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트로이어>

“서부극 안의 서부극”(스펙타큘러USA), “서부극 감성을 내포한 현대 탐정 누아르”(컬처). 9월 19일 개봉한 <디스트로이어>가 받은 외신 리뷰 중 일부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공감할 수도, 반대로 ‘웬 서부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사에서,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서부극은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은 장르 중 하나다. <디스트로이어>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서부극(이하 웨스턴)은 무엇이며, 현재의 서부극은 어떤 형식을 빌리는지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대열차 강도>

웨스턴은 이름(Western)처럼 미국이 서부 지역을 개척해나가는 ‘서부개척시대’ 시절을 그린 작품을 뜻한다. 서부극이라 분류되는 작품은 대개 19세기 말(1850~1890년대)을 그린다. 배경이 19세기 말이니, 유서가 깊은 장르는 아니다. 하지만 1903년 <대열차 강도>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영화 매체와 깊게 유착되면서 20세기 중반까지 할리우드 영화의 주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웨스턴의 원류가 대중들이 싸게 사서 읽을 수 있는 펄프 픽션 같은 계열이었기에 영화의 상업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대중들이 웨스턴에 열광한 이유는 다양했다. 일단 동부 지역에서 서부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철로 사업, 마을 건설, 선교 활동 등 근대화 과정을 거쳤다는 것.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스스로 영토를 확장하며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역사적 자부심을 안겨줬다. 둘째는 무법지대의 모험과 실존 인물들. 서부 개척은 정부가 주도한 정책이지만, 영토가 넓어지면 이익을 볼 수 있는 사업가들이 더 열을 올린 사업이다. 자본가들은 개척지를 먼저 차지할 수 있게 용병을 고용하거나 사업을 선점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자본을 투자했다. 그 과정에 반대급부를 얻으려는 갱단이 등장했고, 현상금 사냥꾼이나 보안관 등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사회 전반에 드러난 대립구도와 돈에 대한 욕망은 이야기 소재로도 충분했고 대중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브론코 빌리 앤더슨(<어 로드 에이전스 러브>) / 톰 믹스(<더 미라클 라이더>)

이런 이유로 무성 시대 초기 웨스턴은 백인 개척자는 선하고, 반대로 원주민들은 미개하거나 명예를 모르는 악한으로 그려지곤 했다. 눈에 보이는 선악 구도와 끝내 백인 개척자가 승리하는 전개는 웨스턴을 단순화시켰지만, 대중들이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기 좋은 구조였다. 브론코 빌리 앤더슨, 톰 믹스, 윌리엄 S. 하트 등 카우보이 스타들도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30년대, 유성영화 시스템이 보급되면서 웨스턴의 거듭되는 자기복제와 지나치게 선동적인 내용은 주류 영화사에서 밀려났다. 세계적인 대공황에 미국인들이 더 이상 역사적 자부심을 만끽할 여지가 없어졌다는 것도 웨스턴을 변두리로 밀어내는데 일조했다.

<역마차>

1930년대 말,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본격적으로 스튜디오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감독과 배우는 스튜디오에 고용돼 여러 작품을 계속 작업할 수 있었고, 그때 존 포드 감독이 1937년 <역마차>로 서부영화 부흥의 신호탄을 터뜨렸다. 훗날 서부극의 얼굴이 될 존 웨인의 전성기가 열린 순간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스카 페이스>를 만든 하워드 혹스의 <무법자>, 로버트 알드리치의 <베라 크루스>, 안소니 만의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 등이 나오며 서부 영화가 다시 주류 영화계에 편입됐다.

<무법자> /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

만일 1930년대 웨스턴이 무성 시대 웨스턴을 그대로 답습했다면 웨스턴의 부흥은 도래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존 포드를 위시한 후기 웨스턴의 거장들은 시대의 흐름, 대중들의 의식 변화를 뚜렷하게 인식했다. 이들은 백인 개척자를 그대로 가져가되 그들이 몰아낸 원주민의 고통을 포착하거나 돈으로 인간을 휘두르려는 자본가를 적으로 배치했다. 이로써 백인 개척자는 (설령 주인공이더라도) 폭력이 곧 정의가 되지 않는 걸 인지했으며 때로는 선의가 아닌 이기심에 움직이는 입체적인 인물로 거듭났다.

수정주의 웨스턴을 넘어 영화사에 남는 고전, <수색자>(왼쪽)와 <와일드 번치>

이런 변화는 두 가지 사조의 막을 열었다. 하나는 1950년대 미국 본토에서의 ‘수정주의 웨스턴’(Revisionist Western). 수정주의 웨스턴은 선한 백인과 악한 원주민이란 구도를 완전히 타파하고 유색인종 카우보이, 백인으로 구성된 강도단, 떠난 남성 대신 가정을 지키는 여성 등 고전 웨스턴과는 다른 인물상을 그렸다. 이런 변화는 1960년대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짙어지면서 더욱 가속화됐다. 미국인들의 개척정신이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고찰과 평화를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영화에 반영된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위), 그가 주연한 ‘달러 삼부작’ 포스터.

다른 하나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주도한 ‘스파게티 웨스턴’이다.(‘마카로니 웨스턴’은 일본에서 주로 사용한 명칭). 스파게티 웨스턴은 이름처럼 조금 독특한 환경에서 제작됐다. 이탈리아 자본에 이탈리아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대개 멕시코나 이탈리아에서 촬영한 서부 영화. 스파게티 웨스턴은 할리우드 웨스턴보다 저예산으로 제작됐지만 더 폭력적인 장면들을 그렸다. 이는 스파게티 웨스턴이 추구하는 선악의 모호함, 이기적인 인물상과 맞물려 매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스파게티 웨스턴이 배출한 스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 <석양의 무법자>로 구성된 ‘달러 3부작’에서 이름 없는 남자(금발이라서 블론디라고 불린다) 역을 맡아 특유의 마초적인 캐릭터성을 확립했다.

