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 오면 꺼내보는 영화가 있으신가요? 세계 곳곳의 정취를 누리는 바캉스영화를 보며 “한밑천 잡아 조선땅 뜬다”고 중얼거릴 수도, 공포영화의 오싹함으로 몸에 찌든 열기를 씻어낼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여름만 되면 샘 레이미 감독의 <드래그 미 투 헬>(2009)을 챙겨봅니다. 귀신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돌리기에 여념이 없는 제가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공포영화고, 머리 굴릴 필요 없이 배가 찢어져라 웃을 수 있는 유머가 출몰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틴과 가누시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가씨는 대출상담사 크리스틴(알리슨 로먼), 무릎을 꿇은 사람은 집을 차압 당할 위기에 처한 가누시 부인(로나 라버)입니다. 마음씨 착한 크리스틴은 노파에게 잠시 동정심을 품다가도 출세를 생각하며 상환 기한을 늘려달라는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죠. 그러자 딱할 만큼 처절하게 간청하던 얼굴이 싹 바뀌고, 노파는 크리스틴을 공격하려다가 바깥으로 끌려나갑니다. 찝찝함도 잠시, 상사가 승진 가능성을 어필하자 크리스틴은 금세 웃음을 되찾죠. 하지만 평화는 거기까지, 안타깝게도 영화는 그녀의 편이 아닙니다. 바로 그날 퇴근길 차 안에서 가누시 부인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다가 저주가 내려지게 됩니다. "머잖아 네가 내 앞에서 빌게 될 거다"라는 말을 남긴 채.


크리스틴 브라운의 수난

다정한 남자친구와 행복한 나날을 꿈꾸던 크리스틴은 이 날 이후 지옥 같은 3일을 경험합니다. 죽지 않을 만큼의 개고생이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지죠. 시도때도 없이 악몽이나 환상 속에서 귀신을 마주하는 건 물론 머리끄댕이를 잡히고, 공중에 떠서 사방으로 내쳐지고, 각혈하고, 코피 내뿜고, 토악질과 구더기 세례를 고스란히 입으로 받아내는 등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고난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굴하지 않습니다. 퇴마사를 찾아가 그가 제시하는 황당무계한 방법들을 열심히 수행해봅니다. 과연 그녀는 지옥의 고리를 끊고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드래그 미 투 헬>은 마지막 1분을 위해 그야말로 미친 듯이 내달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박수치며 맞닥뜨리는 화면....

<드래그 미 투 헬> 현장의 샘 레이미.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기에... 매우 흡족한 얼굴입니다.
샘 레이미는 스물셋에 발표한 <이블 데드>(1981)로 단숨에 당대 공포영화의 기수로 떠오른 후 스릴러, 드라마 등의 장르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러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성공시킵니다. <드래그 미 투 헬>이 반가운 이유는 샘 레이미가 단정한 장르영화와 <스파이더맨> 3부작을 만드는 근 18년간 만나지 못했던 그의 재기 넘치는 호러 연출을 다시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블 데드>부터 선명했던 그의 악취미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쉴새 없이 크리스틴을 공포의 순간으로 몰아넣지만 한시도 진지할 틈을 견디지 못하고 유머를 배치하죠. 가누시가 크리스틴을 공격하는 와중, 눈가에 박힌 스테플러 심이 튕겨져 나오거나 썩은 틀니가 왕창 부서지고, 뽑힌 눈알과 시신경이 상대의 얼굴을 덮칩니다. 이쯤 되면 남자친구 부모 앞에서 파리를 뱉는 건 차라리 대수롭지 않아 보이죠. 아마도 샘 레이미는 관객들을 포복절도로 빠트리기 위해 호러라는 외피를 택한 것이 분명합니다.


고스트 하우스 픽처스 로고

이렇게 샘 레이미가 장르 분탕질을 벌일 수 있었던 건 <드래그 미 투 헬>이 그가 운영하는 공포영화 제작사 '고스트 하우스 픽처스'에서 직접 만든 작품이기 때문일 겁니다. 2004년 <그루지>로 문을 연 이래 처음으로 선보이는 연출작이었으니, 중소규모 시스템(<드래그 미 투 헬>의 제작비는 <스파이더맨 3>의 1/9에 불과합니다) 안에서 자유롭게 자기 세계를 펼칠 수 있었죠. 더군다나 그의 곁에 (친형이자) 시나리오 파트너 이반 레이미, 프로듀서 로버트 타퍼트, 편집자 밥 물랍스키 등 오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데이빗 린치의 걸작 <로스트 하이웨이>(1997),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작업한 촬영감독 피터 데밍과의 첫 호흡도 시너지가 컸죠. 아쉽게도 샘 레이미는 다시 거대 스튜디오로 돌아가 디즈니와 함께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2013)을 연출합니다. 총천연색의 극치를 선보이는 싸이키델릭한 비주얼이 돋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샘 레이미적'이라는 틀에서는 합격점은 주긴 망설여지는 작품이었죠. 음... 워낙 3부작을 좋아하는 감독이니 기약 없이 두세 번째 <드래그 미 투 헬>을 기다려볼 수밖에요.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