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케네디”
본래 IBT는 대니얼 토빈이 회장을 맡던 1907년부터 45년 동안 마피아로 대표되는 조직범죄 집단과 관련된 광범위한 부패에 연루되어 있었다. 당시 부패한 일부 지부들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뇌물공여, 횡령, 강탈, 공갈 등의 부정한 방법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IBT 내의 부정과 부패는 호파가 1957년 대니얼 토빈의 후임이었던 데이브 벡을 몰아내고 IBT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당선된 1950년대에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이 일은 급기야 법무부와 상원 소위원회의 조사를 불러왔다. 그중 일부는 호파가 자초한 일이었다. 호파는 1957년 IBT 회장 선거를 앞두고 자신을 지지하는 대의원 수를 늘리기 위해 1956년 뉴욕 조직폭력배인 조니 디오를 만나 15개의 유령 지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 유령 지부를 정식 지부로 만들고자 하는 호파의 행동은 반대파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것은 결국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의회는 상원의원 존 매클레런을 의장으로 하는 상원 노동 및 경영에서의 부적절한 행위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매클레런은 특별위원회의 조사관으로 로버트 케네디를 임명했다.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로버트 케네디가 자주 언급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아이리시맨>에서 호파는 로버트 케네디의 형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뉴스를 보며 “망할, 케네디”라고 외친다. 하지만 러셀(조 페시)을 비롯한 이탈리아계 미국인 마피아는 호파의 해결사였던 프랭크(로버트 드니로)에게 자신들이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음을 밝힌다. 이 시기의 미국 마피아들은 쿠바에서 1959년 12월 카스트로의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기 전 자신들이 아바나에 투자해두었던 카지노와 호텔을 비롯한 각종 경제적 이권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에서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미적인 자본주의 정권을 다시 세울 것을 기대했다.
비록 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기 중에 계획된 일이지만, 실제로 케네디 대통령은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중앙정보국(CIA) 주도로 미국에 있는 쿠바인 망명자 2천여명을 훈련시켜 이들을 미군의 지원하에 극비리에 쿠바에 상륙시킬 작전 계획을 승인했다. 이와 관련해 영화에서는 프랭크가 러셀의 지시로 볼티모어에서 트럭을 몰고 플로리다주 잭슨빌 외곽에 있는 개 경주장으로 가서 ‘거인 귀 헌트’를 만나 자신이 싣고 온 물건을 전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기관총이었다. 뒤이어 영화 속 TV에서는 ‘피그스만 침공’에 관한 뉴스가 이어진다. 1961년 4월17일 1400여명의 쿠바인 망명자들을 동원한 카스트로 정권 붕괴를 위한 상륙 작전인 피그스만 침공은 카스트로 군대의 반격으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영화는 마피아들이 프랭크를 이용해 이 침공 작전을 은밀히 지원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친형의 대통령 당선과 더불어 법무장관이 된 로버트 케네디는 조직범죄에 철퇴를 가하기로 결심한다. 특히 호파를 타깃으로 검사와 수사관들로 구성된 이른바 ‘호파 잡기’(Get Hoffa) 수사반을 꾸렸다. 결국 호파는 1964년 테네시주 채터누가에서 배심원에게 뇌물을 주려 했다는 혐의로 8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트럭기사노조의 연금 기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다는 혐의의 사기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호파가 두 번째 유죄판결을 받은 후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에서 물러나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호파는 이 판결에 대해 연방 대법원에 항소했지만 기각된 후 1967년 3월부터 펜실베이니아주 루이스버그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되기 전 IBT의 의장 대행으로 자신을 지원해주리라 믿었던 프랭크 피츠시먼스를 임명했다. 하지만 <아이리시맨>에서 보듯 호파는 오히려 그로부터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호파는 앞서 두건의 유죄선고로 13년을 복역해야 했지만 그가 영화에서 50만달러를 주었다고 호언한 닉슨 대통령이 감형, 5년 뒤인 1971년 12월에 석방되었다. IBT는 196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닉슨을, 그다음 대선에서는 민주당을, 그다음인 1972년 대선에서는 다시 닉슨을 지지했다. 호파는 자신의 감형 조건이 1980년 3월까지 노동조합 활동 관여 금지였기 때문에 이를 풀기 위해 닉슨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소송까지 제기했으나 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