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빈 (사진 SM C&C ).

배다빈은 밝고 당당했다. 대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자신감으로 꾸밈없이 드러나는 솔직한 모습이 그랬다. 자신의 성격을 따라가듯 그동안 배다빈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늘 ‘역경을 이겨내 돌파하거나 혹은 이겨내지 못함을 인정하거나’하는 또렷한 인물들이었다. 단역 출연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첫 영화의 주역을 맡은 <파이프라인>의 카운터도 마찬가지다. 흙수저 계약직이지만 분명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고,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차갑고 냉철하다. 남성 위주의 도유 범죄 조직에 유일한 여성 캐릭터로 흐릿하게 소모되는 대신 전문성과 사연을 가진 온전한 구성원으로 돋보이는 것은 배다빈이 가진 특유의 선명함 때문이다.

광고모델로 데뷔해 웹드라마 <바나나 액츄얼리 시즌 2>(2016)로 연기에 발을 디딘 후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나쁜형사>(2018)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 등을 거치며 단역부터 주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실력으로 증명해 온 그는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무수한 처음들을 거치며 다져진 경험을 여전히 소중하게 여기는 그를 또 하나의 처음인 영화 <파이프라인> 언론시사 직후 만났다.


배다빈 (사진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리틀빅픽처스).

시나리오 처음 읽었을 때 어땠는지 궁금하다.

처음에 캐스팅을 기대했다기 보다는 감독님의 피드백을 들어보면 앞으로의 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거란 생각으로 오디션에 임했었다. 그런데 막상 캐스팅이 되니 여러 선배들 사이에서 내가 이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앞서더라.

그동안 또래의 모습에 딱 붙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파이프라인>에서는 장르적 역할에 더 충실해 보이지만, 그래도 계약직 사원인 은주(카운터)가 범죄에 가담하는 목적이 탈조선을 위해서다.

맞다. <파이프라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각자 목적과 사연들이 있다. 그중 은주가 가장 현실적이고 자신의 나이대를 대변하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또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감독님도 마찬가지로 이런 고민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남성 위주의 도유팀 구성에 유일한 여성 팀원이다. 다행히 조력자에 머물지 않고 전문성을 가진 구성원으로 역할을 수행한다.

그동안 감독님 작품 속의 여성들과는 조금 다른 캐릭터라 생각했다. 좀 더 주체적이고 뒤로 물러나 있기보다는 해야 할 말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인물이다. 차갑고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 집중했다.

캐릭터와 관련해서 유하 감독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캐스팅되었을 때 감독님께서 내게 해준 말씀이 기억난다. 내 분위기와 느낌이 카운터 역할과 잘 어울린다고 하시며 느낌을 그대로 가져가되 자신만의 색깔을 전부 버리지는 말하고 하셨다. 그러면서 예민하고 날카롭지만, 삶에 찌든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는 노력을 또 부탁하셨다.

액션 장면 촬영은 어땠나.

내가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져서 그런지 작품마다 예상치 않게 액션신이 항상 주어지더라. (웃음) <파이프라인>은 대본에 액션에 대한 묘사가 살짝 되어있긴 했지만, 감독님이 이제 옛날 작품들처럼 남성이 여성을 구해주는 모습보다 자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여성 캐릭터를 그려 줬으면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래서 액션팀과 상의해 최대한 어설프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캐릭터 구축을 위해 참고한 작품이 있다면.

감독님이 여러 작품들을 얘기해주시긴 했다. 하지만 그 배우를 참고해서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것보다는 그 배우의 분위기를 많이 참고하라고 말씀하셨다. <화양연화>(2000)의 장만옥이나 <강남 1970>(2015)의 김지수 선배님 같은 분위기 말이다.

유하 감독이 배다빈을 왜 캐스팅했는지 말해주던가.

처음 미팅하고 얘기 나누는데 감독님이 대본 가지고 가라 하셨다. 제가 그 자리에서 “캐스팅 된 건가요?”라고 여쭤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감독님이 해주신 말씀이 그냥 카운터는 다빈이가 하면 될 것 같다는 거였다. 그리곤 현장에서 촬영하며 다시 여쭤봤다. 그게 무슨 말이셨냐고. 그때 들은 말은 배우 배다빈이 가지고 있는 밝고 건강한 에너지가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생각했던 그 느낌이 아니어도 충분히 그 역할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더라.

그전에 배다빈 배우가 출연한 작품들을 보셨나보다.

아니다. 유하 감독님은 드라마를 많이 보시는 편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란 배우를 미팅에서 처음 보셨다고 했다. 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오디션을 보신 거다. 그래서인지 촬영에 들어간 후엔 이런저런 것들을 자주 물어봐 주셨다. 이런 의상은 어떤지 이런 연기톤은 어떤지. 마치 하얀 도화지에 처음 무언가를 그려 넣는 것처럼 다양한 기회를 많이 주셔서 감사했다.

현장에서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내가 후반에 캐스팅되어 처음에 긴장을 많이 했다. 걱정이 많아서 잘 어울려야지 하는 것보다는 빨리빨리 준비하기 바빴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은 촬영한 결과를 매번 보여주시고 오늘은 이렇게 찍었고 이렇게 나왔으니 다음엔 이렇게 해보자 이런 말씀을 해주시곤 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고마우면서도 또 고민도 많이 되더라. 그렇게 있다 보면 서인국 오빠나 이수혁 오빠가 오늘 어땠냐 어떤 게 아쉬웠냐 물어봐 주시고,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도 다음에 이렇게 해보면 좋겠다며 격려도 많이 해주셨다. 모니터 보시고 내가 봤을 때는 괜찮았다고 위로도 해주시고 하셔서 언제나 힘이 됐다. 배유람 오빠는 이전에 두 작품에서 만나 인연이 있는데 리딩에서 만났을 때 나를 보시더니 “아!” 하며 한숨을 쉬시는 거다. 굉장히 실망했다고. 왜 항상 유일한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에는 너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막 웃으셨다. 이번에도 잘해보자며 하신 그 농담이 너무 반갑더라. (일동 웃음)

광고모델로도 다양하게 얼굴을 비췄다. CF를 찍으며 연기에 많은 도움도 되었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연기자를 목표로 했나.

