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이 배우가 못하는 게 뭘까 싶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건 당연한 걸지 몰라도, 중후한 캐릭터 연기나 주접에 가까운 코미디 연기, 하물며 일에 지친 직장인의 일상까지 완벽하게 연기한다면 그 배우에게 신뢰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 어떤 작품에서도 이 배우의 연기만은 반드시 빛나리라는 믿음.
그런 전방위적인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배우 이성민이 <제8일의 밤>의 진수 역으로 돌아왔다. 진수는 '선화'라는 법명을 가졌던 전직 승려로 청년 승려 청석(남다름)과 함께 '깨어나지 말아야 할 것'을 막아야 한다. 영화의 40분 지점에서야 처음 입을 여는 비밀스러운 인물이지만, 이성민은 진수의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 영화의 신묘함을 살렸다. 이성민은 어떻게 진수를, <제8일의 밤>을 만나게 됐을까. 영화 공개를 앞둔 6월 28일, 배우 이성민과 나눈 대화를 옮긴다.
이번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떤 부분이 인상적이었나.
지금도 생각난다. 대본을 받았을 때 표지 제목 밑에 금강경 구절이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어 뭐지?’ 이랬다. 왜냐하면 그 무렵 내가 정말 수박 겉핥기지만 입자물리학, 양자역학, 이런 걸 관심 있게 볼 때였다. 소위 말하는 거시세계, 미시세계, 이런 얘기도 듣고 물리학 강의를 통해서 우리가 본다는 게 뭔가, 원자, 전자, 파동이냐, 입자냐... 그러다가 현대 양자역학이 불교의 이론과 맞닿는 점이 있다는 이야기도 알게 됐다. 금강경 강의도 듣던 찰나였다. 그 무렵에 <제8일의 밤> 제목 밑에 금강경 구절이 있는 걸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내용도 궁금하던 그런 내용이었다. 내가 볼 때 이 영화가 매력적인 지점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있으면 미시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이렇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고, (김태형)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 중국집에서 만났는데 시나리오 얘기를 안 하고 몇 시간을 그런 얘기를 했다. 입자물리학이나 우주 같은 얘기.
원래 종교가 불교인가?
아니다, 가톨릭 영세를 받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경전이나 그런 걸 잘 알지 못한다. 입자물리학 강의 (불교와) 맞는 부분이 있고, 성철 스님도 양자역학 얘기를 한 적 있다. 우리가 결국 원자로 이뤄진 사람인데, 죽는다는 것은 입자로 돌아간다는 건데 이게 떠돌다가 어느 입자에 만날 수도 있고…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일 수도 있겠다 상상을 한 거지,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도 진수란 캐릭터가 천도되지 못하고 헤매는 죽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을 잘 달래서 좋은 데로 보내는 역할인데 그런 지점이 매력이 있었던 거 같다. 그런 캐릭터를 하는 것도 재밌겠구나 (싶었다).
진수 역은 전직 스님으로 나온다.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준비했나.
스님을 만났었다. 감독님도 이 시나리오를 스님에게 자문을 구해서 썼다. 그 스님을 만나서 준비를 했다. 특별한 의식은 없었고 여러 가지 주문, 그런 건 스님들이 참고해 주셨다. 우리가 익혀야 할 것들은 없었다. 극 중에선 (진수의 종파가) 정통 불교보다 마이너한 곳이기 때문에(웃음) 전직 스님이라 뭐 해야 하는 건 없었다. 머리를 적당히 짧게 자르고, 의상도 승복을 개량한 듯한 그런 의상을 입고 다니면서 이 사람의 전직이 그랬다는 정도로 끝났다.
영화를 보면 첫 대사가 굉장히 늦다. 시나리오 봤을 땐 어땠나.
좋았다(웃음).
남다름 배우와 만난 이후로 대사가 많아지는데, 남다름과는 어떻게 연기 호흡을 맞췄나?
실제로는 내가 쟤(남다름)한테 재롱을 많이 떨었다. 나이에 비해 점잖은 아이다. 내가 볼 때는 아들 같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이에 맞게 놀고 밝았으면 좋겠는데 너무 점잖아서 내가 재롱을 많이 떨고 장난을 많이 쳤던 거 같다(웃음). 남다름이란 아이 속에 감춰진 원래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을 끄집어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내가 볼 땐 영화에선 그런 게 잘 나왔다. 우리 영화에서 가장 성공한 캐릭터는 남다름이라고 생각한다. 다름이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더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줬다. 후반에 갈등하는 그 모습은 굉장히 매력적이었었고 심지어는 같이 본 애는 '섹시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아역을 하다가 남자배우로 가는 밑거름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초반에 귀엽게 나오는 건 끄집어낸다고 힘들었다(웃음). 후반에는 (남다름의 그런 부분이) 트여가지고 웃겨서 연기를 못한 부분도 있다.
박해준 배우와의 장면들은 어땠나.
