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킹덤> 시즌 1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게 드라마만의 이야기였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아직 병의 원인이나 특징, 치료법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역병이 미친 듯이 번지는 마당에,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남의 생명이야 어찌 되었든 격리를 피해 달아나는 이들이 현실 속에서는 없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킹덤> 시즌1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순간은 병마절도사 댁 노마님(허진)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황망한 동래부사 조범팔(전석호)과 이방(유승목) 앞에 서비(배두나)와 영신(김성규)이 엎드려 역병 환자들을 어찌 처리하면 되는지를 아뢰었으니, 이제 그들의 말대로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낮이 되어 잠잠해진 동안 시신들의 목을 자르거나 불로 태우기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동래부 동헌 앞마당에 노마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이거늘 시신을 태운다니 말도 안 된다고. 삼대독자 귀하디 귀한 내 아드님 시신에 누구 하나 털 끝이라도 건드리면 가만 있지 않을 거라고. 다른 양반들도 들고 일어나 제 가족의 시신에 손을 대지 말라며 악을 쓰는 광경을 보며 나는 한탄했다. 저들은 어리석고 오만해서 죽을 것이고,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초래하겠구나.
아니나 달라, 세자 이창(주지훈)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던 양반들끼리 몰래 조운선을 띄워 상주로 도망치는 길, 노마님은 예법에 맞게 아들 장례를 치르겠단 욕심에 아들의 시신을 반닫이장에 숨겨 배에 싣는다. 역병환자의 시신을 싣고 낙동강 물줄기를 거슬러 멀어져가는 배를 보고 있자니 피로가 아득하게 몰려왔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그 배에 올라탄 아둔하고 이기적인 양반들이 죽어날 것은 하나도 안타깝지 않았지만, 그들만 죽고 끝나는 게 아니라 상주 땅까지 역병이 번질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고 보면 <킹덤>에서 가장 큰 적은 역병환자가 아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역병을 이용해 제 사욕을 챙기고자 하는 이들이 적이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상황에서도 양반과 양인, 천민 사이의 위계를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적이다.
물론 현대를 사는 한국인의 눈으로 봤을 땐 그 모든 게 한심하고 답답해 보이지만, 극의 배경이 되는 대체역사의 조선에선 그 모든 가치가 목숨만큼 귀했을 것이다. 혈통에 따라 신분의 고저가 지엄하고, 효나 충과 같은 더 큰 가치를 이루기 위함이 아닌 이상에야 부모님이 주신 육신을 함부로 훼손해선 안 된다고 믿는 유교적 가치관이 그 중심을 차지한 세계이니, 양반 상놈 가릴 것 없이 무더기로 겹쳐진 시신들을 모아서 불에 태우자는 이야기가 얼마나 끔찍하게 들렸으랴. 그러나 제 아무리 아름답고 정교한 가치라 한들 그게 나와 내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응당 버리거나 유보하는 게 맞다. <킹덤> 속 동래 양반님네들은 양반 아닌 평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마음이 없어서 자기들끼리 도망갔고, 이웃의 안녕을 위해 제 가치를 접을 의기가 없어서 죽음을 초래했다.
<킹덤> 시즌1의 말미, 세자 이창과 그 일행들은 상주가 넘어가면 경상도 땅 전체가 넘어간다는 생각에 절박하게 상주 읍성 들어가는 길목을 막는다. 역병환자들은 밤에만 움직이니 이 밤만 잘 막아내면 승산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밤새 길목을 지키던 이창은, 이미 동이 텄는데 목책 너머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 웅성거리는 걸 본다. 이제껏 관찰한 역병의 특징인 ‘밤에만 움직인다’라는 전제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병의 특징에 맞춰 짠 전술들이 죄다 무너진다. 시청자와 이창 일행의 억장 또한 덩달아 무너진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병을 발견한 지 오래지 않은 탓에 병의 특징을 제대로 파악할 겨를이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설상가상 공중 보건에도 실패해 역병이 통제가 안 될 만큼 퍼진 상황 아닌가. 병의 특징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들이 신봉하는 가치만 주워섬긴 동래 양반님네들의 오만 때문에, <킹덤> 속 경상도 땅은 절망의 땅이 되었다.
이게 드라마만의 이야기였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아직 병의 원인이나 특징, 치료법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역병이 미친 듯이 번지는 마당에,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남의 생명이야 어찌 되었든 격리를 피해 달아나는 이들이 현실 속에서는 없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누가 봐도 잠재적 위험 요소인 감염자를 데리고 오는 일 같은 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병을 옮겼을 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시 그 인파가 전국으로 흩어지는 일 따위는, 정말이지 없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킹덤>을 속 편하게 K-좀비 드라마로만 소비할 수 있었더라면, 그 속에서 불길한 예언적 울림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드라마 속 조학주(류승룡)를, 병마절도사 댁 노마님을 보면서 현실 속의 누군가를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긴 장마가 끝난 뒤 찾아온 폭염 속에서도 봄철에 쓰던 KF94 마스크를 꺼내어 쓰는 지금, 이 모든 가정은 그저 헛될 뿐이다. 조운선은 이미 상주 땅에 도착했고, 읍성 가는 길목 안개 너머에 역병환자가 몇이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새벽이다. <킹덤> 속 역병은 시즌 2 말미 쯤엔 어느 정도 수습이 된다. 과연 우리도 이창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살아서 상주 읍성을 빠져나와 역병을 잡을 수 있을까. 방금, 우리의 시즌2가 시작됐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