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생충>

주인과 노예

좀 따분한 시작이 되겠지만, 지난 <로마>에 대한 글 말미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란 말을 뱉고 말았으니 그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주인과 노예’는 헤겔의 정신 현상학 1(임석진 역, 한길사. 심각하게 저자의 편집증을 의심해 보게 하는 이 책을 나는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4장 ‘자기확신의 진리’에서, 스토아학파와 회의주의를 논할 때 등장한다. (자신 없지만) 내 방식으로 성기게 요약하면 이렇다.

(‘자기의식’들 간에) 주인의 자리를 두고 목숨을 건 인정 투쟁(‘자유나 목숨이냐’)이 일어난다.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긴 자는 (목숨을 걸었으나 이겼으므로 살아남아) 주인으로 인정받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물러선 자는 (목숨을 걸지 않았으므로 살아남아) 노예로서 예속된다. 목숨을 걸지 못한 그들은 목숨을 걸었던 인정 투쟁의 승자를 주인으로서 ‘인정’한다. 그때부터 노예는 사물의 생산과 보존에 관계하는 노동을 해야 하고, 주인은 그렇게 얻어진 사물을 향유(탕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인과 노예 관계는 (필연적으로) 역전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선 ‘동등한 자기의식’에 미치지 못하는 노예에게서 주어지는 인정은 그다지 값어치가 없어서 주인에게 주인됨의 자부심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전쟁광 영화) <람보> 시리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관객에게 인정받는다고 해서 주인된 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될 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가령 나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는 관객에게 ‘인정’받고 싶다).

게다가 노동이 있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사물과 직접 관계를 맺지만 주인은 이제 노예의 노동을 매개로 해서만 사물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말하자면 주인이 되레 비자립적이게 되는 셈이다.

<로마>

1971년 로마에서

영화 <로마> 속, 1971년경 멕시코시티의 부촌 로마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듯싶다. 클레오는 하녀였지만, 그녀의 노동이 소피아네 여섯 가족을 부양했다. 그녀 없이는 넥타이 하나 찾을 수 없는 (안토니오가 “내 갈색 넥타이는 어디 있는 거야?”라고 묻는다. 소피아는 “클레오에게 물어 볼게요”라고 답한다) 이들이 소피아의 가족이다. 고작 넥타이만이 아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아델라와 클레오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식탁도 그들의 손으로 치워지고, 잠자리 정리도 아이들 등하교도 개똥청소도 모두 그들 몫이다.

내겐 영화 전체를 통틀어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물론 바닷가에서의 구출 장면이다) 바로 도입부의 옥상 장면이었는데, 쿠아론 감독이 온 동네 저택들의 옥상에 가득 널어놓은 빨래와 그것을 널고 있는 많은 하녀들의 모습을 미장센의 아름다움만을 위해 그토록 오래 보여주었다고는 믿기 힘들다. 백인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노동에 기생하는 기식자(parasite ; 기식자, 기생충, 식객)들이다.

게다가 클레오는 목숨을 건 투쟁에서 승리하기조차 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소피를 구했으니 이제 ‘인정’은 클레오의 몫이다. 영화 후반부의 인상적인 바닷가 포옹 장면, 가족들의 중심에 목숨을 걸고 소피를 구한 클레오가 있고, 소피아와 그녀의 아이들이 모두 그녀 쪽으로 의지해 있다. 주인과 노예의 자리는 그렇게 역전되었다.

<설국열차>

혁명과 폭주기관차

거꾸로 선 헤겔을 바로 세운 사상가라는 별명답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급진화한 것은 마르크스다. 그는 세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주인과 노예의 단속적 자리바꿈이 역사의 동력이었단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그 피비린내 나는 자리바꿈의 역사를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땅의 마지막 노예, 그들이 일으킬 혁명을 통해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은 완전히 실현됨으로써 정지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렇게 더 이상 노예의 인정이 필요 없는 주인들만 사는 (왜냐하면 주인인 그들에게 노동이란 위임받은 ‘노역’이 아니라 인간의 유적 본질을 실현하는 자립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약속했다.

