할로 존재하는 동시에 함께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했던 여성들의 결연한 의지가 마음을 울린다

장영엽


의자 뺏기 놀이

The Chair’s Game

루치아 키알라┃독일┃2018년┃119분┃새로운 물결

앨리스는 베를린에 사는 39살 여성이다. “몇몇 클라이언트와 일하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이자 온라인 에디터.” 공적인 자리에서 앨리스가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설명과 꽤 다르다. 고정적인 일자리가 없는 그는 끊임없이 구직 활동을 이어가지만 채용 담당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앨리스를 뽑지 않는다. 구직자의 채용 활동을 돕는 기관에선 면접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매뉴얼만 가르칠 뿐이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앨리스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긴다. 난방이 끊기고, 계좌 잔고가 줄어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삶을 힘들게 하는 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존감을 점점 잃어간다는 것이다. <의자 뺏기 놀이>는 여러모로 한국영화 <소공녀>를 떠올리게 한다. 다른 사람의 의자를 뺏지 않는다면 영영 안정을 찾을 수 없는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마땅할 권리를 점점 잃어가는 한 여성의 초상이 현실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필치로 그려진다. 제노바 출신의 배우 루치아 키알라의 장편 데뷔작.

장영엽


부엌의 전사들

The Heat: A Kitchen (R)evolution

마야 갈루스┃캐나다┃2018년┃72분┃쟁점들: ‘룸’의 성정치  

미슐랭 3스타를 받은 프랑스의 안 소피 픽, 뉴욕의 아시아 퓨전요리의 대가 아니타 로, 뉴욕의 유명 베지테리언 식당의 셰프 아만다 코헨 등 <부엌의 전사들>에 등장하는 7명의 여성 셰프는 남성 셰프들이 점령해온 식당에 변화를 몰고 온 이들이다. 여자들은 항상 요리를 해왔지만 유명 식당의 키친을 진두지휘해온 건 대부분 남자였다. 칼과 불을 쓰는 주방에는 여전히 군대식 문화가 만연하고, 셰프는 작전명령을 내리는 사령관처럼 행동한다. <부엌의 전사들>에 등장하는 여성 셰프들은 주방의 수직적 문화에 문제제기를 한다. 다시 말해 영화가 주목하는 건 안소피 픽, 아니타 로와 같은 유명 여성 셰프들의 성공신화가 아니라 이들이 남성 중심적 키친 문화를 어떻게 바꿔가고 있고 이것이 젊은 셰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이다. 일류 셰프들의 요리와 비밀스런 공간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러온다.

이주현


레이디월드

Ladyworld

아만다 크레이머┃미국┃2018년┃94분┃국제장편경쟁

생일 파티 중이던 8명의 10대 소녀들이 지진으로 집 안에 갇힌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모두 막혔다. 생존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하는데 오히려 이들은 편집증적으로 변해간다. 아니 미쳐간다. <레이디월드>는 윌리엄 골딩의 대표작인 <파리대왕>의 소녀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집 안에 고립된 소녀들은 광기가 이성을 잠식하는 과정을 통과하고, 불안과 공포가 우정과 믿음을 시험하는 단계를 경험한다. 영화엔 오로지 8명의 소녀만 등장한다. 하이패션의 화보 같은 구도로 서 있는 소녀들의 이미지와 고음의 새된 소리 등을 섞어 만든 불길한 분위기의 사운드는 <레이디월드>를 잔인한 이미지 없이도 잔인한 호러영화처럼 보이게 만든다. 미국의 주목받는 여성감독 아만다 크레이머의 작품이며 마야 호크, 애너리즈 바소, 아리엘라 바러 등 라이징 스타를 만나는 재미도 만끽할 수 있다.

이주현


빌리와 엠마

Billie & Emma

사만다 리┃필리핀┃2018년┃107분┃퀴어 레인보우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풋풋한 10대 퀴어영화다. 마닐라에서 시골로 전학 온 빌리. 짧은 머리에 투박한 워커를 신은 빌리는 가톨릭 고등학교의 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이모의 집에 머물게 된다. 전학 첫날부터 학교의 모범생 엠마와 빌리는 이런저런 일로 엮이고, 좋아하는 감정을 확인한 뒤부터는 비밀스럽게 쪽지를 주고 받으며 연애를 이어간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있던 엠마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 아이들은 또 다른 장애물에 맞닥뜨린다. 10대의 동성연애와 임신을 다루지만 영화는 밝은 기운을 잃지 않는다. 무게잡지 않고 훈계하지 않으며, 아름답게 빌리와 엠마의 앞날을 응원한다. 참고로 친구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빌리가 의지하듯 읽는 책은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레즈비언 작가인 리타 메이 브라운의 <루비프루트 정글>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퀴어 문학의 고전 <루비프루트 정글>을 빌리의 손에 쥐어준 사만다 리 감독의 따뜻한 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이주현


씨네21 www.cine21.com

장영엽 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