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2019)의 지니 역으로 그간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한 윌 스미스가 최신작 <제미니 맨>을 통해 1인 2역에 도전했다. 오랜 시간 최고로 인정 받은 베테랑 요원과 그와 똑같이 생긴 젊은 육체의 요원이 한바탕 격투를 벌이고,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과정에서 윌 스미스의 원맨쇼가 돋보인다. 1인 다역을 소화해 배우로서 역량을 마음껏 과시한 또 다른 사례들을 소개한다.
마이크 마이어스는 두 번째 영화 <그래서 난 도끼 부인과 결혼했다>(1993)에서 시인 찰리와 그의 아버지 역을 함께 맡아 거센 스코틀랜드 억양을 구사했다. B급 유머와 온갖 스파이물에 대한 패러디들이 뒤섞인 코미디 <오스틴 파워> 시리즈에서는 영국 스파이 오스틴 파워와 그의 영원한 숙적 닥터 이블을 연기했다. 첫 번째 <오스틴 파워>(1997)는 극장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했지만 다행히 비디오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1999년과 2002년 후속편이 제작됐는데,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마이어스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팻 바스타드에 골드멤버까지 하나씩 늘어갔다.
1인 다역은 서로 차이점이 많은 캐릭터들의 조합인 경우가 많다. <소셜 네트워크> 속 아미 해머가 연기한 윙클보스 형제는 좀 다르다. 이 '부잣집 도련님' 쌍둥이는 평소 스타일링도 비슷하고, 성격도 (타일러 쪽이 좀 더 화끈한 편이긴 해도) 대동소이한 편이다. 어쨌든 그들은 <소셜 네트워크> 안에서 마크 저커버그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기는 헛똑똑이로 그려진다. 아미 해머는 카메론과 타일러를 번갈아 연기했고, 둘이 동시에 한 프레임에 잡히는 경우엔 배우 조시 펜스가 타일러의 몸을 맡아 후반작업으로 해머의 얼굴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8,90년대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했던 배우 에디 머피는 일찌감치 <구혼 작전>(1988), <브루클린의 뱀파이어>(1995)를 통해 1인 다역의 남다른 재능을 뽐냈다. 전설적인 코미디언 제리 루이스의 1인2역이 돋보였던 <너티 프로페서>(1963)를 1999년에 리메이크 한 작품에서는 거대한 체구 때문에 서른다섯 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클럼프 교수와 그의 가족들, 자신이 만든 약물을 마셔 탄생한 분신 버디 러브까지, 무려 1인7역을 맡았다. <보우핑거>(1999)로 또 한번 1인 2역을 선보인 머피는 전편의 흥행에 힘입어 팝스타 자넷 잭슨까지 가세한 <너티 프로페서 2>(2000)에서 총 8개 캐릭터로 분했다.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스>(1936) 등을 통해 무성영화 스타로 발돋움한 찰리 채플린의 첫 토키영화 <위대한 독재자>(1940). 늘 감독과 주연배우의 역할을 같이 수행했던 채플린은, 가상국가 토매니아의 독재자 힌켈과 기억상실증에 걸린 유대인 이발사를 연기했다. 토매니아와 힌켈은 물론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패러디로, 채플린은 한껏 가벼운 톤으로 나치즘에 대한 풍자를 실컷 늘어놓았다. 독재자와 이발사가 서로 똑같이 생기는 바람에, 독재자는 돌격대에 체포당하고 이발사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오스테를리히 정복에 나서게 되는데, 연단에 오른 이발사가 각성하면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연설 신은 단연 <위대한 독재자>의 백미라 할 만하다. 채플린은 <위대한 독재자>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만 <필라델피아 이야기>(1940)의 제임스 스튜어트에 밀려 오스카 트로피는 쥐지 못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는 스탠리 큐브릭의 지독한 냉소가 담긴 반전(反戰) 블랙코미디다. 큐브릭의 전작 <롤리타>(1963)에 참여하고 <핑크 팬더> 시리즈의 주인공 클루조 경감으로 활약한 피터 셀러스는 주요 캐릭터 3명의 캐릭터를 소화해 영화 전반을 장악했다. 영국 공군 대령 라이오넬 맨드레이크, 미국 대통령 머킨 머플리, 독일의 핵전쟁 전문가 스트레인지러브 박사 모두 셀러스의 연기였다. 셀러스는 대사 대부분을 즉흥으로 선보이면서 같은 장면을 수차례 찍는 큐브릭의 극단적 촬영 스타일을 감당했다. 전기영화 <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2004)에서 셀러스를 연기한 제프리 러쉬 역시 1인 다역을 선보였다.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에서도 1인 다역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마이클 J. 폭스는 1편에서 1985년 현재와 1955년 마티의 아버지를 연기한 데 이어, 4년 뒤 개봉한 2편과 3편에서는 2015년에 사는 마티의 아들과 딸, 1885년의 마티의 고조할아버지까지 소화하면서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시리즈의 주인공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리아 톰슨, 토마스 F. 윌슨, 엘리자베스 슈도 함께 1인 다역을 맡아 때마다 찰떡 같은 호흡을 보여주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던 멀티플레이다.