그러나 다 말짱 헛말이었다. 설사 마르크스의 이론 속 사회주의와 현실의 사회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예견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마르크스주의 역사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홉스봄은 20세기에 일어난 거의 대부분의 혁명이 양차대전의 부산물에 불과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봉인 해제된 사회주의의 모습은 초라했다. 그리고 거기에도 주인과 노예는 있었다.

그렇게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에서 기이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실험되고 있던 사이, (대공황 같은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지만) 폭주기관차처럼 잘 달리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마르크스가 필망을 예고했던 자본주의 시스템(특히 양차대전 후의 신자유주의)이었다. 그런데 각종의 통치 테크놀로지들을 하나씩 하나씩 개발하고 수리해서 잘도 장착한 이 폭주기관차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덕분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와 차이가 있었다면, 이 기관차는 변증법을 종결시키려고도 만인이 주인이 된 세상을 향해 달리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에서 (다소 도식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 종착지 모르는 폭주기관차, 신자유주의였다.

<설국열차>

반란도 좋지

꼬리 칸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실패하면 기차는 잘 달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예들의 반란이 진압될 경우, 혁명은 오히려 적절한 인구 조절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절대 평등의 불가능성을 확인하게 할 것이고, 또 반란 예상 계급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하는 데에도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영화 속 꼬리 칸의 성자 길리엄과 머리 칸의 지배자 윌포드가 공조관계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좀 뻔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그러다 얼마 지나면 꼬리 칸에서 혁명이 다시 일어난다. 이번 혁명은 성공한다 치자. 그러나 그렇다 해도 기차는 (더) 잘 달린다. 혁명을 통해 맨 앞 칸의 주인이 바뀌어도 엔진은 멈추지 않을 테니까……. 늙은 기관장(노쇠한 숲의 왕)의 자리에 젊고 용맹한 하층계급출신 기관장이 앉는다면, 오히려 기차는 새로운 왕을 맞이한 숲처럼 건강해질 테니까……(그래서 윌포드가, 마치 왕위를 넘겨주려 기다렸다는 듯 커티스를 반긴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역시 좀 뻔한 설정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 기차에서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도 윌포드(에드 해리스)도 아니다. 맨 앞 칸에 거대한 엔진을 단 기차가 주인이다. 그리고 그 주인에 반하는 행위도 그 주인에 복종하는 행위도 엔진을 멈추지는 못한다. 주인과 노예의 자리바꿈을 정지시키기보다 아예 전진의 동력으로 내재화시켜버린(그래서 저항이 곧 체제 유지에 협조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시스템을 정지시킬 수는 없다. 그 바깥으로 뛰어내리는 방법 밖에…….

그래서 <설국열차>의 결말부, 봉준호 감독이 선택한 것이 이른바 ‘탈주’였다는 점도 이해가 간다. 커티스와 남궁민수(송강호)의 희생에 힘입어 동양 소녀(고아성) 한 명과 흑인 소년 한 명이 기차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아직 지구는 너무 춥지만, 양지에서 눈은 녹기 시작하고 북극곰은 살아 있다. 세계는 그렇게 살아갈 만하고 다시 시작할 만하다. 참 아름다운 영화적 결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염세주의자 크룩핑거(<안토니아스 라인>)의 사도, 그런 결말은 전혀 믿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기차 밖은 존재하지조차 않을 테니, 다른 변증법이 필요하다.

<기생충>

기식 경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주인(hôte)과 기식자(parasite)’의 변증법으로 변형시킨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다. 그는 ‘La Parasite’(기생충, 식객, 기식자, 걸식하는 어릿광대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라는 책을 썼고, 그 제목은 (다들 어찌나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는지 이제 더 할 이야기도 없을 것 같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영어 제목과 같다.

