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코로나19로 덮인 한 해였다. 21대 총선이 치러져 민주당이 180석을 차지하고,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을 달성했으며, BTS가 빌보드 정상과 그래미 후보에 올랐지만,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이 급성 호흡기 감염병이 2020년 1월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순식간에 지구 전역을 팬데믹 속으로 몰아넣은 공포를 이길 순 없었다. 누적 확진자가 6800만 명, 사망자만 157만 명에 육박하며, 제2의 흑사병이자 스페인 독감의 재림이란 평가를 받으며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여행과 모임, 집회는 금지되고, 학교와 각종 행사들은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됐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철저한 위생 수칙과 거리두기, 출입명부 작성 등이 일상화되었다. 유례없이 빠른 백신 개발이 이루어져 접종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재, 이 비상사태를 잠재울 수 있을지, 아니면 위기가 계속될지 그 결과에 귀추가 모아지고 있다.
코로나의 여파는 국내외 극장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1년 내내 이어진 유행으로 2월부터 8월 영화관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0%가량 줄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비롯해 국내 각종 대작들은 상영을 미루거나 OTT시장으로 활로를 바꿨다. 광복절 집회로 인한 대규모 확산이 있기 전 상영됐던 <반도>나 <강철비2: 정상회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살아있다> 등의 흥행을 제외하곤 제작비 보존조차 힘겨웠다. 결국 <사냥의 시간>을 필두로 <콜>과 <낙원의 밤>, <차인표>, <승리호> 등은 넷플릭스 공개를 택했다. 그리고 겨울 대작으로 버티고 있었던 <서복>과 <인생은 아름다워> 역시 개봉 연기를 결정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김없이 2020년 한해 국내 영화음악들을 정리해본다. 기간은 2019년 12월 11일부터 2020년 12월 8일까지 개봉된 영화들을 대상으로 음원이나 CD로 공개된 한국 사운드트랙에 한정했다.
작년에 비해 조금 줄어든 35편 정도의 사운드트랙을 접할 수 있었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5편을 추려 ‘2020년 한국 사운드트랙 리스트5’를 뽑아보았다. 안타깝지만 사운드트랙이 나오지 않은 영화들은 과감히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 편이 이 리스트에 대한 형평성과 객관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영화음악 베스트가 아닌, 한국 사운드트랙 리스트다. 따라 시상식 후보에 올랐거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모그의 <반도>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달파란의 <삼진그룹 토익영어반>과 <콜>, 프라이머리의 <사냥의 시간>, 김태성의 <강철비2: 정상회담> 등은 사운드트랙이 일반적으로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 포스트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밝혀둔다. 개인적으로도 아쉽게 생각한다. 리스트는 개봉날짜 순이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
by 조성우
역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관계를 팩션으로 해석한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화제가 된 건 <쉬리> 이후 20년 만에 스크린에서 조우한 한석규와 최민식의 캐스팅이었다. 그러나 2012년 <위험한 관계> 이후 (물론 <덕혜옹주>에서 한 곡 작업하긴 했지만) 8년 만에 영화음악으로 돌아온 조성우의 귀환도 빼놓을 수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플란다스의 개> 등으로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음악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조성우는 탁월한 멜로디 감각과 유려한 서정성으로 자신만의 인장을 확실하게 영화에 아로새겼는데, 특히 허진호와 함께했던 <봄날은 간다>, <외출>, <행복> 등을 비롯해 <정사>와 <약속>, <선물>, <인어공주>와 <만추> 등 멜로드라마에서 빛을 발휘했다. 가히 브로맨스라고 할 정도로 세종과 장영실의 깊은 우정과 유대감을 드러낸 이번 작품에서도 섬세하고 애절한 스트링과 피아노,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굳센 클라리넷과 플루트, 오보에, 바순 등의 목관악기들로 인상적인 선율을 선사한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지휘자 구자범이 편곡과 지휘에 일부 참여해 반가움을 더한다.
