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 90년대 초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장르, 로맨틱코미디의 위세는 이젠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가 돼버렸다. 그런 와중, 그 당시를 대표하던 두 작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동시에 한국 관객을 다시 만난다. 모두 20년을 훌쩍 넘긴 작품이다. 두 작품을 다시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 걸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로맨틱코미디의 전성기, 80년대 말 90년대 초 세상을 웃기고 울린 명작들을 다시 되짚어 봤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When Harry Met Sally..., 1989)

멕 라이언(샐리)과 빌리 크리스탈(해리)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훗날 이어질 로맨틱코미디 붐의 시작점이라 할 만하다. 배우 멕 라이언과 각본가 노라 애프런, 로맨틱코미디의 두 걸출한 재능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점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 기본적으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말의 영화다. 서로를 꽤나 미워하면서 드문드문 12년에 걸쳐 '우정'을 키워가는 해리와 샐리는, 때마다 마주보고 앉아 "남자와 여자 간에 우정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영화가 공개된 지 27년이 지난 시점에 이런 주제 자체가 낡아보일 수 있지만, 거의 상극이라 할 만큼 다른 의견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사랑이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영화의 묘미는 여전하다. 지극히 뻣뻣하고 마초적인 해리의 말들에 선뜻 동의하긴 어렵지만, 피날레에서 해리가 샐리를 향해 던지는 고백은 기어코 마음을 움직이고야 만다. 물론 남성 관객들에겐 멕 라이언의 절대 미모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을 안겨주겠지만. 동화와 로맨스가 적절히 배합된 <프린세스 브라이드>(1987)를 내놓으면서 사랑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에도 남다른 실력을 자랑했던 로브 라이너 감독은 노라 애프런의 시나리오를 만나 로맨틱코미디의 정수를 완성했다.

그 유명한 가짜 오르가즘 신이다



<금지된 사랑>
(Say Anything, 1989)

존 쿠삭(로이드)과 이온 스카이(다이앤)

장르영화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공식에 기댄 채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같은 해에 공개된 또 다른 걸작 <금지된 사랑>은, 로맨틱코미디임과 동시에 하이틴 영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이제 막 어른이 된 주인공의 원초적인 에너지만으로 장르의 한계를 거뜬히 돌파한다. 이 말은 혈기 넘치는 이들의 사랑이 뜨겁게 그려진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어긋날 때 주인공의 처참한 마음이 선명하게 전달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별 내세울 게 없는 로이드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학교에서 가장 예뻤던 우등생 다이앤과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딸과 유독 사이가 좋은 다이앤의 아버지가 둘의 관계를 반대한다. 허우대 멀쩡하고 매순간 진실을 담아 얘기하는 로이드가 결국은 실속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연출을 맡은 카메론 크로우는 짝사랑을 가장 잘 찍는 감독이다. 로이드가 다이앤에게 데이트 신청 하기 위해 전화 걸 때, 다이얼을 누르다 말고 머리를 빗어넘기는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돌연 자기를 외면하는 다이앤의 집 앞에 찾아가 피터 가브리엘의 'In Your Eyes'를 크게 틀어놓은 붐박스를 들고 서 있는 명장면은 언제 봐도 심금을 울린다. 얼마간 찌질하지만, 거세게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랑만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남는다. 크로우의 이 비상한 능력은 대표작 <올모스트 페이머스>(2000)에서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귀여운 여인>
(Pretty Woman, 1990)

줄리아 로버츠(비비안)와 리차드 기어(에드워드)

도산 직전의 기업을 비싸게 팔아넘기는 능력을 지닌 사업가 에드워드는 사업차 들른 LA에서 길을 잃고, 거리에서 만난  비비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의 자유분방함에 이끌린 에드워드는 여자와 동석하는 것이 사업상 좋다는 조언을 듣고, 비비안에게  계약동거를 제안한다. <귀여운 여인>은 흔히 '신데렐라 스토리'의 전형으로 일컬어진다. 재벌 신사와 콜걸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라는 캐릭터부터 그 의도가 물씬 드러난다. 하지만 장르의 컨벤션은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에게도 해당된다. 궁극의 매력을 자랑하는 여자로 인해, '더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인 판타지가 주는 힘 역시 <귀여운 여인>의 분명한 장점이다.

<귀여운 여인>은 온전히 줄리아 로버츠의 영화다. 로버츠의 시원시원한 외모로써 어필되는 상쾌한 공기는, 틀에 박힌 이 판타지에 대해 쏠릴 수 있는 불편함을 완전히 불식시킨다. 인간미가 없다는 이유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 받은 에드워드가 단 하룻밤 만에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는 단순한 설정은 로버츠의 존재로 설득력을 얻는다. 눈이 즐겁다. 콜걸 특유의 섹슈얼한 의상부터 상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점차 옷차림을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90년대 초 패션의 최전선을 만끽할 수 있다. 유행이 돌고 돌아 90년대 패션이 다시금 주목 받는 요즘에 보기에 아주 그만이다. 로이 오비슨의 'Oh, Pretty Woman!'이 경쾌하게 흐르는 가운데 비비안이 옷을 갈아입는 시퀀스가 세기의 명장면이 될 수 있었던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Sleepless In Seattle, 1993)

멕 라이언(애니) & 톰 행크스(샘 볼드윈).

