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천 원이 웬 말이야.” 검은색 튜튜를 입은 모어가 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마자 관객들을 흉본다. 가슴팍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내던지고, 등에 멘 날개도 미련 없이 벗는다. 하지만 잠시 후, 모어는 테이블에 나뒹구는 이천 원을 주워서 가방 속에 야무지게 챙겨 넣는다. 입에서는 지겹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무례한 관객은 어김없이 나타나며, 한바탕 쇼가 끝난 자리엔 구질구질한 삶이 남아 있다.
퇴근길에 모어는 지하철 역사에서 노점을 연 노인에게 다가간다. 바닥에 깔린 붉고 푸른 콩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 그는 말없이 노인을 향해 지폐 한 장을 건넨다. 화려한 무대, 초라한 거리, 모어는 소란과 고요를 넘나드는 사람이다. 어쩌면 종잡을 수 없는 기분과 변화무쌍한 표정을 선보이는 그가 생경하여 힐끔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어는 그러한 편견과 예단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듯 영화 머리에 스스로를 호명한다. “털 난 물고기, 모지민” <모어>는 발레리노가 아니라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던, 모어(毛魚) 모지민 스토리다.
모어는 20년 넘게 무대에 선 드랙 아티스트다. 드랙은 고정 성별에 따른 지위 및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을 꾸미고, 특정 페르소나에 기반하여 노래와 춤, 연기 등을 선보이는 퍼포먼스다. 과장된 메이크업과 의상처럼 외양적 특징이 눈에 띄지만, 단지 여장 혹은 남장에 머무르는 행위는 아니다. 드랙 아티스트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수행함으로써, 성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시선에 저항한다.
“내가 중간에 없으면 당신들은 헷갈리지. 부술 테면 부숴 봐!”라고 노래했던 <헤드윅>(존 카메론 미첼, 2002)의 주인공처럼 드랙은 그 자체로 젠더의 전복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예술이다. 영화와 뮤지컬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방송에서도 드랙 아티스트를 종종 만나볼 수 있다. 미국에서 2009년부터 방영한 리얼리티 쇼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는 장수 프로그램으로 입지를 다지며 시즌 14개를 내놓았고, 작년 인기리에 종영한 <스트릿 우먼 파이터>(tvN, 2021)에 출전했던 댄스 크루 프라우드먼은 드랙 아티스트 캼(KYAM)과 함께 무대를 꾸며 화제가 됐다.
영화는 모어의 삶을 두 층으로 엮어낸다. 먼저 인물을 뒤쫓는 전통적 다큐멘터리 촬영 방식을 통해,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모어의 현재 모습을 다룬다. 카메라는 모어의 집, 연습실, 무대를 따라가며, 그가 한 공연을 완성하기까지 거치는 여정을 기록한다. 동시에 영화는 익숙한 다큐멘터리 문법을 등지고, 음악과 무용을 결합한 쇼를 수시로 연출한다. 이랑의 <너의 리듬> <신의 놀이>,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이상은의 <담다디> 등 다양한 노래가 삽입되는데 이를 해석하고 연기하는 주체는 모어다.
그는 퍼포먼스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안에는 영화가 기록하기 어려운, 이미 지나갔기에 재현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시간과 경험이 담겨 있다. 두 갈래를 오가는 동안, <모어>의 목표는 분명해진다. 모지민은 어떤 경로를 거쳐 모어에 다다랐는가? 모어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주요 인자는 무엇인가? 이를 확인해나가는 과정에서 영화는 자연스레 모어의 영상 자서전이자, 일종의 공연 포트폴리오로 기능한다.
모어는 자신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출생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무기징역 불행”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고,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제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기란 불가능했다.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괴로움은 유년부터 달고 산 족쇄이자, 오랜 시간 혼자 감당해야 했던 비밀이다. 왕따 같은 건 없었다는 엄마 앞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서 보기 좋았다는 은사 앞에서도, 모어는 이렇다 할 대꾸 없이 까닭 모를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후 모어는 영화 속에 그만 아는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혐오는 날카로웠고, 폭력은 끈질겼다. 우연히 만난 발레는 “지긋지긋한 욕창 같은 삶에 날개를 달아” 주었으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입학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 선배는 여성성을 버려야 한다며 그를 때렸고, 군대에서는 정신병원에 격리됐다. 결국 도망치듯, 혹은 떠밀리듯 도착한 이태원 클럽 ‘트랜스’에서 그는 ‘모어’로 데뷔했다. “행복한 끼순이”로 20년을 살아오는 동안, 모어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영화 역시 발을 맞추며, 드랙 아티스트이자 패션모델, 배우이자 작가인 모어를 분주히 따라간다.
카메라는 모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마른 몸, 팽팽히 수축한 근육, 꼿꼿이 세운 등과 턱. 긴장감이 감도는 육체를 무기로, 모어는 매번 다른 얼굴을 연기한다. 천박한 쇼걸이었다가 우아한 귀부인으로 변신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웃다가 회한에 젖은 노인이 되어 먼 곳을 바라본다. 그렇게 수많은 이가 모어의 몸에서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한다. 모어는 퀴어문화축제에서 전신을 흰 천으로 두르고서 백조처럼 새하얀 깃을 흔든다.
광장을 누비는 위풍당당한 자세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은 혐오 세력을 압도하고, 축제의 열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늦은 밤 한강대교에서는 한영애의 <조율>에 맞춰 살풀이하듯 춤추는가 하면, 고향 집에서는 경운기에 올라탄 채 남편 제냐와 행진한다. 영화 말미에 뉴욕으로 떠난 모어는 기다렸다는 듯 무대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 스톤월 항쟁 50주년을 기념하는 뮤지컬 <13 fruitcakes>을 완성한다. 영화에서 거듭되는 모어의 쇼는 전투와도 같다. 그는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일어서려 안간힘쓴다. 하이힐과 토슈즈를 번갈아 신으며 하늘에 가까워지려 하고, 그 모든 고통과 어지러움을 견디며 몇 번이고 회전한다.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털 난 물고기’는 지구에 불시착한 천사 같기도, 날개옷을 잃어버린 바람에 비상이 가로막힌 선녀 같기도 하다. 무대에 설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 앞에서도 모어는 자신을 향한 여러 개의 눈을 의식한다. 상대가 만족하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영화에서 보이는 그와 보여주지 않는 그는 번번이 충돌한다. 모어가 말한 대로 “그 아름다움 속에는 너무 많은 애환이 있”어서다. 기실 천사도 선녀도 아닌 한 인간이기에, 그는 가장 행복할 때조차 불행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다만, 모어는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세상에서도 이토록 뚜렷한 아름다움이 가능하다고 온몸으로 증명한다. 속세의 인연과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사랑과 환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어디로 헤엄쳐 갈까. 그를 여태 품지 못한 바다가 넓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에 갇히지 않겠다고 선언했듯, 모어는 영화 앞에서도 판단을 거부한다. 연민도, 상찬도 그만하면 됐으니 “팁이나 많이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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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