별로 만나지 않았으니까(웃음) 몸싸움 한 번 하는 정도였다. '생각보다 걸음이 느리구나'. 내가 쟤(박해준)한테 속도를 맞췄다. 못 따라오더라. 그래서 걸음을 늦췄다. 아쉬운 건 다음에 제대로 만나고 싶은데 이번 영화에서 많이 못 만나서 아쉽다. (김)동영이도 마찬가지고.
김태형 감독이 시나리오도 직접 썼다. 현장에선 어떤 스타일이었나.
요즘 젊은 신인 감독들이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없겠지만, (김태형 감독은) 이 시나리오를 준비하기 위해서 책을 몇백 권인가 읽었다는데 준비도 철저하게 했었고, 콘티도 굉장히 섬세하게 그렸더라. 촬영 때도 정말 콘티에 맞게 영화를 찍더라. 신인감독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확신을 가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평소 소통할 때도 디렉션이 명쾌하다고 해야 할까. 앞으로 다른 영화도 꾸준히 하면서 좋은 감독이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장에 기이한 일은 없었나? 이런 영화는 그런 일이 있곤 하는데.
없었다. 고사 날 스님이 와서 다 기도해주셔서(웃음). 일반적인 고사를 지내는 게 아니라 특이한 광경이었다. 스님이 그런 걸 다 막아주셨다고 믿는다. 사고도 없었고. 제가 없을 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얘기를 들은 게 없다.
개인적으로 <제8일의 밤>에서 무협지적 이미지를 느꼈다.
그게 아마 의도된 것일 것이다. 프리비주얼할 때 자료들이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은 감독님이 거의 흑백에 가까운 영화를 의도했다. 그게 아마 이렇게는 안 되겠다 해서 이렇게 됐는데, (지금도) 전체적으로 콘트라스트가 있다. 처음엔 흑백에 가까운... <씬 시티>? 전 그런 (영화를) 상상을 했다. 또 사물들이 움직임보다 정적으로 있는 앵글이 많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촬영감독하고 감독하고 의도한 그림일 것이다.
본인은 무협지 같은 장르소설 많이 읽는 편인가?
책을 별로 많이 안 읽어서(웃음). 소설보다는 물리책이나 과학책을 많이 읽었다.
주연급 배우 중에서 다작을 하는 편이다. 연기가 좋아서, 현장이 좋아서, 일이라서, 어느 쪽에 가까운가?
일이니까는 아니고. 현장이 더 좋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전부는 아니고. 늘 이렇게 좋은 작품, 새로운 작품 만나면 자극을 받는 것 같다. 호기심도 느끼고. 잘하고 싶고(웃음). 그런 것들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 같고. 어떤 건 거절을 잘 못해서…(웃음).
사람끼리 하는 일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살아보니까 이렇게 되기까지 신세 진 사람이 많더라. 그런 분들이 부탁하면 거절도 못 하고. 그런데 관객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다작)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다. 많이 한다고 내 이미지를 생각하거나 하진 않는다. 작품 선택할 때 인연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문 경우이고 작품 선택할 때는 캐릭터에 대한 변화가 있어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담은 그렇게 크지 않다. 캐릭터가 겹치거나 그러면 조심스럽게 한다.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뛰어난 것과 내가 연기할 캐릭터가 좋은 것, 어느 쪽을 선택하나.
시나리오가 우선이다.
그럼 최근 시나리오가 좋아서 고른 경우가 있나?
음. 글쎄. 하지만 시나리오가 너무 좋은데 캐릭터가 나랑 안 맞아서 거절한 경우는 있다. 어떤 건지 말할 순 없다. 이건 나보다 다른 배우가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안 한 경우가 몇 개 있다. (그중) 잘 된 거 많다. 어떤 경우는 이 시나리오가 너무 좋은데 이 역할은 못 하겠고 그보다 더 적은 역할인데 이걸 하겠다고 한 경우도 있다. 처음 받은 역할은 내가 하는 게 비효율적이다 생각했다.
보통 이성민 하면 최만리(<대왕 세종>), 설준석(<파스타>), 고재학(<브레인>), 최인혁(<골든 타임>), 오상식(<미생>) 다섯 캐릭터를 떠올린다. 혹시 이 캐릭터는 내게 와서 다행이다 싶은 캐릭터는?