웨스턴의 자조적인 반란은 시대와도 맞아떨어진다. 미국은 더 이상 개척정신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를 양분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냉전은 강력한 외부의 적이었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의 영화계는 소련 및 공산주의 국가를 적으로 한, 예를 들면 <007> 시리즈 같은 영화들을 제작했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 세계를 지키는 영웅의 등장은 이전에 미국 신화를 담당한 서부극의 마초적인 카우보이들을 점차 밀어냈고, 그 자리는 전형적인 영웅보다는 이기적이거나 회한에 잠긴 수정주의 웨스턴 주인공들의 차지였다.

<용서받지 못한 자>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냉전은 종결됐다. 그러나 웨스턴이 다시 고전적인 권선징악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아이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용서받지 못한 자>가 웨스턴 시대의 끝을 선포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한때 서부 개척시대를 장악한 전설의 총잡이 윌리엄 빌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부패한 보안관 리틀 빌 대거트(진 헥크만)에게 맞서는 내용을 담는다. 이 영화에서 전설의 총잡이는 과거를 한탄하며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는 늙은이요, 주민을 지켜야 할 선량한 보안관은 마을의 폭군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을 대변하는 웨스턴을 전복시켜 정의와 개척 정신으로 위장한 폭력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등장과 함께 일각에선 폭력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미국의 합리화를 담당한 웨스턴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웨스턴은 죽었다. 한동안은 그 말이 맞는 듯했다. 시대착오적인 개척 정신이 다시 부활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웨스턴은 2000년대 말 후기부터 새로운 장르적 이식을 시작했다. 이른바 네오 웨스턴(Neo-Westerns)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네오 웨스턴은 웨스턴에 내포된 ‘서부 개척시대’가 제하고도 웨스턴의 캐릭터성이나 구조적 특징을 취한다. 대표적인 예라면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 영화는 현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서부극 특유의 황량하고 메마른 정서,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추격전, 주인공의 이기적인 목표 등이 웨스턴을 닮았다. 코엔 형제는 이 영화 이후에도 <진정한 용기>를 리메이크한 <더 브레이브>, 컨트리 음악가의 여정을 담은 <인사이드 르윈>,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카우보이의 노래>로 네오 웨스턴의 계보를 이어갔다.

<더 브레이브>(왼쪽), <카우보이의 노래>

<로스트 인 더스트>는 강도짓을 하는 백인 형제, 백인과 인디언 혈통의 보안관이 등장한다.

코엔 형제 못지않게 네오 웨스턴의 기수로 분류되는 건 테일러 쉐리던. 그가 각본을 쓴 ‘국경 삼부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로스트 인 더스트>, (연출까지 한)<윈드 리버>는 서부극 특유의 황량한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이중 네오 웨스턴에 가장 적합한 작품은 <로스트 인 더스트>. 영화 배경이 (카우보이들의 정신적 고향) 텍사스이고, 은행 강도 형제와 보안관이 벌이는 추격전, 원주민 캐릭터를 통한 개척시대 은유 등이 녹아있다. <엑스맨> 시리즈의 하나인 <로건>도 영화 <셰인>의 몇몇 요소들을 차용하고 직접 장면을 인용하면서 네오 웨스턴과 히어로 영화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바 있다.

<로건>


<디스트로이어>

그렇다면 <디스트로이어>에 담긴 네오 웨스턴 요소는 무엇인가. <디스트로이어>의 큰 줄기는 느와르에 가깝다. 과거 자신과 얽힌 범죄 조직을 뒤쫓는 이야기. 거기에 사소한 디테일로 네오 웨스턴의 기운을 풍긴다. 먼저 극중 컨트리 음악을 언급하는 장면이 등장하고(해당 장면은 에린이 본격적으로 사건에 발을 담그는 순간이다), 범죄자였던 한 인물은 교회를 통해 불법 이주민들을 돕고 있다. 웨스턴에서 교회는 무법지대의 유일한 안식처로서 묘사되는 공간이다.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에린이란 캐릭터도 과거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범죄 조직을 추적해나간다. 이런 요소들은 모두 수정주의 웨스턴의 것들로 황량한 <디스트로이어> 속 LA의 풍경과 함께 네오 웨스턴다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마지막으로 웨스턴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요소를 소개한다.

퀵드로

Quick Draw. 동시에 총을 뽑아 상대를 쏘는 결투 방식. 웨스턴의 가장 흔한 장면 중 하나.

<석양의 무법자>

멕시칸 스탠드오프

<석양의 무법자>, 그리고 이를 차용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나오는 1:1:1의 대결 구도.

회전초

동그랗게 뭉쳐져 바람부는대로 굴러가는 풀의 일종. 웨스턴 영화가 아니더라도 황량한 풍경의 장면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요소.

WANTED / Dead OR Alive

현상금 전단지에서 볼 수 있는 문장. 수배자를 생포하든 사살하든 상관없이 현상금을 지급한다는 문구.

<빽 투 더 퓨처 3>

반다나

사각형 모양의 천. 손수건을 떠올리면 된다. 웨스턴에서 강도들이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많이 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