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역사를 쓰며 흘러온 히어로 코믹스라는 장르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다채로운 가능성을 가진 부분은 멀티버스, 즉 다중세계일 것이다. 창작자가 일관된 설정과 세계관을 지닌 하나의 캐릭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야기에 한계점이 있어 그 한계를 부수기 위해 태어난 설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좀 더 다양한 사건과 캐릭터의 다층적인 해석을 통해 우리는 현재 수많은 히어로 및 빌런 캐릭터들의 다양한 관점을 엿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멀티버스는 초창기 코믹스들을 시작으로 히어로 코믹스에서는 이미 당연한 개념이 되어 있으며 이를 토대로 수많은 이슈와 이벤트들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 세계의 캐릭터가 다른 세계의 자신(스스로이면서도 스스로가 아닌 존재)과 싸워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멀티버스의 개념은 실사화 프로젝트의 특성상 일관된 세계관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MCU에서는 쉽게 등장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닥터 스트레인지의 등장 및 <어벤져스>를 위시한 팀업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결과를 토대로 이제 MCU는 더 넓은 세계를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인크레더블 헐크>부터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아우르는) 기존의 인피니티 사가의 이야기에 익숙한 일반 관객에게는 멀티버스 개념의 도입이 다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다중세계라는 개념은 서브컬쳐 전반에서 여러 번 다루어져 왔고 이미 익숙한 개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단순할 수도 있다. 스파이더맨이 가난하지 않다면? 피터 파커가 삼촌을 잃지 않았다면? 혹은 조커가 빌런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독자의 상상력을 토대로 2차 창작물에서만 다루어지던 어떤 이야기들을 공식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멀티버스다.
멀티버스의 시작은 완구 사업?
마블 코믹스의 주요 이벤트 중 하나인 <시크릿 워즈>는 이런 멀티버스 개념을 이용한 대규모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1984년에 동일한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시크릿 워즈>의 경우에는 영웅과 빌런들이 비욘더라는 존재의 힘에 의해 배틀월드로 납치되어 서로 싸움을 벌이는 올스타전이었으나, 2015년에 시작된 <시크릿 워즈>의 경우 멀티버스와 연관이 깊다.
1984년의 <시크릿 워즈>는 다소간의 상업적인 이유로 인해 등장한 이슈였는데, 바비 인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완구 제작회사인 마텔이 마블 코믹스와 손잡고 캐릭터 제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대규모 캐릭터 상품 판매를 위해 입김을 불어넣어 탄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믹스에 등장해 온 온갖 캐릭터들이 한꺼번에 나와 대결을 펼치는 이른바 올스타전은 제품으로 만들기에 버라이어티한 매력 요소를 갖고 있어 딱이었던 셈.
그러나 2015년의 <시크릿 워즈>는 보다 폭넓고 디테일한 스토리라인을 바탕으로 한 대규모 크로스오버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데, DC 코믹스에서 진행해 오고 있는 정기적 크로스오버 이벤트인 '크라이시스'와 유사한 관점이다. 즉 강력한 적이 등장해 수많은 평행우주(멀티버스)를 소멸시키기 시작하고 이에 맞서 자신들의 삶과 세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히어로들과 빌런들이 저마다의 싸움 혹은 협력하게 되는 방대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마블 유니버스 전체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크릿 워즈>의 시작은 수많은 평행세계들 중 몇 가지 지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인커전'을 시작으로 발발된다. 평행세계의 지구들이 서로의 영역을 넘어서서 충돌을 일으켜 둘 다 파괴되고 마는 것. 이 상황에서 히어로들이 자신의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충돌을 일으키기 전 다른 지구를 파괴하는 것 말고는 없다.
'인커전' 즉 중첩은 결국 616과 얼티밋 세계관을 충돌시켰고, 이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마블 유니버스는 완전히 절멸한다. 그리고 닥터 둠과 몰큘맨, 닥터 스트레인지 세 사람이 세계의 완전한 멸망을 막아내기 위해 세계의 조각들을 이어붙인 또다른 세계인 '배틀월드'가 만들어지며 캐릭터들은 이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코믹스 사 입장에서 이런 평행우주의 파괴와 질서에 관한 이슈를 다루는 이유는 오랜 기간 진행되어 오면서 각개의 이야기 사이에 생긴 모순점들을 걸러내고 세계관을 정리한다는 목표도 있겠지만, 그만큼 혹은 그보다 큰 장점은 다양한 히어로와 빌런 캐릭터들이 지금까지 마주하지 못했던 거대한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이에 맞서 각자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실사화된 마블과 DC, 각자의 크로스오버는?
<시크릿 워즈>의 실사화 가능성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 등 다양한 MCU 영화의 연출로 실력을 입증해 온 루소 형제의 인터뷰를 통해 언급되었다. MCU가 작금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각각의 히어로들에 대해 충분한 서사와 당위성을 부여하는 솔로무비에 이어 <어벤져스> 시리즈라는 팀업무비로 세계관의 통합을 단단히 이루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주역 중 하나이자 인피니티 사가의 엔딩이었던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높은 성과를 낸 그들의 손에서라면 <시크릿 워즈>역시 흥미로운 영상물로 태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보다는 TV 시리즈에서 더 강세를 보여 왔던 DC의 경우, CW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들을 기반으로 하는 CW버스(구 애로우버스)에서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대규모 크로스오버 이벤트인 '크라이시스 온 인피니티 어스'를 진행해 코믹스판 크라이시스를 재현하기도 했다. 즉 가벼운 연계점으로만 그려지던 히어로들간의 관계와 세계관이 그들의 협업과 싸움을 통해 본격적으로 얽히기 시작하는 것인데.
마블의 경우 드라마들이 MCU 본편과 연관성이 크게 없었던 데다가 기존 <디펜더스>가 제작 중단된 상황이기에 심도 있는 크로스오버 이벤트까지는 어려웠지만, 디즈니 플러스의 출범 및 MCU와의 본격적인 연계가 예정되어 있는 지금이라면 실사화 프로젝트로 <시크릿 워즈>와 같은 대규모 이벤트를 기대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는 방영된 적이 있기에 서사구조에 있어서도 다양한 측면을 예상해 볼 수 있을 듯.
루소 형제가 다음 연출작으로 <시크릿 워즈>의 가능성을 꼽은 바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그 전에 인휴먼스와 엑스맨의 완전한 MCU 편입이 먼저 우선되어야 할 것 같으므로 좀 더 넓고 방대해진 MCU의 세계가 구축되기를 기다리며 <시크릿 워즈> 이하 '시빌 워 2' 등 다양한 이벤트를 실사화 프로젝트를 통해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PNN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