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한 가운데 재개발 구역을 밀어버리고 호텔을 올리려 하는 다국적 부동산업체 시플리는, 유일하게 땅을 팔기를 거부하며 버티고 있는 금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시플리는 땅 주인이 거액의 보상금을 노리고 알박기를 하는 중인가 생각하지만, 땅 주인 금자(박혜진)의 속내는 다른 곳에 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땅을 팔기를 거부했던 일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돈을 모아 판잣집이나마 지어 살았던 고생의 역사가 담긴 집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그 역사를 다 밀어버린 자리에 휘황찬란한 호텔을 세우겠다며 ‘돈이면 되지 않겠냐’고 웃어 보이는 이들이 괘씸했고, 또 다시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기 싫었던 것이다.
애플TV+의 드라마 <파친코>(2022) 속 금자의 사연을 보면서, 나는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2018) 속 용길(김상호)을 떠올렸다. 오사카의 한인촌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용길씨의 사연은 기구하다. 그는 강제징용을 당해 전쟁 통에 한쪽 팔을 잃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용길은 가진 재산을 모두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세간살이를 실어 먼저 보낸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졸지에 무일푼이 되었다. 제주도에 있었던 고향마을은 제주 4.3을 겪으며 풍비박산이 났고, 부모형제와 아내까지 죽고 난 뒤엔 돌아갈 고향마저 없어졌다. 반겨줄 사람이 없는 땅이 무슨 고향이겠는가. 자신이 그랬듯 배우자를 잃고 혼자 딸을 키우던 영순(이정은)과 재혼한 용길은, 다시 가족을 위해 이 악물고 일을 한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하루 하루의 생은 무겁고, 바다 건너 고향은 멀기만 하다.
<용길이네 곱창집>은 1960년대 말,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오사카시가 판자촌들을 허물기 시작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정착할 땅이 없던 재일조선인들이 집을 짓고 살면서 형성된 이 판자촌은, 전후 재건이 시급했던 일본 사회 밑바닥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공급했다. 공항 옆 판자촌에 터전을 일군 재일조선인들은 돈을 주고 집을 사고 팔았고, 시 당국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어차피 비행기가 뜨고 질 때마다 울려 퍼지는 찢어지는 굉음을 견디며 살아갈 다른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다가 판자촌을 철거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뒤에는, 시는 당신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은 국유지라는 말로 퇴거를 종용했다. 간사이 공항 확장에 따라 공항 근처 판자촌들이 철거되었고, 해외 관광객들이 보기에 미관 상 좋지 않다는 판단에 히메지성 돌담 주변을 따라 형성된 판자촌들 또한 철거되었다. 공항 옆 곱창집 한 켠에 살림하는 방을 마련하고 살아가던 용길네 또한, 조만간 집을 빼야 하는 처지다.
끝없이 쫓겨나기를 반복하는 삶을 살면서도, 용길과 영순은 어떻게든 기 죽지 않고 살아가려 악착같이 고개를 든다. 용길은 웃음을 잃지 않으려 막내아들 토키오(오오에 신페이)를 리어카에 태우고 골목을 달리고, 판자집 지붕 위에 올라가 석양을 바라보며 웃는다. 영순은 곱창집에 죽치고 앉은 단골 손님들을 기세 좋게 호령한다. 그렇게 웃어 보이지 않으면, 소리라도 치고 달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견디며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아마 용길도 영순도 굳센 사람들이라서 버텨낸 것이 아니라, 버텨내기 위해 굳세진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용길과 영순이 굳세면 굳셀수록, 이들이 처한 현실은 더 생생하게 달려든다. 맏딸 시즈카(마키 요코)는 어린 시절 공항 활주로에 몰래 숨어들어가 비행기를 따라 달리다가 사고를 당해 영구적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 마음씨도 착하고 외모도 수려하지만,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시즈카는 자신감을 잃고 움츠러든 삶을 산다. 비행기처럼 날아오르고 싶었던 꿈을 지녔던 소녀는 제 꿈을 쫓아 달렸던 대가로 다시는 달리지 못하게 됐다. 막내아들 토키오는 실어증에 걸려 무엇이 문제인지 말을 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건지, 이 답답한 판자촌이 싫은 건지, 재일조선인 2세로 살아가면서 당하는 인종차별이 갑갑한 건지. 토키오가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건 찢어지는 비행기 굉음이 날 때뿐이다. 비행기 굉음과 싸우기라도 하듯, 혹은 그 굉음 속에 자신의 비명을 숨기기라도 하듯.
용길네와 같은 재일조선인들의 삶은 이렇게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일들로 인해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렸던 기록으로 가득하다. 전후 GHQ(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발표한 ‘조선인, 중국인, 류쿠인 및 대만인의 등록에 관한 총사령부 각서’는, 귀국을 희망하는 조선인이 고국으로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현금의 총액을 1,000엔 이내로 제한했다. 가난했던 이들에게는 이게 큰 문제가 안 됐겠지만, 악착같이 노력해 어느 정도 재산을 모으는데 성공한 이들에겐 귀국을 망설이게 하기 충분한 액수였다. 더구나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의 정치상황은 이들의 귀향을 가로막았다. 고향으로 돌아왔던 이들은 제주 4.3의 광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해 다시 일본으로 가야 했다.
식민지배를 하던 시기에는 조선인들을 저렴하게 부리기 좋은 인력으로 강제 징용해 갔던 일본은, 전후 재건을 해야 하는 시기에는 우리 살기도 빠듯한데 재일조선인들이 빌붙어 있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반으로 갈린 조국은 저마다 제 체제를 홍보하기 위해 조총련과 민단으로 재일조선인 사회를 나눴다. 북한은 북송사업으로 수많은 재일조선인들을 북으로 데려갔고, 남한은 툭하면 재일조선인 교포들 중 조총련계 간첩이 있다는 말로 간첩조작 사건을 일으켰다. 그 광풍 속을, <용길이네 곱창집> 속 용길과 영순이, <파친코>의 금자가 이 악물고 살아남았다.
금자가 집을 팔기를 거부했던 건 아마 그런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도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가족’이라 말하는 것으로 다시 웃을 날을 기약하며 버티던 용길과 영순처럼, 금자 또한 그렇게 살았겠지. 그 잊혀져가는 역사를 끝끝내 기록해두고 싶었던 거겠지. 금자는 그 역사를 모두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집을 팔기를 거부했고, 자기 자신이 판자촌 고물상집 아들로 살았던 정의신 감독은 그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용길이네 곱창집>의 극본을 쓰고 연극무대에 올리고 영화를 남겼다. 이제, 그 역사를 기억하는 건 관객의 몫일 것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