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

2016년 8월 17일은 한국 애니메이션 사에서 특별하게 기록될 날입니다. 드물게 제작되는 국산 장편 애니메이션이 같은 날 두 편이나 개봉하기 때문이죠. 바로 <서울역>과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이 그 주인공입니다. 세간의 반응 또한 남다른데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얼마 전 <부산행>으로 '천만감독'의 대열에 오른 연상호 감독이 관여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는 <서울역>에서 연출과 각본을,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의 제작을 맡았습니다. <부산행>의 프리퀄인 <서울역>은 희망따위 찾을 수 없는 어두운 세계관으로 다시금 연상호 감독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마리 이야기>(2001), <천년여우 여우비>(2006)를 연출한 이성강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는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이미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뜨거운 반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두 애니메이션의 개봉을 환영하며, 흥행이 불투명한 시장과 척박한 제작 환경 등 온갖 난점을 딛고 이어진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50년 역사와 당시의 대표작을 소개합니다.


<홍길동>
1967:성대한 시작

1967121. 신동우 작가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그의 형 신동헌 감독이 영화화 한 <홍길동>의 개봉과 함께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출발하는 날입니다. 시작부터 장대했습니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 50배에 해당하는 5400만원이 투입된 <홍길동>2주 넘게 상영돼 약 1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그 해 한국영화 흥행 2위에 올랐습니다. 다른 나라의 스타일에서 자유로운 신동헌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 역시 주목 받았죠. <홍길동>만이 1967년의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신동헌 감독이 다른 제작사와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 한국 최초의 인형 애니메이션 <흥부와 놀부> 등 모두 4개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개봉했습니다.

<로보트 태권V>
1976: 침체와 재기

1970년대 초만 해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전망을 밝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70년대 들어 TV가 보급되면서 극장을 향한 발길이 눈에 띄게 줄었거든요. TV를 통해 몰려든 미국,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 역시 침체에 한몫 한 건 물론이고요. 극장 관객을 타겟으로 두던 국산 애니메이션은 자연히 경쟁력을 잃고, 1972<괴수 대전쟁> 이후 다른 나라의 애니메이션 하청 작업에 주력하는 잠복기에 접어들었죠. 하지만 1976년 제작된 <로보트 태권V>가 그 침묵을 깼습니다. (비록 일본의 <마징가 Z>(1972)의 노골적인 영향이 드러나긴 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태권도에서 얻은 한국적인 요소를 어필한 프로덕션이 돋보인 <로보트 태권V>1972년 흥행 2위를 기록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1977), <별나라>(1979) 등 방학 시즌을 노린 애니메이션이 흥행의 성과를 거두는 한편 작품 자체의 성장은 그대로 멈춰버렸다는 사실. 그렇게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다시 내리막을 걷게 됩니다.

<블루시걸>, <아마게돈>,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위에서부터)

1994~1996: 대규모 투자의 그릇된 결과

오랜 침체를 타계하고자 팔을 걷어붙인 건 다름 아닌 정부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대대적인 지원을 감행해 한국 최초 성인용 애니메이션을 지향한 <블루 시걸>(1994) 제작에 힘씁니다. 전국 50여만 명을 동원한 좋은 성적을 내긴 했지만, 이를 제외한 결과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완성도, 제작비와 관련한 비리 등 여러모로 아이들에겐 보여줄 수 없는 결과물의 연속이었죠. <홍길동>의 신동헌 감독이 연출한 <돌아온 영웅 홍길동>(1995)이 대중과 평단을 모두 만족시키며 건재함을 과시했다면, 이현세라는 걸출한 만화가와 대규모 제작위원회가 힘을 합친 <아마게돈>(1995)은 또 다시 실망을 안겼습니다. 애니메이션 작업은 처음이었던 감독이현세의 연출은 (스스로도 술회하듯) 미숙했고, 4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투입됐음에도 서울 관객 6만7000명이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마게돈>과 같은 해 개봉한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1996)은 국산 애니메이션을 향한 불신을 얼마간 씻어준 작품이었습니다. 80년대 말 TV애니메이션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기공룡 둘리>를 토대로 하되, 이야기와 캐릭터에 유연한 변화를 꾀해 극장용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을 갖춰 스토리텔링의 가치를 되새긴 작품입니다.


<마리 이야기>, <오세암>, <원더풀 데이즈> (위에서부터)

2001년~ 2003: 한국을 뛰어넘어

속시원하게 성공한 작품이 없었던 90년대 후반을 지나 새천년에 접어들자 전에 없던 예술적 성취를 자랑하는 작품들이 공개됩니다. 포문은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2001)가 열었습니다.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가 대번에 눈을 사로잡는 <마리 이야기>는 서사보다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돼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습니다. 뚜렷한 지지층에도 불구하고 5만4000(서울 기준)이라는 미미한 성적에 그치긴 했지만,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2002년 최고상에 해당하는 장편부문 그랑프리를 안기며 한국에서 온 이 아름다운 작품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낭보는 이듬해에도 이어졌습니다. 동화작가 정채봉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오세암>(2002)이 이듬해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다시금 장편 그랑프리를 수상하게 된 것.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남매 감이와 길손이를 주인공으로 둔 절절한 이야기는 뭇 관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습니다. 20037, 126억의 제작비와 7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친 야심작 <원더풀 데이즈>가 개봉했습니다.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만큼, 비주얼은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상찬이 이어졌죠. 그에 반해 (100번의 탈고를 거친) 시나리오가 따분하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원더풀 데이즈>는 여름방학 시즌에 맞춰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관객 224천 명을 동원하며 스크린에서 내려왔고, 이후 한국에서 거대 자본이 투입된 애니메이션 제작은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중한 날의 꿈>, <마당을 나온 암탉>, <돼지의 왕> (위에서부터)

2011년: 애니메이션, 극장계의 화두로 떠오르다

2011년 한국영화계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의 약진이었습니다. 같은 해 개봉한 <소중한 날의 꿈>, <마당을 나온 암탉>, <돼지의 왕>은 모두 각자 다른 매력으로 관객들의 이목을 이끌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수채화풍 그림체와 언제나 힘 센 소재인 첫사랑을 내세운 <소중한 날의 꿈>은 개봉 당시의 복고 열풍에 힘입어 잔잔한 화제를 모았죠. 베스트셀러 작가 황선미의 동화를 바탕으로 한 <마당을 나온 암탉>은 기대치를 훨씬 웃도는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역대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수치인 전국 관객 220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죠. 어미 닭과 그 아이가 함께 모진 세상을 헤치고 꿈을 이뤄가는 이야기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 관객의 흥미까지 자극하는 재미로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밝고 희망적인 <마당을 나온 암탉>에 반해 그해 말 개봉한 <돼지의 왕>은 한국 사회의 폐부가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진중한 드라마였습니다. 독특한 비주얼로 일찌감치 독립 애니메이션계에서 실력자로 인정받던 연상호 감독의 연출이 돋보입니다. 양익준, 오정세, 김꽃비 등 독립영화계 스타들이 대거 목소리연기로 참여해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팬들을 동시에 섭렵했습니다. 이후 <>(2012), <사이비>(2013)를 내놓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성장한 연상호 감독은 올해 첫 극영화 <부산행>을 선보여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호평을 받았습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