남산의 부장들
by 조영욱과 사운드트랙킹스
2020년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온 작품은 팬데믹의 영향을 받기 직전에 개봉했던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이다. 동아일보 기자출신의 김충식이 쓴 동명의 논픽션을 바탕으로 <제보자들>을 함께 했던 이병헌과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 김소진 등이 뭉쳐 격동의 현대사를 프렌치 느와르처럼 재조망해 냈다. 여기에 시종일관 긴장감을 더하는 건 조영욱 음악감독의 지휘 아래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사운드트랙킹스가 작곡한 차갑고 묵직한 스코어 덕분이다. <내부자들>과 <마약왕>에 이어 우민호 감독과는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춘 조영욱 사단은 더 깊고 어두워진 소리들로 탐욕과 부패, 의혹과 비리가 판치던 시대상을 건조하게 묘사해간다. 반복적이고 미니멀한 오스티나토와 침전된 일렉트릭 사운드, 끊임없이 약동하는 퍼쿠션이 만들어내는 주술적인 파고는 권력 이면에서 벌어지는 2인자들의 처절한 암투와 배신, 음모의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청각화했다. 암살이라는 구국의 결단을 내리기까지 내적 고뇌를 드러내는 서정적인 김부장 테마와 외적 갈등을 암시하는 혼돈스러운 다른 큐들과의 충돌은 보다 영화의 주제와 스타일을 명료하게 살려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by 강네네
소네 케이스케의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전도연과 정우성, 배성우와 윤여정, 정만식, 진경, 그리고 떠오르는 신예 신현빈과 정가람 등 쟁쟁한 배우들의 앙상블 캐스팅이 눈에 띄는 김용훈 감독의 데뷔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한차례 개봉 연기를 했음에도 급속도로 퍼진 대구 신천지발 악재를 직격으로 받은 작품이다. 흥행 참패라는 아쉬움만큼이나 이 작품으로 상업영화음악에 데뷔한 음악가이자 감독이기도 한 강네네가 맡은 음악도 그냥 묻혀 버리기엔 퍽 아쉬운데, 블루지한 색채와 라틴 스타일, 왈츠 등을 버무려 의뭉스러우면서 감성적이고 복합적인 정서를 구현하는 팔색조 같은 매력이 눈에 띈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가이 리치 등을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들의 범죄드라마지만, 그들의 현란하고 귀를 사로잡는 히트곡 퍼레이드 대신 그녀가 담당한 스코어는 비선형식 군상극이라는 영화에 걸맞게 캐릭터별 고유의 스타일과 기타, 클라리넷, 트럼펫, 스트링 등 악기들을 각각 부여해 인상적인 테마들을 직조해낸다. 자칫 한없이 가라앉고 심각해질 수 있는 분위기마다 팔딱팔딱 넘치는 생동감과 리드미컬한 여유를 부여하는 음악이 주는 쾌감은 떡밥을 다 회수한 채 막 내리는 영화처럼 강렬하다.
야구소녀
by 피터팬 컴플렉스(김경인, 전지한, 이치원, 김인근)
프로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일념 하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 소녀의 진지한 고군분투를 다룬 최윤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야구소녀>는 이 시대 청춘들의 취업기인 동시에 편견과 한계를 넘기 위한 성장담이다. 이 파릇파릇한 영화에 용기를 북돋아 주는 건 벌써 데뷔 20년차를 맞이한 얼터너티브 락밴드이자 신스팝 밴드 피터팬 콤플렉스의 맑고 투명한 음악이다. 밴드의 드러머이자 작곡가로 활동하는 김경인이 주로 담당한 신스 톤의 연주곡들은 이들의 첫 영화음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청춘물과 스포츠물 경계를 넘나들며 섬세하게 일상성을 담아내고 있다. 지치고 힘든 현실과 맞닥뜨리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꿈과 내일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 영화 속 캐릭터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음악은 짧고 담백하지만 진솔하게 다가가며 쉽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134km의 강속구로 던져준다. 여기에 2018년에 발표한 “Old Street”를 영화에 맞게 피아노와 3대의 첼로로 편곡한 버전과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전소현이 피쳐링한 주제곡 “Dreaming in Skies”는 피터팬 콤플렉스만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드러내며 존재감을 뽐낸다.
기기괴괴 성형수
by 홍대성
네이버에 연재된 오성대의 웹툰 <기기괴괴>에서 단연 주목받은 '성형수' 에피소드를 영상화한 <기기괴괴 성형수>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장편 호러 애니메이션으로, 스튜디오 애니멀의 조경훈 감독이 6년간의 제작기간에 걸쳐 완성해 제44회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등 다수 국내외 영화제에 출품돼 화제를 모았다. 기괴한 상상력과 그로테스크한 비주얼에 더해 공포감을 배가시키는 건 전통적인 할리우드 작법의 영화음악의 힘인데, 조영욱 사단에서 오랜 기간 작곡을 했던 홍대성의 솜씨다. 그가 첫 번째로 독립해 음악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으로, <싸이코>와 <현기증> 등의 음악을 맡았던 버나드 허먼을 떠올리게 만드는 압도적인 현악 편성의 스코어가 쉬 잊히지 않는 잔향을 짙게 남긴다. 광기와 집착을 표현하기 위해 날카로운 현만큼이나 효과적인 건 없다는 걸 이미 허만이 증명했기에, 홍대성은 여유롭게 그 길을 따라가는 한편 연민과 소름을 동시에 자아내는 이중적인 오르골 효과와 성형 후 미녀가 된 판타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화려하고 아름다운 왈츠를 대비시켜 미추에 대한 욕망과 그릇된 사회의 부조리마저 반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올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수작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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