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

논픽션 <노마드랜드>

<노매드랜드>는 2020년 북미에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 중 하나였다. 2017년 제시카 브루더가 쓴 동명의 논픽션 ‘노마드랜드’를 바탕으로 클로이 자오가 연출한 이 영화는 제77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초연되자마자 극찬을 받으며 주목받았고 당연하게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여성 감독으로선 2010년 소피아 코플라에 이어 두 번째이고, 아시아 출신 여성으론 첫 번째 수상자였다. 이 영광은 해가 바꿔도 반복돼 이어졌다. 골든 글로브에서 1983년 바바라 스트라이젠드 이후 두 번째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라는 기록을 세웠고, 영국 아카데미에서도 2009년 캐서린 비글로우 이후 두 번째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란 타이틀을 가져갔다. 전 세계 각종 시상식에서 90개가 넘는 상을 휩쓸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 탁월한 작가의 등장을 반겼다.


시상식을 휩쓴, 경제 위기 속 등장한 신(新)유랑족들의 영상 백서

평생을 일했지만 집 한 채 가질 수 없는 소외된 계층의 고되고 열악한 삶을 포착하지만, 영화는 연민하거나 감성팔이적 감동을 남발하지 않는다. 어떠한 동정이나 미화 없이, 유랑민의 낭만을 과장하지 않은 채, 리얼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묵묵히 그들의 속내에 귀를 기울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무너져버린 경제 위기 속에 집을 포기하고 자동차를 거주지 삼아 저임금 떠돌이 노동을 연연하는 노년 (여성) 계층을 밀도 있게 따라가는 <노매드랜드>는 정치적 화두와 사회의 어두운 지점을 성토하기보다 이들의 대안적인 삶과 인생에 대한 성찰에 무게를 둔다. 이는 중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 자신의 유랑민적인 모습과도 겹쳐진다. 길에서 만난 이들의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방식의 생존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원작 논픽션의 판권을 사서 제작을 맡은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클로이 자오의 설득으로 책에도 등장했던 린다 메이와 스웽키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며 철저히 노매드의 삶과 여정에 동참했다. 실제로 4~5개월간 밴을 타고 7개주를 이동하며 아마존을 비롯해 여러 일을 경험했고, 이에 실제 프란시스 맥도맨드를 노매드라고 믿은 단체에선 구직활동을 도와주려고까지 했다. 같이 출연한 RTR(러버 트램프 랑데부)의 밥 웰스는 그녀가 직접 밝히기 전까지 할리우드 배우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이런 진심과 열정으로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여러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과 작품상 후보에 동시에 올랐다. 오스카 역사상 제작과 연기로 동시에 후보에 오른 인물은 7명(여성으론 그녀가 최초다)이 더 있지만, 실제 동시 수상한 경우가 없기에 가능성이 높은 이번 오스카 결과가 더욱 주목된다.


안식과 위로를 선사하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음악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노매드랜드>에서 인상적인 건 비단 연출과 연기뿐만이 아니다. 삭막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압도적인 광활함을 뽐내는 대자연 풍경 위로 드리우는 서정적인 피아노의 울림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심금을 울리는 단아하면서 미니멀한 소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현대음악가인 루도비코 에이나디의 솜씨다. 클로이 자오와 프랜시스 맥도맨드는 뛰어난 영화음악가이기도 한 루도비코 에이나디에게 새로운 음악을 요청하기보단 기존에 그가 발표한 음악을 써도 되는지 물었다. 지난 30년간 자연과 여행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음표로 표출해온 대가의 음악은 영화 속 프란시스 맥도맨드를 비롯해 수많은 현재 노매드의 삶과도 겹쳐지는 지점이 있기에 루도비코는 기꺼이 써도 좋다고 승낙했다. 인상적인 대사와 명연기 대신 침묵과 이미지로 길 위의 인생을 스케치하는 영화에 그의 음악은 안식과 위로를 선사한다.

루도비코 에이나디

1955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난 루도비코 에이나디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1948년부터 55년까지 이탈리아 제2대 대통령을 지닌 루이지 에이나디(와인으로도 유명한!)의 손자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외할아버지 왈도 알드로반디의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밀라노 음악원에서 아지오 코르기에서 수학한 후, 이탈리아 근대음악을 이끈 루치아노 베리오와 독일의 전위적인 작곡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를 거치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다져 나간다. 1982년 탱글우드 음악 페스티벌에서 장학금을 받은 계기로 미니멀리즘과 처음 접한 그는 8~90년 발레와 무대극, 영화음악에서 두각을 보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언터처블: 1%의 우정>을 비롯해, <내 눈 속의 빛>과 TV버전 <닥터 지바고>, <겨울 여행>,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등으로 인상 깊은 필모를 쌓았고, 그의 솔로 앨범들은 유럽에서 큰 반향을 얻었다.


