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앞에서 제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영화 <야구소녀>(2020)의 후반부, 자신이 트라이아웃에 응모했던 프로구단의 부름을 받은 수인(이주영)을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든다. 여자라도 충분히 프로구단에서 뛸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해 트라이아웃에 임한 수인은, 그 자리에서 구단 단장(유재명)으로부터 프론트 직원으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주수인 선수의 모습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고. 이제 우리도 엘리트 체육이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생활 체육으로서 야구를 꾸리려고 하는데, 그 메시지를 상징하기에 주수인 선수만한 적임자가 없는 것 같다고. 지금까지 여자라는 사실이 주수인 선수의 발목을 잡았겠지만, 우리는 그 점이 오히려 일을 함께 진행하기 좋은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수인은 좌절한다. 여자라서 ‘누구나 야구 할 수 있다’는 걸 홍보하기에 적합하다는 뜻이겠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선수인가 증명하려고 최선을 다 했는데. 트라이아웃에서도 직구와 너클볼을 섞어 던져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아 오는 걸 증명해 보였는데. 여전히 구단은 자신을 선수가 아니라 여자로 먼저 본다.

<야구소녀>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 고교 야구 투수 주수인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다른 동료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프로 구단이나 대학교 야구부의 지명을 받아 야구 인생을 계속해 나간다는 선택지가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독립구단에서 몸을 만들며 기회를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인 수인에게는 그런 기회는 거의 오지 않는다. 규정상 여자가 프로 리그에서 뛰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확률적으로 남자 선수보다 체력이나 구속이 떨어지는 여자 선수를 굳이 지명할 만한 팀은 없으니까. 어린 시절 야구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온 수인은, 기회도 받지 못한 채 야구인생이 끝나가는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리틀 야구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야구부를 거쳐, 남자 선수만 가득한 고등학교 야구부에 이 악물고 들어갈 때까지, 넌 그때가 되면 더는 야구를 못 할 것이라는 말만 들으며 살아왔으니까.

한국에 여자 야구 리그가 있었다면, 프로 리그가 아니라 실업 리그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쓸쓸하고 외로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야구는 다른 여성스포츠에 비해 아직 선수층이 얇고, 그래서 사회인야구 이상의 리그를 꾸리는 게 어렵다. 그렇다고 여자인 수인을 데려갈 프로야구 팀이 있을까? 주변 사람들은 죄다 더 다치기 전에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엄마 해숙(염혜란)은 딸이 도전 과정에서 현실의 벽에 부딪혀 더 크게 상처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매정할 정도로 야구를 만류한다. 프로 선수가 되지 못하는 좌절감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는 코치 진태(이준혁) 또한 어차피 안 될 거니까 일찌감치 그만 두기를 권한다. 그러나 수인은 차라리 혼자 피칭 훈련을 하는 쪽을 택한다. 지금 자신이 야구를 그만 둬야 하는 위기에 처한 것은,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보다 공이 느리기 때문이어야만 한다. 전자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후자라면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나.

물론 세상에는 노력한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영화의 결말과 무관하게 한국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데 성공한 여자 선수는 아직 없다. 수인이 그랬듯 한화로부터 프론트 직원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던 안향미 선수는, 끝내 한국이 아니라 일본과 호주 리그에서 활약했다. 국가대표팀 선수 박민서는 국내외 관계자들에게 천재 야구선수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진출이 무산되며 야구 인생을 이어갈 길이 막막해 골프로 종목을 전향했다. 이 엄연한 한계를 무시하고 그저 노력이 부족했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환경의 한계와 구조적 모순을 죄다 개인의 책임로 돌리는 것과 다를 게 뭔가. 엄마 해숙이나 코치 진태가 수인에게 더 모질게 굴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 수인 혼자의 노력으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니까, 괜히 혼자 끙끙대며 도전하다가 다치고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서. 제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자책할 것이 눈에 보여서.

이 모든 게 개인의 노력으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라면, 수인의 고군분투는 죄다 헛수고인 걸까? 프론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돌아온 날, 진태는 일본이나 미국 리그로 가는 방법도 있다며 수인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떨구는 수인에게, 진태는 올해 우리 학교 야구부에 들어온 신입생이라며 파일을 하나 건넨다. 조심스레 펼쳐본 파일 속엔 인적서류가 들어있다. 책상 가득 수인의 사진을 붙이고는 야구선수의 꿈을 꿨다는 신입생 여자 선수의 인적사항이 기재된 서류가. 수인처럼 누군가 앞장서서 남자투성이인 고교 야구부에서 버텨 낸 사람이 있었기에, 그 뒤를 따르는 여학생들은 좀 더 수월하게 야구선수의 꿈을 꿀 수 있다. 여전히 드문 일이지만, 고교 야구 리그에서 활약한 여자 선수가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주수인 같은 사례도 있다고.

좀처럼 바뀌지 않아서 노력하는 게 헛된 고생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세상은 차갑고, 차별은 공고하고, 편견은 두텁다. 제도는 낡았고, 정치는 지리멸렬하다. 뭔가 바꾸려고 덤비는 건 힘만 빼는 일처럼 보이고, 셈이 빠른 사람들은 괜히 다치지 말고 무모하게 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벽도, 넘어서려 돌진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젠가는 넘을 수 있다. 그게 내가 아니라면 내 뒤에 온 사람이, 내 뒤에 온 사람이 아니라면 그 뒤에 온 사람이 넘겠지. 우리가 모두 우리보다 앞서 걸어간 이들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내 뒤에 온 사람들은 내가 걸어간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마운드에 올라 공을 뿌리는 수인의 뒷모습을 보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운 신입생이 그랬듯, 현실 속 안향미, 김라경을 보며 야구의 꿈을 키운 그 수많은 여자들이 그랬듯.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