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거 스플래쉬> / <헤일, 시저!> / <닥터 스트레인지>

올해 한국에 개봉한 영화 <비거 스플래쉬>, <헤일, 시저!>, <닥터 스트레인지> 속 전혀 다른 모습의 캐릭터들. 놀랍게도 이 세 인물을 모두 단 한 사람, 틸다 스윈튼이 연기했다. 180cm의 큰 키와 생경한 외모의 스윈튼은 영국의 시네아스트 데릭 저먼의 <카라바지오>(1986)에 출연한 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오며 지구상에서 가장 유별난 이미지를 자랑하는 배우로서 추앙받고 있다. 작품마다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해온 틸다 스윈튼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유독 번쩍이는 인물 10명을 골라봤다.


올란도
<올란도>

데릭 저먼과 오랫동안 작업했지만, 틸다 스윈튼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은 샐리 포터 감독의 <올란도>(1992)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귀족 소년 올란도(틸다 스윈튼)의 미모에 반해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말라고 명하고, 올란도는 400년 동안 남성과 여성 사이를 오가는 인간이 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틸다 스윈튼 특유의 중성적인 외모에 기대어 원작의 독특한 캐릭터 설정을 확실하게 계승했다. 남성과 여성 역할을 동시에 맡는 것뿐만 아니라, 16세기부터 1992년까지의 시대의 변화까지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오톨라인 모렐
<비트겐슈타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일대기를 그린 <비트겐슈타인>(1993)은 실존인물의 역사를 다루는 영화들과는 전혀 다르다. 서사의 흐름은 찾아볼 수 없고, 지극히 과장된 모습의 인물들은 연극 속 배우처럼 건조하게 연기에 임한다. 스윈튼이 연기한 오톨라인 모렐은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인 버트란트 러셀의 연인이었다. 귀족이지만 특권 계급의 오만과 편협을 경멸했고, 인습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녀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파격적인 의상과 분장으로 구현됐다. <비트겐슈타인>은 스윈튼을 배우의 세계로 이끈 데릭 저먼과 함께 한 마지막 작품이다.


가브리엘
<콘스탄틴>

1994년 데릭 저먼이 세상을 떠난 이후, 스윈튼은 한동안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하지만 2005년작 <콘스탄틴>에서 '반 인간 - 반 천사'인 가브리엘을 연기한 이후부터 유별난 외모의 캐릭터들을 도맡기 시작했다. <콘스탄틴>의 주연은 키아누 리브스와 레이첼 와이즈지만, 후반부의 맹활약만으로도 관객의 뇌리를 사로잡은 건 틸다 스윈튼이었다. 가브리엘이 시커먼 날개를 활짝 펼치는 장면 없이 <콘스탄틴>을 떠올릴 수 있을까? 


얀 마녀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콘스탄틴>에서 천사를 연기했다면, 같은 해 개봉한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에서는 마녀를 연기했다. 스윈튼은 무섭게 괴성을 지르지 않고서도 영원히 겨울이 지속되는 나니아에서 가장 차가운 존재인 하얀 마녀의 위압감을 고스란히 내뿜는다. 상당한 장신인데도 키높이 구두를 신었고, 보호대, 가발, 왕관을 착용했지만, 스윈튼만의 창백한 얼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아우라다. <나니아 연대기>의 하얀 마녀는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틸다 스윈튼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줄리아
<줄리아>

줄리아는 망가진 사람이다. 술에 절어 사는 그녀는 아무데서나 뒹굴다가 그대로 쓰러져 자고, 떡진 머리와 부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급기야 범죄까지 저지른다.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여자에게 부탁받고, 그의 아들을 유괴한다. 감정 혹은 인격을 완벽히 차단한 듯한 연기로 커리어를 쌓았던 틸다 스윈튼은 <줄리아>(2008)에서 눈에 띄는 메소드 연기를 한껏 선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유괴한 톰으로부터 사람의 따뜻한 기운을 오랜만에 느끼는 줄리아의 심경과 상통한다.


엠마
<아이 엠 러브>

엠마의 삶은 완벽해 보인다. 부유한 며느리로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여자. 하지만 삶에 회의를 느끼던 그녀는, 아들의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를 사랑하면서 스스로를 깨닫는다. 엠마는 흐트러짐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화려하고 무미한 일상에 들어온 감정에 자신을 맡긴다. 스윈튼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사랑의 희열에 들뜬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관객은 격렬하게 요동치는 그 감정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너무나 완전한 나머지 답답하기까지 한 대저택을 벗어나 햇볕과 녹음 아래서 안토니오를 느끼는 엠마의 모습은 사랑 그 자체다.


에바
<케빈에 대하여>

특정한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틸다 스윈튼의 얼굴은 캐릭터의 감정을 완전히 빨아들여 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케빈에 대하여> 속 에바의 얼굴은 황망함으로 가득하다. 뜻하지 않은 임신에 자유로운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에바의 곤경은 첩첩산중이다. 어려서부터 알 수 없는 적개심으로 에바의 마음을 뿌리채 흔들어놓던 아들 케빈은 결국 상상에도 붙이기 어려운 몰살을 저지른다. 하지만 케빈은 태연하기 짝이 없다. 파티를 즐기던 과거를 그린 인트로가 무색하게도, 스윈튼의 얼굴은 그 황량한 심경처럼 말라 비틀어져 간다. 가뜩이나 뚜렷한 이목구비가 한없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브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기어코! 짐 자무시의 로맨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에서 스윈튼은 뱀파이어를 연기한다. 아직까지 뱀파이어를 연기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할 만큼 적역인 배역이다. 하지만 이브는 무섭지 않다. 피로 만든 아이스바를 물고 있어도, 입안이 시뻘건 채로 송곳니를 드러내도, 관객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연인 아담을 만나기 위해 모로코 탕헤르에서 미국 디트로이트로 건너와 원없이 사랑을 나누는 이브의 모습은 천진난만하기만 할 따름이다. 뱀파이어를  닮은 모습보다 그때그때 상황에 처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투명함이 먼저 떠오른다.


메이슨
<설국열차>

어떤 캐릭터를 뒤집어 써도 아름답기만 하던 틸다 스윈튼은 <설국열차>의 메이슨 총리를 만나면서 완전히 망가졌다. 메이슨은 본래 "온화한 성향의 남자"로 설정돼 있었지만, 스윈튼이 캐스팅되면서 설정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스윈튼은 기괴한 외모를 만들기 위해 촬영 때마다 가발, 틀니, 들창코 등 특수분장을 무릅쓰고, 지배자의 그릇된 논리를 실행시키는 2인자 메이슨을 보여줬다. 한국 개봉 당시 남궁민수(송강호)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마담 D.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이 노파, 마담 D.로부터 시작한다. 세계 최고의 부호인 그녀는 암살당하기 전 호텔 지배인이자 연인인 구스타브(레이프 파인즈)에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명화를 남긴다. 마담 D.의 물리적인 비중은 작지만, 그 존재는 그녀의 사연을 파고들어가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영화 전반에 퍼져 있다. 웨스 앤더슨은 촬영 때마다 무려 5시간을 분장에 쏟아야 하는 수고를 감수하고 마담 D.역에 노년 배우가 아닌 틸다 스윈튼을 기용했다. 젊은 연인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나이든 여자의 사랑이 영화를 맴돈다는 걸 떠올린다면 그 결단에 무릎을 치게 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