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번째 007이 돌아왔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은퇴작으로 알려진 <노 타임 투 다이>는 여섯 차례에 걸친 개봉연기 끝에 거의 2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제작 초반부터 난항을 겪은 프로젝트였다. 은퇴하겠다던 다니엘 크레이그를 설득해 간신히 출연을 성사시키며 고난(!)의 역사에 올라탄 이 영화는 대니 보일이 연출을 맡기로 했다가 하차하며 시간이 지체됐고, 촬영 중 다니엘 크레이그가 발목 부상을 입고 스튜디오에서 폭발사고가 터져 또 쉬어야 했으며, 코로나19로 가장 먼저 개봉 연기를 선언한 할리우드 영화에다, 연기된 상황에서 공동제작사인 MGM이 아마존에 매각되며 온라인 공개로 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결국 제작비는 역대 최고인 3억 달러 가까이 치솟았고, 겨우 이번 10월에 이르러서야 유니버설 배급으로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캐리 조지 후쿠나가가 연출을 맡아 역대 최장인 163분의 상영시간을 자랑하는 <노 타임 투 타이>는 지난 15년간 6대 007 다니엘 크레이그 시절을 총결산하는 작품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은 독특하게 이전의 숀 코네리나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와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 시절과 달리 선형적인 이야기로 각 편마다 느슨하게 이어지는 특징을 보인다. 좌충우돌 새내기 요원으로부터 점차 발전해 여러 악당들을 거쳐, 숙적 블로펠드와 그가 속한 거대 흑막인 스펙터와 대적하고, 사랑하는 여인도 만나고 헤어지며 베테랑 요원으로 성장하는 큰 줄기를 따라가는데, 그 성장담은 기존 시리즈와는 차별점을 지니며 썩 다른 재미와 감흥을 전달했다. 지난 9월 29일 국내 개봉을 세계 최초로 시작해 전 세계에서 개봉을 단행했으며, 10월 비수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직 중국 개봉도 안 했음에도) 3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한스 짐머는 죽을 시간이 없다!

댄 로머

프리 작업부터 여러모로 말이 많았던 화제작답게 후반을 진행하던 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코로나19로 연기되기 직전, 개봉을 앞두고 2020년 1월 음악이 전격적으로 교체된 것이다. 애초 음악을 맡기로 한 건 캐리 후쿠나가 감독과 <비스트 오브 노 네이션>과 미드 <매니악>을 함께 한 댄 로머였다. 하지만 그가 (상투적이지만 만능 답변에 가까운) 창작적 견해 차이로 인해 하차하고, 믿음직한 구원 투수로 한스 짐머가 투입됐다. 이게 굉장히 의아했던 건 <탑건: 매버릭>과 <듄>, <원더우먼 1984>, <힐빌리의 노래>, <스폰지 밥 무비: 핑핑이 구출 대작전> 그리고 유럽에서 펼쳐질 라이브 공연 등으로 스케줄이 너무나 빡빡하게 들어찼던 짐머가 (당시에는 이리 밀릴 줄 예상 못 했겠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을 거절할 정도였는데 새 작업을 덜컥 맡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만큼 007 음악이 지닌 매력이 크다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한스 짐머

007 프랜차이즈가 장장 60년 가까이 지속해오며 후반 작업에서 음악이 교체된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리즈 내 음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높은 관계로 댄 로머의 낮은 지명도와 제임스 본드 음악에선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 배리의 존재감으로 인한 부담감이 겹쳐져 제작진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 세계 두 명뿐인 PEGOT에 빛나는 마빈 햄리시와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 <록키>의 신화 빌 콘티와 1980∼1990년대 액션 장인인 마이클 케이먼, 뤽 베송의 파트너 에릭 세라, 미국 영화음악의 후예 토마스 뉴먼 등 내로라하는 당대 베테랑과 실력파 작곡가들이 007에 투입됐지만, 그들 모두 11편을 담당한 존 배리를 극복할 순 없었다. 그나마 데이비드 아놀드만이 5편을 맡아 가장 ‘포스트 존 배리’에 다가간 본드 사운드를 들려줬을 뿐이다. 한스 짐머의 중책도 ‘짐머레스크’라 불리며 하나의 조류가 된 자신의 스타일을 이런 존 배리와 어떻게 절충시키느냐에 달렸다.


되살아난 <007과 여왕>과 전통의 본드 사운드

<007과 여왕>

일단 짐머의 선택은 전통에 대한 예의가 앞선다. 영화 자체가 <007과 여왕>에 큰 빚을 지고 있듯,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루이 암스트롱이 그 영화에서 불렀던 존 배리가 만든 주제가 ‘위 해브 올 더 타임 인 더 월드’(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의 주요한 모티브를 고스란히 가져왔다. 그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선율이 중간중간 녹아 흐르며 이번 제임스 본드의 진실한(!) 사랑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런 이색적인 모습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면죄부를 요구하듯 깔린다. 주제가뿐만 아니라 <007과 여왕>의 메인 테마도 노골적으로 인용하며 관계성을 강화시켰다. 아울러 (후술하겠지만) 빌리 아이리시와 오빠 피니어스 오코넬이 작업한 동명의 주제가 또한 주요한 테마로 활용되며 이번 제임스 본드의 죽을 시간조차 없을 만큼 고된 앞날을 예견하듯 곳곳에 산재돼 흐른다. 이런 방식 자체는 존 배리가 프랜차이즈 내내 반복했던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자 미션으로 한스 짐머 역시 충실히 이행해간다.