나는 봉준호 감독이 저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없고, 또 짧은 지면에 그 책의 논지를 요약할 게재도 아니다. 다만 동익(이선균)네 가족이 이사 오기 전, 그 집에는 문광(이정은)과 근세(박명훈)가 먼저 살고 있었다는 점 정도는 지적하고 싶다. 물론 주인으로서 살지는 못하고, 훔쳐 먹거나 좀먹으면서, 말하자면 쥐처럼 (이 영화에서 모든 인물들은 동익네 가족을 제외하고는 다 쥐처럼 그려지지만, 특히 다송의 케이크 트라우마 장면에서 근세는 어찌나 쥐처럼 그려지던지……, 어둠속의 그 눈과 사족보행!) 기식하면서 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볼 때 <기생충>의 서사는 간단히 1차 기식자와 2차 기식자의 갈등으로 인해 행복한 기식의 시절이 처절하게 끝나는 이야기로 요약된다. 이 사회에서 (가난 냄새가 나고 자주 선을 넘는) 기식은 죄악이니까…….

그러나 비약을 무릅쓰고 말해, 그들의 기식이 성공적이었을 때(집이 비었거나, 새로운 기식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몰랐을 때) 그 집에는 지금 이 사회와는 다른 경제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세르가 말하는 이른바 ‘기식 경제’가 그것이다. 기식자는 노동하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존재를 알거나 모르는) 주인은 그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은(못한) 채 부의 일부를 무상으로 증여한다. 그러니까 이 경제에서는 ‘눈에는 눈만큼’, ‘이에는 이만큼’의 (자본주의에 고유한) 등가교환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일하지 않는 자도 먹고 사는 것이 기식의 경제다. 그런 의미에서 동익과 연교(조여정)는 근세에게 ‘리스펙!’이란 소리를 들을 만하고, 기택에게 ‘좋은 분’이란 소리도 들을 만하다. (사정을 알았건 몰랐건) 그들은 기식의 경제에서 주인의 자리에 있었고, 주인으로서 기식자들에게 (어리석음과 허영이 원인이긴 했지만) 환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기생충>

태초에 증여와 기식이 있었다

문제는 ‘주인’(hôte)이라는 말이 다의성이다. (세르가 자주 이 단어를 가지고 말장난 하듯이) 프랑스어 ‘hôte’에는 ‘주인, 숙주’라는 의미와 ‘손님, 숙박객’이라는 의미가 다 들어 있다. 즉 주인이면서 식객인 자, 숙주이면서 기생충인 자가 ‘hôte’다. 어원 운운하며 말장난이 길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 바이니, 간단하게 이런 질문을 하나 던져 봐도 좋겠다. 연교와 동익은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화려한 저택을 구매했을까?

세르가 기식의 가장 전형적인 모델로 라퐁텐 우화 중 하나인 「도시 쥐와 시골 쥐」를 인용한 사실은 흥미로운데, 도시 쥐가 기식하는 집의 주인은 세금징수업자였다. 동익이 악랄한 갈취자였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누군가의 노동력에서 발생한 생산물로부터 잉여 이득을 취하지 않고서는 그토록 크게 치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주인들인 그들 역시 (로마의 부르주아들처럼) 기식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지상에 기식자가 아닌 (무)생명체가 있을까? 혹자는 대지에서 노동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생산자라고 말하지만, 농사란 식물에 기생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고 식물이야말로 아무런 대가 없이 증여하는 주인이라고 하자니, 식물은 땅에 기생하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땅의 영양은 어디서 오나? 비는 왜 내리나? 최종적으로 태양계 내에서 기식하지 않는 존재(자)는 없다. 오로지 태양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식하지 않는 주인이다(그마저 태양계 내에서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태초에 있었던 것은 교환의 경제가 아니었다. 태초에 (태양의) 증여와 기식이 있었다. 그것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오디세우스도 칼리프소의 섬에서 오래 기식했고, 그의 이야기를 노래로 남긴 호머도 기식자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미켈란젤로도, 루소도, 오스카 와일드도, 이상도 기식자였다(떠오르는 대로 예술가들의 이름을 기식자들의 명단처럼 나열해서 좀 그렇지만, 예술은 어쩌면 통째로 기식의 산물이 아닐까?). 뭐, 나도…….