본래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에서 폴 다노가 맡은 역은 일라이의 형 폴이었다. 하지만 일라이 역의 켈 오닐이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위협을 느낀 나머지 제 발로 현장을 떠났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선데이 형제를 쌍둥이로 바꾸어 다노에게 일라이와 폴 모두를 맡겼다. <미스 리틀 선샤인>(2006)으로 막 얼굴을 알리던 폴 다노는 데이 루이스의 기운에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그 위압감을 즐겨가면서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믿음을 팔아 사리사욕을 채우는 목자 일라이의 추악함을 구현한 폴 다노의 음침한 연기는, 부를 향한 욕망에 투신한 괴물 다니엘 플레인뷰를 한층 더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오우삼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수작 <페이스 오프>(1997)는 걸출한 두 배우 존 트라볼타와 니콜라스 케이지의 격전지다. 가정적이고 유능한 FBI 요원은 숀은 사이코패스 악당 캐스터 트로이에게 아들을 살해당한 후 점점 망가져간다. 숀은 검거 작전 중에 혼수상태에 빠진 캐스터가 계획했던 폭탄 테러의 행방을 알기 위해 그의 얼굴 가죽을 쓰고, 예상보다 일찍 깨어난 트로이가 숀의 얼굴이 된다. 즉, 케이지와 트라볼타는 서로의 캐릭터, 선과 악을 번갈아 연기한다. 비단 한 배우가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 걸 넘어, 상대배우가 선보인 연기에 반응해 어떻게 캐릭터를 구현해내는지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영화다. 두 배우의 호연 덕에, 얼굴을 바꾸어 상대방의 삶을 산다는 황당무계한 설정이 온전한 설득력을 얻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2002년 작 <어댑테이션>에서는 쌍둥이 형제를 연기하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만날 수 있다.
작품마다 놀라운 변신을 보여주는 틸다 스윈튼은 짐 자무쉬의 단편 <사촌들>(2004), 봉준호의 <옥자>(2017)에서 1인 2역을 소화한 바 있다. <아이 엠 러브>(2009)와 <비거 스플래쉬>(2015)를 함께 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탈리아의 걸작 호러 <서스페리아>(1977)를 리메이크 하면서 스윈튼에게 캐릭터 셋을 청했다. 마르코스 무용 아카데미의 교사인 마담 블랑, 아카데미를 둘러싼 이상한 징후를 파헤치려는 정신과 의사 클렘퍼러, 그리고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존재. 모습, 나이, 국적, 심지어 성별까지 다른 세 사람이 스윈튼의 기묘한 육체를 통해 구현됐다. 영화 크레딧에는 클렘퍼러 박사를 연기하는 배우를 러츠 에버스도르프라는 이름으로 올렸다.
<인어공주>(2004)는 엄마의 고향에서 자기와 똑 닮은 젊은 시절의 엄마를 만난다는 콘셉트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박흥식 감독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에 이어 전도연을 초대해 이 아름다운 가족영화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1999년 영화 <내 마음의 풍금>에서 강원도 산골의 17살 소녀를 연기한 바 있는 전도연은, 한여름 제주도의 햇볕에 까맣게 탄 얼굴 가득 사랑의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연순의 순수함을 능수능란하게 보여줬다. 그런 와중, 억척스럽기만한 엄마와 답답할 정도로 착해빠진 아빠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는 데에 염증이 나버린 나영의 매사 조심스러운 태도까지 동시에 표현하는 경지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