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니

지난 글에서 나는 아도르노의 아주 삐딱한 문장 하나를 (『한 줌의 도덕』에서) 인용했었다. 아름다움은 대체로 거짓말이기 십상이라는 그 문장의 경고에 따라 이미 몇 편의 페미니즘 영화 속 ‘아름다운’ 공동체들을 의심하며 되돌아본 바 있으니, 내친 김에 그의 문장을 한 번 더 인용해 볼까 한다.

“부엌 종업원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지식인이 있다”.(아도르노, 『한 줌의 도덕』)

386세대에 속하는 나는 저 문장을 통해 아도르노가 경계하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경험적으로 이해한다. (여성) 민중에 대한 (남성) 지식인의 사랑,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당위의 영향을 받을 경우(민중이 세상의 주인이다! 지식인은 그들의 동지여야 한다! 등등) 그 마음은 자주 거짓말을 한다. 계급 차에서 발생한 동정과 연민과 죄책감, 노동하는 계급(여성)의 건강함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 그리고 그런 감정들 이면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지적 우월감과 ‘구원자/남성’ 콤플렉스……. (남성) 지식인은 그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대체로 허위이거나 착각일 때가 많은데, 아도르노가 ‘사랑하는’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이란 표현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가 남성 지식인들더러 하층 계급에 속하는 여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로(그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저 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정변증법』의 저자답게 항상 회의하고 의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저 문장으로 ‘사랑’이란 감정의 ‘다른 효과’에 대해 경고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른바 ‘사랑의 연대’ 혹은 ‘부르주아 휴머니즘’이라 불리는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그 내포가 너무 넓어서 실상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사랑’은 많은 균열과 차별들을 봉합해 버리고서는, 우리로 하여금 마치 어떤 바람직한 ‘연대’가 이미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라도 한(할) 것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잦다. 그러나 조금만 삐딱하게 살펴보면 그런 연대에는 빈틈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잇지와 루스가 만든 사랑의 연대에 버밍햄에서 개처럼 죽어간 원작 소설 속 빅조지의 아들 이야기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안토니아와 타자들이 연대해 만든 공동체에는 유색 인종이 없고(<안토니아스 라인>), 베인스와 에이더가 새로 꾸린 런던의 집은 부유한데 그들을 누가 부양하는지는 알기 힘들다(<피아노>). 사랑은 분명 사람들을 연대하게 만들지만, 그 연대는 항상 어떤 누락분을 남기는 것도 같다.

1971년, 멕시코

평자나 관객들이 ‘숭고한 가족애’, ‘버림받은 여성들의 연대’, ‘헌신적인 사랑의 위대함’ 같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영화 <로마> 이야기를 하려다가 서두가 좀 길어졌다. 아도르노의 문장을 염두에 둔 채, 이제 영화 얘기를 해보자. 무대는 1971년경의 멕시코, 중상층 계급(주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백인들로 이루어진)이 모여 사는 멕시코시티의 부촌 ‘로마’다. 당시의 멕시코를 가급적 온전히 재현하기 위해 쿠아론 감독이 공들여 고안한 영화적 장치들이 우선 눈에 띈다.

1) 복잡한 음향 ; 프레임 내 상황과 유관하거나 무관한 소음들이 끊임없이 인물들의 감정, 멕시코의 정치 상황 등을 ‘청각적으로’ 감각하게 한다. 거리의 소음, 총소리, 군악대 행진 소리, 정치 선전 중인 확성기 소리, 멕시코시티 번화가의 호객 소리 등등. 미메시스적 음향과 디에게시스적 음향의 경계는 사라지게 되고, 덕분에 관객은 1971년의 혼란스러운 도시 멕시코시티에 있는 듯한 경험을 우선 귀를 통해 하게 된다.

