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3.1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한국영화가 태동한지 100년을 맞이한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 의미를 반영하듯 대법원에선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났고, 일본은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며 수출규제 압박을 펼쳤다. 이에 맞서 자발적 불매운동이 일어나며 한일관계는 역대 최악으로 치달았고, 남북미관계 역시 담보 상태에 빠졌다. 경찰과 연예인 유착의 버닝썬 사태가 연예계를 흔들었고, 셜리와 구하라의 자살이 악플에 대한 심각성을 경고했다. 박상기에 이어 조국이 역대 세 번째 비고시 출신 법무부 장관에 올랐지만, 정국이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결국 그 여파로 대학 입시제도 개편이 이어졌다. 장관은 사퇴했지만 여전히 공수처법은 표류 중이며, 갈라진 민심은 내년 총선을 조준하고 있다.
이런 어수선함과 달리 영화계에선 낭보가 잇달았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며, 골든 글로브에서도 최초로 외국어상과 감독상, 각본상에 후보로 올랐다. 김보라의 데뷔작 <벌새>는 세계 영화제 수상 40관왕을 달성했다. 2014년 천만 영화 4편이 나왔던 기록을 넘어, <극한직업>과 <어벤져스: 엔드게임>, <기생충>, <알라딘>에 이어 <겨울왕국 2>가 천만을 넘기며 역대 최다 천만 영화가 나온 해가 되었다. 아직 하반기 대미를 장식할 세 편의 국내영화(백두산, 시동,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남아있지만, 이쯤에서 2019년 한해 국내 영화음악들을 정리해본다. 기간은 2018년 12월 1일부터 2019년 12월 10일까지 개봉한 영화들을 대상으로 음원이나 CD로 공개된(싱글 제외) 국내 영화 사운드트랙에 한정했다.
작년과 비슷한 총 41편 정도의 한국 영화음악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일단 이들을 대상으로 5편을 추려 ‘2019년 한국 사운드트랙 리스트 5’를 뽑아보았다. 안타깝지만 사운드트랙이 나오지 않은 영화들은 과감히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 편이 이 리스트에 대한 형평성과 객관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영화음악 베스트가 아닌, 한국 사운드트랙 리스트다. 따라 시상식 후보에 올랐거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김준석의 <스윙키즈>나 모그의 <엑시트>, 김태성의 <사바하>와 <우상>, 조영욱과 사운드트랙킹스의 <말모이>나 <악인전>, 장영규의 <봉오동 전투> 등은 사운드트랙이 일반적으로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 포스트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밝혀둔다. 개인적으로도 아쉽게 생각한다. 리스트는 무순이다.
기생충
by 정재일
어떤 말이 필요할까. 2019년은 그야말로 <기생충>의 해였다. 프랑스 칸과 한국을 넘어 할리우드 시상식들마저 정조준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재기 발랄한 희비극은 현대 계급사회와 가족이란 부조리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내 전 세계인을 휘어잡았다.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들과 장르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에 이르기까지, 음악에 대한 무궁무진한 욕심과 천재적인 재능을 과시해 온 정재일은 ‘야매’ 바로크를 통해 상류층에 대한 동경과 허상을 반영하는 한편, 키치적이고 미니멀한 접근법으로 인간 본연에 자리 잡은 천박한 속성과 끝도 없는 욕망을 과감히 드러낸다. 상승과 하강을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내는 정재일의 음악은 보헤미안 스타일의 포크 사운드로 모험극의 활력과 판타지,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마저 담아냈던 <옥자>만큼이나 다양한 스펙트럼과 장르적 색채감을 탁월하게 뽐냈다. 두 천재가 만들어낸 화학결합이 얼마나 큰 상승효과를 가져올지 궁금하다면 <기생충>의 사운드트랙이 그 모범답안이 될 것이다.
언더독
by 이지수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은 역대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작품성과 이지수가 맡은 음악도 호평 일색이었다. 그 제작진(명필름과 오성윤, 이춘백 감독)이 그대로 뭉쳐 유기견들의 사연과 한국적 상황을 대입시킨 오리지널 각본으로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언더독>을 완성했다. 이번엔 비록 상업적 실패를 맛봤지만, 비평적 상찬이 이어졌고 이지수는 여전히 놀라운 퀄리티의 음악을 들려준다. 전작의 ‘바람의 멜로디’에 이어 <언더독>의 메인 테마가 되는 ‘꿈꾸는 그곳’은 앨범 전체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되며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난 유기견들의 스펙터클하고 긴 여정을 따스하게 보듬어 안는다. 디즈니나 지브리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인상적인 선율과 미키마우징 효과는 체코의 필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강수호, 이태욱, 최인성 등 정상급 세션맨들과 만나 감동적이고 역동적으로 다가온다. <올드보이>와 <건축학개론>, <카트> 등에서 섬세한 감성과 뛰어난 멜로디 감각을 선사한 바 있는 이지수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코어로, 한국형 애니메이션 음악의 기준과 비전을 제시해주었다.