그런 캐릭터는 많다. 어느 날 돌아보니까... 시상식에서 ‘내가 어쩌다가 여기 와있지?’이란 생각을 했다(웃음). 해준이, 옛날에 연극할 때 상우(박해준의 본명은 박상우다)였는데, 그때만 해도 우린 미래가 없었다. 당장 다음 달에 가스비를 내고 애 유치원비를 내야 하는 그런 현실밖에 없다. 턱시도를 입고 시상식장에 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인생이 바뀌어서 그런 자리에 와있었다. 그 어느 날부터, 연기를 시작하겠다고 고향에서 처음 극단 문을 두드릴 때부터 전화를 받은 그 누나가 아니었으면 저는 거길 가지 않았을 거다.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저같이 소심하고 숫기 없는 아이가 전화했는데 전화 받는 누나가 조금만 싸늘했어도 전 안 갔을 거다. 그 누나가 적극적으로 했으니까 간 거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느 날 대구의 유명한 연출가가 왔길래 그분을 쫓아가 거기 있다가 쫓겨나고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랑 만나서 싸우기도 하고... 이런 작용들이 있었다. 감히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에 돌아보니까 20살부터 50대 중반, 저를 거꾸로 따라가니까 그날 그 자리에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없는 거다. 그날 그 사람과 싸우지 않았다면, 미움을 받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아,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이 작품에도 있다. 공연 보러 온 PD가 이 역할을 해보겠냐 해서 우연히 했는데 그게 새끼를 쳐서 누군가가 보고 또 작품이 이어진 거다. 그러다 코미디를 하는 배우가 됐다. 그러다 <골든 타임>… 그 당시에 캐스팅 제의가 두 개 왔다. 사극하고 <골든 타임>. 둘이 극과 극인 캐릭터였다. 날 바라보는 연출자가 이런 시선이 있고, 저런 시선이 있는데, 나를 새롭게 바라봐 주는 연출자가 없었으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다. 그렇게 새롭게 바라봐 주고 제가 매체 배우로서 전환이 됐던 경우는 <골든 타임>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미생>이 이어지고, <골든 타임>으로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에 나오게 되고. <군도> 때도 윤종빈 감독이 의아했었다. ‘아니, 대한민국에 카리스마가 있는 배우가 얼마나 많은데 날 도적의 두목으로 캐스팅한다고? 이 사람 무슨 생각으로?’ 그런데 이렇게 나를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큰 터닝포인트들이 됐다. 그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골든 타임>이었던 거 같다.
<군도> 얘기가 나온 김에, 거기서 '목민심서'를 읽는 오프닝을 좋아한다. 목소리가 정말 좋다. 이번 <제8일의 밤>에도 내레이션이 나오는 후반부가 정말 좋았다.
결국 이 영화가 오컬트라는 뼈대를 가지고 있지만 안에는 다른 얘기가 흐른다. 그 플롯을 보는 재미가 있다. 내가 나를 어둠 속으로 가두고 살았구나, 그걸 금강으로 팍 깬 건다. 그리고 해탈한 거다. 모든 건 자기 마음에 있는 거다. 이 영화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런 점에서 불교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 메시지다.
최근 자주 듣는 음악은?
이은하 씨 노래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론 본 적이 없지만, 몸이 안 좋으셔서 TV에 나올 때 마음이 무척 안 좋았었다. 노래가 좋다. 김연자 씨의 '영동부르스'도 차에서 들었다. 그렇다고 요즘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 그런 노래는 듣지 않는다. 요즘 비가 많이 와서 장혜진 노래 <雨>도 듣는다. 우리 20대 정서가 살아있는. 내 플레이리스트는 내가 운전할 때 듣는 음악이다. 집사람이나 딸이 타면 못 들어서(웃음) 유일하게 혼자 운전할 때 크게 듣는다.
사심을 담은 질문을 하자면, 다시 연극을 할 생각은 없나?
전혀 없진 않다. 조금 더 여유가 있으면 해볼 거다. 일정이 잡힌 것들이 있어서... 연극은 그 무엇보다 절대 시간을 필요한 것이라서.
<공작>에 같이 출연한 황정민 배우도 공연을 했었다.
정말 존경했다. 어떻게 저런 에너지가... 내가 볼 때 그의 작업은 자신을 재정비하는 느낌도 들어서 존경스러웠다. 나는 연극을 오랜만에 하면 해독? 디톡스? 도수, 이런 느낌이다. 재정비가 되는 느낌이다. 관객들의 기운도 받을 수 있고. <공작> 전까진 했었는데... <공작> 시나리오도 공연 끝나고 받았었다.
넷플릭스 추천작을 뽑자면?
<어둠 속으로>. 미드를 그렇게 보는 편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것도 일이다. 좋은 영화나 좋은 연기를 보면 하... 자괴감이 많이 든다. 유명한 것보다 숨겨진 것 찾아보는 편인데 재밌었다. <버드박스>도 그렇고. <익스트랙션>도 재밌었다. 부산 가거나 KTX 탈 때 미리 받아놔서 보면 시간이 잘 간다. <킹덤>은 부산 내려가면서 되는대로 다 봤다.
넷플릭스 시청자들에게 <제8일의 밤>의 포인트를 소개해달라.
<제8일의 밤>은 장르 영화로도 볼 수 있지만, 숨어있는 사연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보는 분들의 관전 포인트가 됐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 준비하고 완성했는데 관객을 만나기 전에 이런 안 좋은 코로나 사태에 관객들을 못 만나고 있는 영화가 많다. 우리 영화도 그럴 뻔했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관객분들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국내 개봉과는 다르게 전 세계 관객들을 만나는 설렘이 있다. 우리 영화가 동양적인 소재의 철학을 담고 있어서 서양 관객들에게 더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가지 않을까 한다. 넷플릭스에서 <제8일의 밤> 많은 시청 바란다.
글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
사진 넷플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