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참혹함에 비할 바 없지만, 가끔 극단으로 갈려서 싸우는 이들을 볼 때면 난 <고지전>을 떠올리곤 한다. 특히나 선거철이 될 때면 사람들은 서로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게 역겹다는 듯 목숨을 걸고 싸워 댄다. 좌와 우로, 여당과 야당으로, 수도권과 지방으로, 세대로, 젠더로, 학벌로, 계급으로, 고용 형태로 나뉘어 피 터지게 싸우며 서로를 향한 혐오를 불태우는 저 수많은 이들은, 상대를 향한 절멸의 의지를 숨기지 않으며 모진 말을 탄환처럼 내뱉는다. 오프라인에선 옆집 이웃으로, 오촌 아저씨로, 중학교 동창으로, 직장 상사로 마주칠 사람들을 향해, 온라인에서는 누구보다 더 모욕적인 말들을 주고받는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순박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싸워야 하는 싸움이라면 응당 싸워야겠지. 그것도 잘 싸워야겠지. 그런데 지금 저렇게 서로를 향해 독설을 던지는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왜 싸우기 시작했는지 기억은 하고 있을까. 분명 과거엔 ‘내가 누구를 지지하는가’ 따위로 서로의 절멸을 기원하진 않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린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를 증오하고 모욕하게 된 걸까. 어쩌다가 싸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것만 같을까.
선거의 계절, 나는 다시 현정윤의 대사를 곱씹는다.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왜 싸우는지 누구보다 확신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잊었노라는 그 대사. 난 가끔 그 대사가 지금의 우리 몫인 건 아닐까 두렵다. 만약 그런 거라면, 누가 이겨도 우리 모두 진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