2) 완벽한 미장센의 흑백 화면 ; 카메라는 주로 주인공 클레오를 전경에 두고 소설의 1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전경 뒤, 아웃포커싱 된 중경과 후경에서도 영화의 아주 중요한 정보들이 계속 등장한다. 카메라는 느리게 수평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고(롱테이크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특별히 후반부 바다에서의 구출 장면), 따라서 관객들은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요소들을 눈여겨봐야 한다. 가령 아이를 사산한 클레오가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전경 뒤로 강보에 쌓여 사체 처리되는 태아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다.

3) 시각적 은유와 상징들 ; (여주인 소피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역할을 현지 주민들에게 연기하게 함으로써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리얼리티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곳곳에 시각적 은유와 상징들이 즐비하다. 특히 권위주의적인 정권의 폭압성을 암시하는 총과 칼, 남성성을 상징하는 부피 큰 금속 광택의 자동차, 생생하게 삽입된 ‘성일 축제 대학살’(1971.6.10.) 장면,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와 클레오의 숙소 벽에 걸린 새장 속 비둘기, 땅 장면에서 시작해서 하늘 장면으로 끝나는 수미 쌍관의 앵글 구성 등등.

요컨대 <로마>는 ‘영화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구현된 1971년의 멕시코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그리고 거기 클레오와 소피아가 산다. 여주인과 하녀, 그러나 공히 남성에게 버림받은 두 여성…….

사랑해 클레오

원주민 출신 하녀 클레오는 자신을 임신시킨 연인 페르민에게 버림받았고, 백인 여주인 소피아는 남편 안토니오에게 버림받았다. 둘에게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시기도 동일하다. 클레오가 자신이 임신했고 페르민이 떠나버렸음을 소피아에게 알리던 순간, 소피아의 결혼 생활도 남편의 이혼 통보와 함께 최종적으로 파탄난다. 그 둘이 상처를 극복하고자 네 아이들과 가족 여행을 떠났다가, 휴양지 바닷가에서 사고를 겪은 후 더더욱 단단해진 가족애로 뭉쳐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가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하녀와 여주인이었단 사실만으로 (흔한 영화적 클리셰를 따라) 소피아의 가족들과 클레오 사이에 어떤 착취나 음모 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상상해서는 곤란하다. 소피아의 가족들이 클레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그것은 “사랑해”니까……. 클레오가 임신 사실을 알리며 “저를 해고하실 거죠?”라고 물었을 때도, 툭스판에서 파도에 휩쓸릴 뻔한 파코를 구해주었을 때도, 병원에서 죽은 아이를 출산했을 때도, 소피아의 가족이 그녀에게 하는 말은 “사랑해 클레오, 너는 우리 가족이야”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말에 거짓은 없다.

그랬으니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가족애’나 ‘사랑’, ‘헌신’, ‘감사’ 같은 말들로 관람 후의 감동을 표현했던 것은 자연스럽다. 분명히 소피아의 가족들은 클레오를 사랑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나 나로서는 그 사랑이 ‘모순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영화가 (기꺼이 가족 이데올로기의 전파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다른 가족 영화들을 뛰어넘는 지점이 바로 거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장면이 있다. 소피아의 어머니인 테레사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페르민의 총구 앞에서 양수가 터져버린) 클레오를 데리고 병원에 간다. 접수대의 간호사가 묻는다.

간호사 : 정식 이름이 뭐죠?

테레사 : 클레오데가리아 구티에레스.

간호사 : 중간 이름은요?

테레사 : 모르겠어요…….

간호사 : 몇 살이요?

테레사 : 몰라요…….

간호사 : 생년월일은요?

테레사 : …….

간호사 : 환자랑 무슨 관계죠?

테레사 : 고용인이요.

간호사 : 환자 가족 분은 여기 없나요?