다시 노라 애프런과 멕 라이언이다. 커리어 초기부터 자신이 각본을 쓴 작품에 메릴 스트립을 연이어 캐스팅 하며 자기만의 편애를 드러내던 애프런은, 두 번째 연출작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에서 다시금 멕 라이언을 기용해 편애를 이어간다. 이제 막 약혼을 발표한 기자 애니는 라디오에서 샘의 아들이 전해주는 그의 사연을 듣고, 그가 어쩌면 운명적인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샘을 머릿속에 그리던 애니는 기어코 그를 찾아가지만,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쉬운 문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애니와 샘은 몇 번 마주할까? 정답은 딱 한 번. 영화는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각자 볼티모어와 시애틀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디오 사연을 들은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애니를 통해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게 과연 가능하다는 판타지를 기어코 설득해낸다. 현실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로 주목 받던 애프런은 환상 그 자체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이야기꾼의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다. 제목처럼 많은 시간 시애틀에서 펼쳐지던 이야기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클라이막스를 맞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두 주연 배우 멕 라이언과 톰 행크스는 노라 에프런의 또 다른 영화 <유브 갓 메일>(1998)에서 다시 만난다.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3)

빌 머레이(필), 앤디 맥도웰(리타)

<사랑의 블랙홀>의 판타지는 서사 그 자체다. 매사에 자기중심적이고 시니컬한 기상캐스터 필은 매년 2월 2일 열리는 성촉절을 취재하기 위해 PD 리타, 카메라맨 래리와 함께 펜실베니아 펑추니아 마을로 간다. 길고 지루한 하루를 보낸 필은 다음날 아침에도 2월 2일임을 깨닫는다. 처음에 혼란스러워 하던 그는 점점 우악스러운 장난과 범죄를 저지르면서 반복되는 삶을 즐기고자 한다. 'Groundhog Day'(성촉절)라는 원제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빌 머레이에 비하면 상대역 리타를 연기한 앤디 맥도웰의 물리적 비중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계속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저 마주해야 하는 직장 동료일 뿐이다. 하지만 끽해야 도레미 건반이나 누를 줄 알던 그가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필은 리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로 하여금 이 상황을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게끔 이끈다. 그리고 끝내 리타가 필을 선택하면서, 필은 그토록 원하던 '내일'을 얻게 된다. 영원한 하루에 빠진 남자를 구원하여 내일을 선사하는 사랑이라니, 사랑 영화로서 이토록 완벽한 엔딩이 또 있을까 싶다.

<사랑의 블랙홀>은 <고스트버스터즈> 시리즈가 남긴 위대한 유산 중 하나다.  <고스트버스터즈>에서 이곤을 연기했던 해롤드 래미스는 감독 자격으로 피터 역의 배우 빌 머레이를 <사랑의  블랙홀>에 캐스팅해서 오랜 파트너십을 이어갔다. 본래 주인공 필의 자리에 톰 행크스, 존 트라볼타, 케빈 클라인 등  배우들이 물망에 올라 있었으나, 래미스 감독은 그들이 너무 잘생겼다(!)는 이유로 빌 머레이를 선택했다. 영화 속 빌 머레이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라면, 감독의 혜안이 너무나 정확한 것이었음을 모두 알 것이다. 빌 머레이는 <사랑의 블랙홀>을 통해  코미디에만 한정되던 평소 이미지에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타임루프라는 소재와 로맨스를 결합한 <사랑의 블랙홀>은 훗날 2000년대를 대표하는 멜로 <이프 온리>(2004)와 <첫 키스만 50번째>(2004)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4)

휴 그랜트(찰스)와 앤디 맥도웰(캐리)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미국 로맨틱코미디, 멕 라이언, 노라 애프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면,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영국 로맨틱코미디를 대표하는 제작사 워킹타이틀, 배우 휴 그랜트, 작가 리차드 커티스로 이루어진 트리오의 출발점이다. 허구헌 날 지각하는 결혼식 들러리 찰스는 어느 식장에서 미국인 캐리에게 첫눈에 반한다. 영화는 찰스가 캐리에게 어설프게 수작을 거는 과정을 느슨하게 따라가면서,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에 유머를 쏟아내면서 관객의 흥미를 붙든다. 특히 리차드 커티스의 또 다른 대표작인 '미스터 빈' 시리즈의 주인공 로완 앳킨슨의 활약이 돋보이는 결혼식 신은 (90년대 유행하던 표현을 빌리자면) 배꼽을 달아나게 한다. 그런 가운데서 찬찬히, 찰스와 캐리의 관계가 점점 더 좁혀져가는 걸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280만 유로라는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국 로맨틱코미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미국에서 개봉돼 전혀 예상치 못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제작비의 100배에 달하는 수익을 내 현재까지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영국 영화로 손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의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뻣뻣한 신사 역할로 이름을 알리던 휴 그랜트는 로맨틱코미디의 대표적인 남자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로맨틱코미디의 맛을 제대로 본 제작사 워킹타이틀은 멕 라이언의 대표작 <프렌치 키스>(1995), <노팅힐>(1999), '브리짓존스' 시리즈, <어바웃 어 보이>(2002), <러브 액츄얼리>(2003) 등을 히트시키며 로맨틱코미디 명가로 자리매김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



재밌으셨나요? 내 손 안의 모바일 영화매거진 '네이버 영화'를 설정하면 더 많은 영화 콘텐츠를 매일 받아볼 수 있어요. 설정법이 궁금하다면 아래 배너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