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하는 방법 중 가장 안전한 건 무엇일까. 적어도 원작의 테두리를 지키는 것이다. 영화적 야심을 품고 새로운 도전을 했다가 영화로도, 원작의 영화화로도 실패하면 관객과 팬들 모두 등 돌려버리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원작의 화풍을 그대로 옮겨 팬들에게 인정받은 영화 다섯 편을 소개한다.


씬 시티

원작 프랭크 밀러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 프랭크 밀러

코믹스 작가 프랭크 밀러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마초적인 성향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런 성향은 타락한 도시의 타락한 악당들과 그들의 풍경을 그린 연작 「씬 시티」를 그릴 때 정점을 찍었다. 특히 대부분의 색을 배제하고 오직 음영만으로 입체감을 표현한 흑백의 화풍은 도시의 음산한 분위기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 코믹스를 영화화한 감독은 로버트 로드리게즈. 장르 영화의 수호자이자 디지털 시스템의 선봉장인 그는 「씬 시티」를 영화화하기 위해 누구보다 발빠르게 신기술을 도입했다. 바로 세트가 없는, 오직 그린스크린뿐인 촬영장을 꾸미는 것. 이 방법으로 원작을 스토리보드 삼아 영화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씬 시티>는 10권에 달하는 원작에서 1권(하드 굿바이), 3권(도살의 축제), 4권(노란 녀석), 6권(알콜, 여자, 그리고 총탄)의 단편까지 4편을 영화에 담았다. 극중 마브를 연기한 미키 루크의 싱크로율은 가히 '만찢남' 수준이었고, <터미네이터 3>의 주인공 존 코너를 연기한 닉 스탈이 '노란 녀석'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그 외에도 세트에서 아낀 제작비와 시간을 아낌없이 캐스팅에 쓰면서 브루스 윌리스, 클라이브 오언, 제시카 알바, 베니시오 델 토로 등 초호화 출연진을 만날 수 있다.


300

원작 프랭크 밀러 감독 잭 스나이더

상마초 전문 작가와 비주얼 장인 감독이 만나면? 그 결과물이 <300>. <300>은 위에서 상기한 프랭크 밀러의 짧은 단편 「300」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 <300>은 여기에 액션의 비중과 정치적 상황을 가미해 영화를 완성했다. 원작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작품인데, 영화는 이 원작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더 부각시켜 오리엔탈리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나 제라드 버틀러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스파르타군의 육체미, 초고속 카메라를 활용한 액션 장면은 관객들을 흥분시켰고 흥행에 대성공했다.

<300> 또한 과감하게 CG를 사용해 공간을 연출하는 방법으로 세트의 압박감을 줄이고 촬영 속도와 편의성을 선택했다. 개봉 당시 'CG 아닌 건 스파르타 전사들의 근육뿐'이란 농담이 과장이긴 했어도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 잭 스나이더의 초기작이지만 그의 연출 방향이나 비주얼 특징이 모두 들어있다. 초고속 카메라를 통한 슬로모션, 줌 인-줌 아웃으로 활용한 리듬감, 극단적인 조명 대비로 비장함 강조 등 그야말로 '움짤용 명장면' 감독다운 비범한 연출이 돋보인다.


왓치맨

원작 앨런 무어, 데이브 기븐스 감독 잭 스나이더

잭 스나이더가 또 한 번 원작 구현에 성공한 영화 <왓치맨>. 원작 그래픽노블 「왓치맨」은 초인과 자경단원이 있는, 리차드 닉슨이 삼선에 성공한 미국 사회가 배경이다. 자경단원 코미디언의 죽음과 연관된 음모를 그린 대작으로, 특정 모티브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연출과 누아르에 가까울 정도로 처절한 세계관이 일품이다. 워낙 방대한 작품이라 「왓치맨」는 여러 감독들이 실사화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좌초됐다.

잭 스나이더는 그동안의 시도와 정반대로 원작을 거의 고스란히 가져왔다. 결말부를 제외하면 작품의 전개나 화면 구성을 빼다 박았고, 덕분에 원작을 아는 팬과 모르는 관객의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현실과 픽션의 역사를 섞어 5분 만에 축약한 오프닝은 잭 스나이더의 장점이 극대화된 부분. 하지만 <왓치맨>의 스토리를 전부 소화하기도 바쁜 시간에 슬로모션 액션을 펼치니, 관객들을 무시한 연출이라며 '영화화'보다는 '영상화'에 가까웠다는 혹평을 들었다. 현재는 감독판과 (원작의 극중 단편 코믹스를 더한) 얼티밋 버전이 공개돼 재평가됐다.


내 이야기!!

원작 카와하라 카즈네, 아루코 감독 노기 아키코

일본 만화 원작 일본 영화에는 항상 같은 딱지가 붙는다. '코스프레쇼'. 원작 구현에 충실한 나머지 일본인에게 금발 가발을 씌우고 외국인이라고 우기는 일도 부지기수. 이런 코스프레쇼가 그래도 장점이 되는 장르가 있으니, 바로 코미디다. 카와하라 카즈네, 아루코 작가의 원작 만화를 옮긴 <내 이야기!!>는 스즈키 료헤이의 깜짝 변신을 만날 수 있다. 스즈키 료헤이는 본래 근육질 몸매로 유명한 모델 출신 배우인데, 타케오 역을 위해 30kg을 증량(하필 전작에서 불치병 환자였다)하면서 체형을 바꿨다. 거기에 일본 영화의 장기인 헤어와 분장 고증까지 더해지니 만화 속 타케오가 스크린에서 부활한 듯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영화는 과장된 코미디가 들어간 멜로 영화라 조금 오글리지만, 스즈키 료헤이의 연기와 미남미녀 배우로 유명한 사카구치 켄타로와 나가노 메이의 비주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즈키 료헤이(왼쪽)의 증량과 분장이 더해진 결과물


러빙 빈센트

원작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 감독 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맨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왼쪽)을 모티브로 촬영한 후(가운데) 고흐의 화풍을 더했다(오른쪽).

만화나 그래픽 노블과 비교하면 무척 송구스럽지만, '움직이는 그림'이란 수식어엔 그 어느 영화보다 <러빙 빈센트>를 빼놓을 수 없다. 스토리와 비주얼, 영화의 모든 요소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토대로 제작된 <러빙 빈센트>는 정말 오랜 시간 숙성시킨 애니메이션이다. 제작진의 열정을 결코 수치로 표현할 수 없지만, 기획 단계부터 완성까지 10년이 걸리고 아티스트 107명이 참여했단 제작기는 이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알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를 둘러싼 여러 비화 중 영화가 선택한 건 그의 죽음. 고흐의 죽음 이후 아르망은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마을에 들려 고흐 생전 마지막 모습을 수집한다. 영화 비주얼이 전하듯 제작진은 고흐에 대한 자극적인 이야기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가 좌절하고 고민했을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그린다. 일견 미스터리 영화처럼 시작한 <러빙 빈센트>는 한 예술가의 영혼에 이르러서야 착륙한다. <러빙 빈센트>는 한 가지는 확실히 증명했다. 생전 불행했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인류가 몇백 년 동안 사랑할 아름다움을 남겼다고.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