PMC: 더 벙커
by 이준오
게임을 보는 듯한 POV 화면에, 영어가 반 이상인 대사, 동족상잔의 비극 대신 전쟁도 비즈니스라 생각하는 글로벌 군사기업 소재를 갖고 온 김병우 감독의 <PMC: 더 벙커>는 여태까지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들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이런 변별성 때문에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러닝타임 124분 중 거의 100분에 가깝게 흐르는 ‘캐스커’ 이준오의 박진감 넘치는 일렉트릭 사운드는 잊히기엔 퍽 아쉬운 결과물이다(게다가 처음 공개되는 그의 사운드트랙이기도 하고). 실제 레코딩된 현악기 노이즈들과 모듈라시스템을 기반으로 수년간 수집해온 여러 소리들로 세밀하게 직조한 서늘한 비트감의 공감각적인 스코어는 밀폐되고 감추어 온 벙커의 은밀하고도 숨 막히는 긴장감을 생생히 전달한다. 반복과 점층으로 스릴을 강화하고, 왜곡과 변조를 통해 액션을 포장하는 솜씨는 브래드 피델의 최전성기 신디 사운드를 듣는 듯하다. 여기에 후반 하이라이트에선 국내 정상의 스트링 편곡자이자 영화음악가인 박인영이 참여해 웅장하고 감동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이준오의 소리들과 조화시켜 짜릿한 전율을 선사한다.
윤희에게
by 김해원 & 임주연
타국의, 그것도 동성의 첫사랑에게서 오랜만에 편지를 받고, 딸과 함께 설경의 오타루로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담은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는 잔혹하지만 이젠 얼어붙은 그 고통을 홀로 견뎌온 삶의 무게감과 상실의 시대를 찬찬히 복기해내는 영화다. 이 담담하고도 온기가 느껴지는 멜로드라마이자 성장담을 완성시키는 건 김해원과 임주연이 맡은 정갈하면서도 소박한 음악의 힘이다. 피아노와 기타,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로 포근히 위로하고 격려하는 여정에는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과 지나가버린 시간의 아쉬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씁쓸함이 한데 뭉쳐 관객들 가슴 끝을 아릿하게 저민다. 편지와 무대가 되는 눈 덮인 오타루 풍광 덕분에 언뜻 <러브레터>가 떠오르는데,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건반 솔로와 스트링이 메인이 되는 접근법과 단출한 음악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깊은 여운을 드리운다는 면에서 레미디오스를 연상케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편지와 음악은 수줍지만 격정적인 그들 내면을 대변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상처를 치유한다. <윤희에게>는 그런 용기를 주는 올해의 영화음악이다.
벌새 & 생일
by 마티아 스턴이샤 & 이재진
1994년 10월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했다. 이 비극적이고 가슴 아픈 사건들을 배경으로 각각 만들어진 김보라 감독의 <벌새>와 이종언 감독의 <생일>은 떠나간 이들과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시적인 비망록이다. 물론 접근법과 스타일, 주제는 전혀 다르지만 두 작품 다 음악이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강력하고 잔향은 매우 짙고도 길게 남는다는 점에서 마지막 리스트로 동시에 선정해봤다. <벌새>의 마티아 스턴이샤는 클래식 작곡가라는 이력과 달리 전자음악으로 소녀의 삶 속에 스미는 고독과 불안, 사랑과 설렘의 다채로운 순간들을 반짝이면서도 몽환적으로 그려내고 있고, <생일>의 이재진은 전작들인 <박하사탕>과 <파이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호우시절> 등에서 들려줬던 섬세한 정서의 따뜻하고 휴머니즘 가득한 어쿠스틱의 선율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기억하려 한다. 이들의 음악은 괴롭고 슬픈 기억을 외면하거나 변형하지 않는다. 공감하고 교감하며 남은 자들을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킨다. 그것이 자꾸 이 영화음악들이 떠오르는 이유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