전 세계 방방곡곡 악당의 흔적을 뒤쫓으며 이국적인 풍경의 로케에 맞춰 본드걸과 사랑을 나누는 낭만적인 모험담의 음악을 들려주던 존 배리처럼 짐머 역시 초중반까지는 전형적이고 익숙한 본드 스타일의 스코어를 모범적으로 흉내 낸다. 이미 데이비드 아놀드가 <네버 다이>부터 <퀀텀 오브 솔러스>까지 탄탄하게 다져놓은 현대화된 길을 착실히 밟으며 조니 마가 연주하는 낭창낭창한 일렉 기타와 재지(Jazzy)하게 울부짖는 혼과 브라스 섹션, 감성적인 파고의 스트링 등 큰 스케일의 관현악이 일렉트릭 효과와 런던 보이스와 만나 들려주는 <노 타임 투 다이>의 음악은 한스 짐머판 ‘골드 핑거’를 표방한다. 짐머라는 이름값에 비하면 아주 놀랍고 탁월한 결과물은 아니지만, 개봉까지 3개월을 남겨둔 상태에서 급히 대타로 투입돼 이뤄낸 성취로선 나쁘지 않다. 특히나 쿠바에서 스패니쉬 기타와 라틴풍 브라스를 폭발 시켜 들려주는 액션 스코어는 가히 명불허전. 데이비드 아놀드 이후 최상의 본드 액션 큐라 할 만하다.


짐머만의 007 음악,

그리고 최연소 주제가를 맡은 빌리 아이리시

하지만 영화의 후반 사틴의 본거지로 들어간 상황에 이르러선 더 이상 존 배리의 색채를 유지하지 않고 한스 짐머 본연의 사운드로 회귀하고 만다. 고색창연하고 전통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은 휘발된 채, 시종일관 잿빛의 반복적으로 약동하며 점층과 점강을 통한 오스티나토가 전달하는 박력과 스릴은 마치 <다크 나이트> 삼부작이나 <피스메이커>, <덩케르크> 등을 연상케 하는 액션 스코어링에 가깝다. 그 속에 촘촘히 박힌 주제가 선율과 파편화된 몬티 노먼의 상징적인 테마가 간간이 인지되며 이것이 007 영화였음을 환기시킨다. 이는 이번 <노 타임 투 다이>가 기존의 제임스 본드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결말과 색채를 전달할 것임을 짐작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끝에 이르러선 <씬 레드 라인>과 <인셉션>의 ‘타임’(Time)을 연상케 하는 곡조가 깔리며 고별사를 전한다. 프랜차이즈 내에서 처음 시도한 결과였기에 짐머는 존 배리의 전통을 고수하기보다 자신의 색채를 드러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팬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되겠지만, 한스 짐머는 전통에 대한 예우와 자신의 스타일을 양립하며 최대한의 조화를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다. 주제가를 맡은 빌리 아이리시는 아직 스무 살이 채 안 된(발표 당시 18살이었다!) 007 역사상 가장 어린 보컬리스트로 기록됐다. 현재 가장 핫한 싱어송라이터답게 그녀는 이번 제임스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를 위한 헌사와 같은 동명의 주제가를 선사했다. 아델과 샘 스미스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애수와 고뇌가 진득이 담긴 허스키한 울림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007에 대입해 독특한 분위기를 들려준다. 재밌게도 주제가가 공개된 후 영화 개봉이 1년 넘게 밀리며, 영화는 안 봤지만 이미 다 아는 노래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빌보드 싱글 차트 16위,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하고 제63회 그래미에서 주제가상 부문을 수상하는 기염까지 토한다. 아마도 영화가 개봉하며 다시 차트에 재진입할 것으로 기대된다.


제임스 본드는 다시 돌아온다, 음악과 함께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렇게 떠났어도, 공동제작사 MGM이 아마존에 매각되어도, 시대가 바꿔 여성과 유색인종이 살인번호 007을 물려받아도, 이 60년 전통의 프랜차이즈는 엔딩 크레딧에 “제임스 본드는 다시 돌아온다”(James Bond Will Return)라는 표현을 잊지 않았다. 그간의 세월을 돌이켜봐도 최장 6년 안에는 새로운 7대 제임스 본드와의 도전을 즐기는 감독과 함께 26번째 007이 돌아올 것이다. 또 어떤 가수가 주제가를 부를지, 마에스트로 존 배리의 적통을 이어받을 본드 작곡가는 누가 될 건지도 호기심을 자아낼 게 분명하다. 그것이 007의 숙명이자 제임스 본드의 질긴 생명력이니까.


사운트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