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7∼80년대 극장가에 권격영화 일명 ‘짠짠바라’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까까머리 중·고등학생들에게 당시 엄청난 열풍이었죠.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입고 나온 그 노랑 츄리닝을 구해볼까 시장을 온통 뒤지고들 다녔으니 말입니다. (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흰 츄리닝을 노랗게 물들이고들 다녔지만) 본인도 재개봉관을 전전하며 한동안 권격영화에 푹 빠져 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런 영화들을 통칭하는 단어는 ‘홍콩무협영화’ 이었습니다. 언론이든 광고든 ‘홍콩’이라는 국적을 죄다 앞에 붙이다 보니 감독이든 배우든 로케든 다 홍콩 사람이고 거기가 홍콩인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안 것은 영화판에 들어와서였죠. 어쩐지 소림 뭐시기 하는 영화에 나온 절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경주 불국사였고, 묵묵히 아무 말도 안 하고 무게만 잡고 액션만 해서 이상하다 했더니 그분은 중국어(광동어)가 안 되시는 한국배우였고. (그뿐만 아니라 다시 보니 거기 나온 단역배우가 다름 아닌 성룡이더라고요) 그랬던 이유는 홍콩은 촬영장소가 한정적이고 중국 대륙은 개방 전이라 촬영자체가 불가한 데다 한국홍콩합작영화라고 포장이 되면 국내 수입에 있어 규제를 피할 수가 있어서 한국배우를 캐스팅했다고 하더라고요. 더 뜻밖은 내가 봤던 <철인>(<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국내 개봉 시 제목)이라는 홍콩영화의 감독이 한국감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창화 감독! 누구지?그 영화 보긴 했는데, 별로였는데? 그런데 자료를 찾다 충격을 받습니다. 너무 의외였습니다.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1973년 북미에서 개봉되어 박스오피스 1위를 합니다.

'영화가 완성되고 나서 처음에 미국의 콜럼비아와 워너 브러더스가 배급권을 놓고 경합을 했다. 결과는 워너 브러더스를 통해 미국 전역에 개봉이 되면서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하게 되었다. (중략) <포세이돈 어드벤처> <사운드 오브 뮤직> 등과 동시 개봉되었지만 흥행에서 앞서가게 됨으로써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국일보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2011년) 1~26화 중에서)

이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킬빌>에서 오마주를 합니다.

한국TV의 '스펀지'라는 프로그램에서 <킬빌>을 만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나를 찾아와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오마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지만 그건 과장된 얘기다. 다만 타란티노 쪽에서 연락이 와서 (장면을) 좀 이용하겠다고 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으니 해봐라‘라고 했을 뿐이다.'(한국일보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2011년) 1~26화 중에서)

IMDb를 검색해보니 이 영화에 대해, ‘미국에서 쿵푸영화 열풍을 일으킨 영화‘ ’총 없이 싸우는 서부극‘이라며 IMDb등급이 7.1로 높았으며, 로튼 토마토 지수도 매우 신선함에 해당하는 80%를 받고 있습니다.

정창화 감독은 초창기 한국영화의 거목이었던 최인규 감독의 제자였으며, 임권택 감독과 홍콩의 오우삼 감독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그는 불모지에 지나지 않던 한국영화계에 액션 장르를 개척하고 성숙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데뷔작인 <최후의 유혹>이후로 만든 51편의 영화 중에서 30편이 액션영화일 만큼 그가 액션에서 보여준 재능은 탁월했습니다. 1958년 <망향>을 필두로 꾸준히 한국과 홍콩의 합작영화를 만들던 그는, 홍콩의 장철, 호금전을 거느리고 있던 란란쇼의 제안으로 쇼브라더스에 영입됩니다. 정창화의 쇼브라더스 1호 작품인 <천면마녀>는 홍콩에서 대단한 흥행성적을 올리고 유럽에 수출된 최초의 홍콩영화로 기록되면서 정창화의 홍콩 입성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었고 이에 만족하지 않은 정창화는 홍콩 고유의 영역이던 정통무협영화 <아랑곡의 혈투>에 도전하여 성공을 이루고, 새로운 무협형식인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만들면서 권격영화의 교두보를 마련합니다. (씨네21 기사 정리)

그런데 당시 권격영화 광팬이었던 본인에게 영화도 제목도 낯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에 내가 붙인 이름은 <철장>이었다. 그런데 란란쇼가 홍콩 개봉 시 제목을 <천하제일권>으로 해서 나와 실랑이를 좀 했다. "홍콩 사람들은 그런 타이틀을 좋아한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에서는 내 의도대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타이틀을 붙일 수 있었다. (중략) 신상옥 감독이 변칙적으로 이 영화를 들여갔다. 이 영화를 합작영화처럼 변형시킨 것이다. 검열이 엄격한 군사정권하에서 무사통과를 위해 재편집을 해버렸고 원래 내 작품과는 다르게 변형시켰다. 결국 제목도 <철인>이라고 변경했다. 그런 식으로 마구잡이 편집을 하고 제목 변경까지 했으니,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한국에선 기대만큼 관객이 들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당시 한국 평단이나 영화담당 기자들이 영화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죽음의 다섯 손가락> 주연이 이소룡이라는 엉뚱한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주요 신문에 그런 기사가 나가면서 감독 이름도 없이 '홍콩영화가 세계 시장에서 <포세이돈 어드벤처>나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의 미국 대작을 전부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했는데 한국은 뭘 했느냐?' 이렇게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나 타임지에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내용이 기사화되니 뒤늦게 아주 조그맣게 '조사를 해 보니 정창화 감독 작품이었다'고 적었다.'(한국일보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2011년) 1~26화 중에서)

조국이 몰라준 것에 대한 섭섭함에서 그랬을까? 정창화 감독은 조용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 회고전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뜻밖이었지만 하지 말라고 거절을 했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무슨 회고전을 하느냐"'(한국일보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2011년) 1~26화 중에서)

그렇게 완고히 거절을 합니다. 하지만,

'한국액션영화의 전설로 불리는 정창화 감독이 5일 오후 43년 만에 감격적으로 부산 땅을 밟았다' (부산일보 2003년 10월 6일자 기사)

그는 젊은 영화인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지금이라도 알아줘서 고맙다고.

<오징어 게임>이 해외에서 신드롬을 일으키는 가운데 현재 K-콘텐츠들이 부지런히 노력하며 세계시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저력이 있기에 단지 영화만이 아니라 더 많은 k-콘텐츠들이 세계시장에 진출하길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진정 성과가 있으면 화끈하게 칭찬해주고 소리쳐 응원해주셨으면 합니다.


글 |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 《영화 배급과 흥행》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