<기생충>

선을 넘지 마

태양으로부터 시작해 증여하고 기식하는 이 경제의 흐름은 언제 중단되는 것일까? 후원자들이 시장 속으로 사라지던 시절(증여보다는 교환이 남는 장사니까)?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신이 율법을 내려 죄와 벌의 등가교환을 엄포하던(뿌린 만큼 거두리라) 시절? 아니면 함무라비 법전이 손해와 보상의 등가 교환(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정언명령으로 만들어 놓던 시절? 선사 시대의 모든 것들이 그런 것처럼 그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법과 문명이 아주 오래 전부터 기식의 경제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토록 오래 전부터 기식을 금하는 여러 장치들을 만들어 왔으니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도 될 듯하다. 교환의 경제는 항상 증여의 경제를 압박하고 제거하는 형태로 나란히 존재해왔다.

그렇다면 이런 말도 가능하다. 교환의 경제가 지금처럼 막강한 시스템(다시 그 폭주기관차를 상기해 보자)을 갖출 수 있기 위해서는 기식의 경제가 필요했다. 그것이 자주 선을 넘어(영화 속에서 동익네 가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이것이다) 쥐처럼 교환 경제의 시스템을 어지럽힐 때마다 사회는 시스템을 정비하고 보수하고 강화한다. 기식자의 등장(혹은 발견, 발명, 생산), 시스템의 강화(규율, 계획, 통계, 정책, 예방, 수용, 교육), 다시 기식자의 등장, 시스템의 강화, 이 계속되는 순환 속에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통치 테크놀러지가 등장했다면 기식자는 시스템에 대해 내재적이다.

물론 매 시기 발견되고 생산되는 기식자들의 명칭은 바뀔 수 있다. 광인, 부랑아, 넝마주이, 노숙자, 백수……(나는 이제 왜 박정희가 그토록 쥐들을 싫어했는지 이해한다. 눈도 못 뜬 새끼 쥐들의 꼬리라도 학교에 들고 가면 푼돈을 쥐어 주던 시절이 있었다. 시스템과 효율에 미친 강박증자는 기식을 병적으로 참지 못한다). 그러나 그 명칭이 어떻게 바뀌든 기식은 시스템에 대해 구성적이어서, 기식 없이는 시스템도 없다.

잘 살아요 기택씨

<기생충>의 결말은 기식자의 기생충화다. 이제 다국적 자본이 화목하게 지배하고 있는 그 집(아들 기우가 멀리서 바라 본 거실의 실루엣으로 미루어 볼 때, 새로운 집주인은 외국인 가족이다) 지하실에서 기택(송강호)은 영영 빠져 나올 수 없다. 교환 경제의 수호자 형법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오는 순간 기택은 살인자다. 아들 기우(최우식)는 희망에 찬 편지를 쓰지만 편지를 쓰는 곳은 반지하 골방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시대는 유서 깊은 기식자들의 역사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위협적인 시대임에 틀림없다. ‘백수’(하얀 손)라 쓰고 ‘한심한 건달’이라고 읽는 시대, ‘노숙자’(길에서 잠자는 사람)라 쓰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주정뱅이들’이라고 읽는 시대, ‘예술가’(기예와 학술에 종사하는 사람, 즉 탐욕스런 생산보다는 아름다운 소모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라 쓰고 ‘폼만 잡는 허황된 몽상가들’이라고 읽는 시대가 우리 시대란 걸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니 차라리 그 지하에서 (무엇이든 야금야금 갉아 먹으면서) 부디 편안하시라……. 기생충, 도시 쥐, 우리의 기택씨! 이제 시대는 변해서 기식자가 상부구조를 결정하지는 못하겠지만, 항상 ‘저 아래’에 있다는 잠재의식처럼 건재하시라!


저자 |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후르비네크의 혀》 등과 에세이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2008),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