처음부터 연기를 목표로 하진 않았다. 본가가 해외에 있고 내가 6남매의 장녀다 보니 동생들과 부모님을 도와드리기 위한 삶을 어릴 때부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오직 내게 집중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무작정 한국으로 오게 됐다. 처음에는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주어져서 광고모델로 데뷔를 했다. 광고모델 일을 하는 동안 광고도 짧은 순간의 호흡이지만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잘하고 싶었다. 돈을 받고 하는 거니까 내가 충분히 보답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연기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도 항상 연기라는 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가 고민하기도 했다. 이렇게 혼자 오디션을 보러 다니다가 운 좋게 작품을 하게 되면서 연기하는 게 행복한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좋은 소속사를 만나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게 됐다.

배다빈 (사진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리틀빅픽처스).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나.

항상 물어봐 주실 때마다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은데. 지금 이십대 후반의 내가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목표는 여전히 믿음직스러운 배우가 되었으면 하는 거다. 사람들이 내 연기에 공감해주고 또 내 연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 맡은 일을 잘하는 배우 또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혼자 한국에 나왔을 땐 가족들의 걱정이 심했을 것 같다.

한국에 가겠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조건이 몇 개 있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3학년 때 장학금을 받거나, 한국에서 먹고 살 수 있게 영어 강사 자격증을 따는 것,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그걸 다 해냈다. 계획서도 보여드렸고, 그렇게 허락을 받아 오게 된 거다. 뉴질랜드에서 가족들과 바글거리며 살다가 정말 혼자가 되어 버리니까 부모님도 걱정과 속상함이 있으셨던 것 같다. 나름 건강하게 살을 뺐는데 왜 이렇게 말랐냐고 하시고. (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광고 모델이 돼서 TV에도 나오고 또 한국에 부모님이 오셨을 때 거리 어딘가에 내 모습이 걸려있고 그러다 보니 이젠 걱정보다는 응원을 많이 해 주신다. 그러다가도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된다고 하시고. (웃음)

단역부터 시작해 조연 주연까지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왔다.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캐릭터가 있다면.

아직 너무 짧은 시간 연기를 해서 말하기 부끄럽지만, <파이프라인> 찍으면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운 것 같다. 그전엔 드라마만 했었고 또래 배우들과만 작업을 해와서 선배님들과 소통할 기회가 적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할 때는 나를 빼고 모두 선배님들이셔서 연기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웠다. 영화 촬영할 때는 항상 같이 있지 않나. 그걸 처음 경험해봤다. 내 신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대본에 대해서 정말 하루종일 이야기하고, 찍고 나서도 찍은 장면에 대해 또 이야기하고. 배우로서 연기와 현장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배운 게 너무 많아 <파이프라인> 후에 만난 작품들을 할 때는 조금 더 자신감과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다.

SBS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

그동안 역할 중 어떤 역할이 본인의 성격과 가장 비슷한가.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했던 모든 작품, 모든 인물들의 일부가 다 나를 담고 있는 것 같더라. 캐릭터는 내가 연기 하는 거고 내가 책임을 지는 거니까. 감독님과 작가님이 만들어 낸 인물들 안에 나와 비슷한 뭔가가 있기 때문에 나를 사용한 것 아니겠나. 그 비슷한 부분을 극대화하려 했다. 그런데도 가장 연기하기 편했던 역할을 생각해보면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민성이다.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하고 뭐든 끝을 봐야 하고, 누가 뭐래도 내가 좋으면 좋은 것, 친구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나와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이후 숏컷을 유지 중이다.

광고모델 일을 하다 보니까 긴 머리가 필요해서 별 생각 없이 계속 기르고 있었는데,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으로 매체에 데뷔할 때 감독님이 한번 잘라보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머리카락보다 캐릭터가 중요했기 때문에 작품에 출연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자르고 갔다. (웃음) 감독님이 그거 보시고는 너무 좋다 하시고 이대로 한번 가보자 하셔서 처음으로 숏컷을 하게 됐다. 근데 이후에 조금 기르면 다른 작품 감독님이 자르는 게 어떠냐 권하셔서. 내가 했던 역할이 대부분 털털한 친구여서 그런지 계속 자르고 있다. (웃음)

배다빈 (사진 SM C&C ).

작품을 고르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면.

내가 아직 들어온 작품을 고르는 위치는 아니지만 (웃음) 그래도 “이게 좋아요. 이 작품 너무너무 하고 싶어요” 하는 역할들을 보면 전부 자기만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다. 어떤 역경을 이겨내거나 혹은 이겨내지 못함을 인정하거나 하는 당찬 역할 말이다. 연기를 통해 더 나은 연기자로 또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작품이 늘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관객들께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또 그것을 알기 때문에 시도해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뭔가 잘하려고만 한 게 아니라 나 이런 것 아직 잘 못하지만 한번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임했다. <파이프라인>은 내겐 제대로 된 첫 영화다. 내 성장 기록의 첫 페이지에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글 · 씨네플레이 심규한 기자

사진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리틀빅빅처스, SM C&C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