일원의 정확한 이름과 나이를 모르는 가족이 있을 수는 없다. 그것도 사랑한다면……. 따라서 간호사의 마지막 대사는 그들의 ‘가족애’가 모순적이란 사실을 좀 집요하게 드러내고야 마는데, 저 상황에서 “환자 가족 분은 여기 없나요?”란 말에 대한 답은 어쩔 수 없이 “예”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테레사도 소피아도 아이들도 분명 클레오를 가족‘처럼’ 사랑했다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렇듯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은 가난한 원주민 소녀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비슷하게 모순적인 장면들은 더 있다. 가령 (안토니오를 포함해) 여섯 가족이 화목하게 TV를 보고 있던 장면에서, 아이들은 마치 그 가족의 일원이기라도 한 것처럼 클레오와 나란히 앉아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의 평화는 소피아의 “클레오 애들 아빠한테 차 좀 갖다 줄래?”라는 대사와 함께 깨진다. 방금까지 가족의 일원이었던 클레오는 순식간에 하녀였음이 재확인된다. 사고를 겪고 돌아온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페페와 소피가 할머니 테레사에게 안겨 “클레오가 우릴 구해 줬어요”라며 모험담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클레오에게 안겨 “클레오 사랑해”를 연발했던 참이다. 그러나 그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토뇨가 말한다. “클레오, 나 스무디 먹고 싶어”

사실 이런 모순적인 장면들은 영화 곳곳에서 연출되는데, 그럴 때 쿠아론 감독은 마치 앞서 인용한 문장을 쓸 때의 아도르노 같다. “하녀를 사랑하려는 부르주아 가족이 있다”라는 문장의 삐딱한 의미(‘그건 사랑이 아닐걸!’ 혹은 ‘사랑이란 고작 그런 것일 걸!’)를 영화적으로 예증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사랑해!”란 말 다음에 어김없이 “이제, 일해!”란 말로 해석될 만한 장면들을 배치해 놓는다. 아니 엄밀히 말해 영화 전체가 그렇게 모순적인 장면들의 체계로 읽히기도 하는데, 복도(차고이기도 하다)를 청소하는 클레오의 노동에서 시작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음료를 만들고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가는 클레오의 뒷모습으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들이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끊임없이 일하는 클레오의 동선이기 때문이다. 클레오는 아침부터 밤까지 집안의 모든 일을 한다. 사랑받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하녀인 원주민 소녀, 그녀가 클레오다.(아델라를 빼먹을 뻔 했다. 스페인어를 못하는 이 원주민 소녀는 아예 주인집 내부에 출입할 자격도 얻지 못한다)

“리보를 위하여”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헌사다. “리보를 위하여”. 리보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소년시절 그를 돌봐주었던 실제 하녀의 이름이라고 한다. 클레오는 그녀를 모델로 한 인물인데, 이 자전적인 영화를 쿠아론 감독은 그녀에게 바쳤다(시상식에도 그녀와 동석했다고 한다). 감동적인 일화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 영화 속에서 클레오를 향한 가족들의 사랑을 모순적이지 않게, 완벽한 가족애의 모델로 그렸다면 나는 감동할 수 없었을 듯하다. 허울 좋은 사랑의 연대란 실은 값싼 휴머니즘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오래 전 아도르노에게 배웠으니까…….

자신이 고작 사랑이나 휴머니즘의 한계 내에서만 그녀를 사랑했고 가족으로 대했음을 고백하는 방식으로 쿠아론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었고, 그 영화를 그녀에게 바쳤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포스터가 된) 바로 그 바닷가의 포옹 장면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클레오가 가족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뒤편으로 (마치 그들이 남성 없이 겪어나가야 할 1970년대 멕시코의 험한 풍파라도 되는 것처럼)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방금 사력을 다해 아이들을 구한 클레오가, 사산한 자신의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고백하며 앉아 울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소피아와 아이들이 그녀를 안거나 그녀에게 안겨 있다. 마치 이 가족의 중심엔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는 듯이…….

가족의 중심이 된 클레오……. 주인네 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살린 사람은 하녀 클레오였고, 주인과 노예는 그런 식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이제 생각해보니, ‘가족애’나 ‘사랑’보다는 헤겔의 그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이 영화를 보는 더 나은 독법일지도 모르겠다.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