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반도>가 궁금했던 이유 중 하나는 구교환이다. 독립영화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확고하게 보여온 이 배우의 특징이 거대 상업영화 안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개성이 반질반질함을 요구하는 시스템에 눌려 희미해지지 않을지 내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교환은 관습의 테두리 밖으로 넘을락 말락 하는 기세로 극에 기이한 분위기를 불어넣고, 자신만의 독자성을 입증해 보인다.
<반도>에서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길 포기한 인간들이다. 그 중심에 ‘631부대’가 있다. 마루타 실험을 자행하며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보여줬던 일본 ‘731부대’에서 따온 작명일까. 좀비 창궐의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본래 민간인을 구조하기 위한 부대였으나, 지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지속해서 좌절당하자 무법자가 돼 버렸다. ‘숨바꼭질’이라 불리는 게임은 이들의 야만성이 어디까지 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잔혹한 유희다. 들개라 불리는 인간을 좀비 떼 사이에 풀어놓은 후, 이를 지켜보며 낄낄거리는 모습엔 일말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631부대의 과거 서사를 몇 마디 말로 툭 던질 뿐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생략된 서사에도 불구하고 631부대를 흥미롭게 지켜보게 하는 위력은 김민재와 구교환 두 배우가 내뿜는 에너지에서 나온다. 구교환이 연기한 서 대위는 631부대를 통솔하는 지휘자다. 그런데 이 캐릭터, 수상하다. 권력은 가졌으되 부하들로부터 신임받는 것 같지는 않고, 과거를 잊지 못해 허무주의에 빠져있으며,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 우두머리가 보여줄 법한 위력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유약했다가 사악했다가 지질했다가 냉혹했다가 폭주하는 미로와도 같은 인물. <반도> 속 서 대위 캐릭터가 신선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전형성에 포획당하지 않으려는 배우의 기질이 캐릭터에 깊숙이 침투해 익숙한 것들을 지워내기 때문이다.
특히 황 중사를 연기한 김민재의 창(추궁)과 구교환의 방패(거짓말)가 1대 1로 맞붙어 진실게임을 벌이는 신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 서스펜스의 하이라이트라 생각하는데, 꿍꿍이속이 탄로 날까 안면 근육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는 구교환의 표정은 극의 분위기는 물론 이를 바라보는 스크린 밖의 공기도 동시에 얼어붙게 만든다.
익숙한 노선에서 비껴나, 관객으로 하여금 뭔가 특이한 걸 보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건 구교환이 단편영화 <남매의 집>(2009)에서부터 보여온 장기다. 이 영화에서 구교환은 남매만 남은 집에 침투한 괴한으로 분해, 예의 그 의도를 알아채기 힘든 복잡미묘한 행동과 파장을 남기고 미스터리하게 사라진다. ‘영화에 찍히는 사람’인 동시에 ‘찍기도 하는 사람’인 구교환의 이러한 기질은 그가 메가폰을 잡은 단편영화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의 첫 연출작 <거북이들>(2011)은 ‘대변 대신 거북이를 배설하게 된 남자’라는 독특한 상상력으로 관객들이 배를 움켜쥐게 했다. 친구들과 색보정 테스트용으로 찍은 작품이라는 <Welcome to my home>(2013)은 구교환의 매력을 날 것 이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데, 웃음이 부족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이들에게 감상을 권하고 싶은 정도로 기이하게 웃겨준다. 소울메이트이자 영화적 파트너인 이옥섭 감독과 공동 작업한 작품들 안에서도 ‘구교환의 것’들은 차곡차곡 쌓여있다.
배우로서의 구교환을 보다 널리 알린 건 <꿈의 제인>(2016)을 통해서였다. 클럽 ‘뉴월드’의 디바이자 가출 청소년들의 엄마, 그리고 마음에 품은 남자의 사랑을 끝내 얻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제인을 연기한 구교환은 독보적인 매력과 사실성을 캐릭터에 부여하며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영예를 안았다. 같은 해 개봉한 <우리 손자 베스트>에선 ‘일베’ 헤비 유저로 등장하는데, 선과 악을 지운 그의 얼굴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캐릭터에 조금 더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유도했다.
각도나 헤어스타일에 따라 인상이 달라보이는 배우는 많지만 구교환의 경우 장르까지 달라 보이는 면이 있어 흥미로운 경우다. 그러니까 카메라 위치나 메이크업에 따라 미남계 스타의 얼굴이었다가, 익살스러웠다가, 때론 기이했다가 우울해 보이기도 한다. 가령 <연애다큐>에서의 구교환과 <플라이 투 더 스카이>(2015)에서의 구교환은 같고도 참 많이 다르다. <반도>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다 보면 “구교환의 비주얼이 강동원에 눌리지 않아서 놀랍다”는 평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거대한 사이즈의 스크린은 이 배우가 품은 표정을 보다 극적이고 살려내는 데 용이하다.
그러나 구교환의 트레이드 마크를 꼽아야 한다면, 무릇, 금속성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냥 목소리가 아니다. 외모를 배반하는 목소리이고, 감정을 읽어내기 어렵게 하는 목소리다. 이런 그의 음색은 독특해서 특이한 게 아니라, 분류가 불가능해서 특이하다. 한때 콤플렉스였다는 구교환의 목소리는 이제 그가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는데 좋은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구교환은 독립영화 진영에서 뜨거운 지지를 받아 온 배우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배우의 재능을 상업영화가 이제야 알아봤다고 보는 건 옳지 않다. 상업영화로의 진출을 유예시켜 온 건 구교환 그 자신이었으니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눈썰미 좋은 제작진들의 제안에 모두 껴안았다면, 구교환의 필모그래피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구분하는 건 구교환 앞에서 무익하다. 지난해 만났을 때 구교환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걸 경계하고 있었다.
<반도> 역시 더 큰 시스템 안에서의 영화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영화는 제작비가 크든 작든, 출연배우가 많든 적든, 장편이든 단편이든 모두 그냥 영화일 뿐이다. 이를 증명하듯, <반도> 이후 그의 선택은 단편영화 <눈을 가진 죄(ROMEO)>였다. 물론 구교환은 뭔가를 규정짓는 것 역시 조심한다. “어떤 신념들은 바뀔 수 있다”고, “다만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의 다음 행보는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다. <모가디슈> 이후 그를 대하 사극이나 아침 드라마에서 만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정시우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