루도비코 에이나디의 노매드들을 위한 찬가

<7일간의 산책>(Seven Days Walking)

<7일간의 산책>(Seven Days Walking)

클로이 자오가 <노매드랜드>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활용하는 루도비코의 앨범은 2019년 7달에 걸쳐 1장씩 발표한 총 7장짜리 대작 앨범 <7일간의 산책>(Seven Days Walking)이다. 2018년 이탈리아 알프스를 걸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음악들은 한 장의 앨범이 하루를 상징하고, 같은 길을 7일간 반복해 거닐며 다른 시각으로 같은 풍경을 받아들인 것처럼 동일한 테마가 다른 느낌으로 변주되며 다양한 감정들을 청자에게 환기한다. 이를 위해 루도비코는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찍어 레코딩할 때 음악의 기초가 될 수 있게 활용했으며, 이 자연친화적이고 길 위의 여정을 다루는 음악들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음악을 찾고 있었던 클로이 자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와 <노매드랜드>를 완성할 때 중요한 테마들이 되었다. 특히 첫째 날과 셋째 날 앨범의 곡들(“로우 미스트(Low Mist)”, “골든 버터플라이즈(Golden Butterflies)”)이 영화 속에 삽입됐다.

(왼쪽부터) 2006년 앨범 [Divenire], 2015년 앨범 [Elements]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때론 비올라) 삼중주가 이뤄내는 간결하면서 세련된 변주의 “로우 미스트(Low Mist)”는 영화 속에서 세 차례에 걸쳐 흐르며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성장과 치유에 많은 도움을 준다. 물론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다른 앨범들에서도 선곡됐다. 영화에서 처음 펀(프란시스 맥도맨드)이 RTR 캠프에 참여하러 출발할 때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다시 길을 떠나며 엔드 크레딧까지 이어지는 곡은 그의 2006년 앨범 [Divenire]에 실린 “올트리마레(Oltremare)”의 선율이다. 스웽키와 헤어지고 혼자 여행을 떠나 캠핑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흘러나오는 곡은 2015년 루도비코가 발표한 또 다른 앨범인 [Elements]에 실린 “펫리코어(Petricor)”다.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호프가 피쳐링으로 참여해 격정적인 연주를 선사한다. 아쉽게 영화를 위한 오리지널 곡들이 아니라서 음악상 후보론 오르지 못했지만, 그 어떤 스코어보다 더 딱 맞게 재단된 음악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 떠나는 자들을 위한 노래들

그 외에도 막스 리히터나 같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요절한 영화음악가 요한 요한슨의 선율을 떠올리게 만드는 올라퍼 아르날즈가 발표한 네오 클래식 싱글 “에필로그”도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쓰였다. 앞선 루도비코 에이나디의 선율과도 접점이 느껴지는데, 스웽키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고할 때 그리고 중후반에 펀이 결혼 서약서를 읽을 때 흘러나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차 안에서 펀이 과거 자신의 사진들을 바라볼 때 라디오에서 감미로운 목소리의 냇 킹 콜이 부르는 “앤서 미. 마이 러브(Answer Me, My Love)”가 흘러나와 마음의 안식처를 자처한다. 애초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 곡이었지만 사랑노래로 가사를 바꿔 동시에 히트했던 독특한 배경이 있는 곡이다. 그리고 데이빗 스트라탄의 실제 아들인 테이 스트라탄이 데이브의 아들로 깜짝 출연해 부자가 같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선 잠깐 솜씨가 발휘하기도 한다. 그는 실제 포크록밴드 도스(Dawes)의 키보디스트 출신이다. 사운드트랙엔 이 음악도 포함돼있다.

RTR 행사에서 모닥불에 노매드들이 모여 다같이 흥겹게 부르는 “온 더 로드 어게인(On The Road Again)”은 윌리 넬슨이 부른 컨트리송으로, 1980년 영화 <허니서클 로즈>의 주제가로 오스카 주제가상 후보에 오르고, 그래미 컨트리 부문 상을 거머쥐었던 명곡이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컨트리 가수들의 길의 인생과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를 담고 있는 만큼 영화에서 노매드들의 심정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에 바로 이어 라인 댄스 씬에서 흐르는 건 AOR과 블루스에 잔뼈가 굵은 도니 밀러의 “쿼츠사이트 벤더 블루스(Quartzsite Vendor Blues)”고, 누드(!) 연주자로 알음알음 소문났던(그러나 이 영화에 출연한 후 2019년 75세로 타계한) 폴 위너의 “넥스트 투 더 트랙 블루스(Next To The Track Blues)” 공연도 잠시 맛볼 수 있다. 그리고 클로이 자오의 앞선 두 장편영화 <송스 마이 브라더스 티치 미>와 <로데오 카우보이>에서 모두 노래를 불러 준 캣 클리포드의 “드리프팅 어웨이 아이 고(Drifting Away I Go)”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