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청춘>

‘청춘’이란 단어를 한자로 적어본다. 푸를 청(靑)에 봄 춘(春). 처음 젊음을 푸르른 봄에 비유한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을 향해 첫발을 떼는 젊음의 서툶이, 겨우내 잠자던 나뭇가지마다 푸르게 싹을 틔우는 봄의 광경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퍽 잘 어울리는 비유다. 식물은 싹을 틔우는 순간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명도 지른다지. 사정을 알 리 없는 인간들이 속 편하게 봄의 초록을 즐기는 동안, 식물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싹을 내고 잎을 피워 올리며 비명을 지른다. 젊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미 젊음을 지나 그 감각을 잊어버린 이들은 젊음을 보며 속 편하게 좋을 때라고 말하지만, 그 시기의 푸르름은 대체로 시퍼렇게 든 멍에 가깝다. 가족에 치이고, 불안한 발밑에 흔들리고,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에 속고. 온통 멍이 든 몸뚱아리로 어떻게든 살아남아 세상 속에 제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치는 발버둥이, 멀리서 보면 파릇파릇한 약동처럼 보이기도 하겠다. 가까이에서 보면 엄청난 온도로 타오르며 바스러지는 유성도 멀리서 보면 밤하늘을 지나가는 예쁜 별똥별에 불과한 법이니까.

<오월의 청춘>(KBS. 2021) 속 희태(이도현)와 명희(고민시)의 젊음도 그렇다. 가능하면 세상 설움 따위 다 잊고 살고 싶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속없어 보이는 희태의 웃음 뒤에는 ‘밤무대 가수가 낳은 아비 없는 혼외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내내 손가락질 당했던 과거와, 야만의 시대에 보안부대 보안과장 아들로 살아간다는 수치심, 운동권 친구 경수(권영찬)가 살려 달라고 데려온 경수의 연인, 파업 투쟁 중에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매는 상태로 경수의 등에 업혀 온 석철(김인선)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아른거린다. 뭐든 다 괜찮다는 명희라고 어둠이 없으랴. 말수 적고 무뚝뚝한 아버지(김원해)와는 진작에 사이가 틀어져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고, 제 삶에서 좋았던 부분들은 계란 노른자처럼 너무 작고 여렸기에, 누군가 손을 뻗으면 그 때마다 속절없이 남에게 양보해줘야 했었다. 그렇게 다 양보해주면서도 명희는 속으로 삭인다. 수련(금새록)이도 힘들겠지. 부르주아 집안 딸내미가 시대에 분노한답시고 운동하고 설친다고 친구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진정성을 의심당하는 게 아무래도 속이 상하겠지. 그러니까, 내가 양보해야지. 난 괜찮으니까. 안 그래도 복잡한 가족사와 출신성분, 집안 형편 때문에 온통 시퍼렇게 멍든 희태와 명희의 젊음을 향해, 1980년 5월 광주의 예정된 비극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친구들이 잡혀가고, 다치고, 실종되고, 신군부의 집권 야욕이 노골적으로 본격화되던 시기. 그 가뭇없는 어둠과 좌절 속에서도 대학가요제를, 독일 유학을, 나란히 버스 뒷자리에 앉아 삶은 계란을 나눠 먹는 데이트를 꿈꿨던 희태와 명희의 5월을 상상한다. 그 꿈들은 얼마나 많은 체념과 좌절을 딛고 살아남은 꿈일지 생각한다. 할 수만 있다면 제 출신성분 따위 싹 갈아엎고 싶었을 수련의 고독과, 그런 수련을 변절자로 오해해 더 외로워진 채 기약 없는 투쟁을 계속해 나갔을 수련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원치 않게 강제 입대를 당해 시위를 진압하고 사람을 베고 찌르고 쏘는 훈련을 받아야 했던 경수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아프고 멍든 젊음의 위로 탱크와 헬기를 보냈던 전두환과 신군부를 생각한다. 안 그래도 아픈 시절에, 그나마 살아남은 꿈마저 침묵하게 만든 그들의 만행을 생각한다. 아직도 역사의 심판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조용히 졸고 있는 학살자의 평온한 노년과, 수시로 진정성을 의심당하고 모욕당하는 5월의 광주를 생각한다. 날은 완연히 풀렸어도 세상은 아직 춥고, 그 냉대 속에서 역사를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온 힘으로 피워 올릴 때마다 5월의 광주는 다시 또 푸르게 푸르게 비명을 지른다. 그 아픔이 어찌나 푸른지, 볼 때마다 눈이 시려 눈물이 난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현대사는 1월부터 12월까지 온통 시퍼런 멍투성이다. 1월의 박종철, 2월의 박선영, 3월의 김주열, 4월의 강경대, 5월의 광주, 6월의 박래전, 7월의 이한열, 8월의 김경숙, 9월의 이경해, 10월의 김주익, 11월의 전태일, 12월의 조영래…. 달력 한 장도 편한 마음으로 넘길 수 없는 이 속절 없는 푸르름 속에서, 나는 ‘열사’라는 단어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그들의 젊음을 상상한다. 시대의 어둠과 좌절 속에서도 기어코 몇 개 쯤은 포기하지 못한 채 내심 붙들고 있었을 소소한 행복과 시시콜콜한 꿈들을 상상한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 설움 따위 다 잊은 채 마음껏 웃고 떠들고 꿈꾸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었을, 우리가 오늘을 크게 빚지고야 만 그 과거의 푸른 젊음들을 상상한다. 하나하나 희태 같고 명희 같고 수련 같고 경수 같았을, 그 푸르른 봄들을.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