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장르의 계보를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영화학자들은 인류 최초로 상영된 영화, <대열차강도> (1903)를 최초의 액션 영화로, 다른 이들은 무성영화 시대에 유행했던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주연의 칼 싸움 (swordplay films) 영화들을 액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 시리즈를 온전한 액션 영화의 시작으로 정의한다. 현재까지도 액션 장르의 역사는 완전히 합치되지 않은 상태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히로인 액션 (heroine action)'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 액션 영화는 남성을 중심을 한 액션 영화들 보다 늦게 등장하기도 했고, 각기 다른 장르에서 활약한 여성 히어로들을 제각기 시초로 하다 보니 계보가 다소 엉망이다. 예를 들어, <에일리언> (1979)의 ‘리플리’를 여성 액션 히어로의 시초로 간주하는 기록이 있는 반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을 본격적인 여성 액션 영화의 태동으로 읽는 학자들도 있다.
다양한 관점들 중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설'을 선택을 하는 방법은 어떤 영화 (혹은 시리즈)가 유행이나 현상이 되었는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0년은 여성 액션 장르에 있어 의미심장한 해다. 2000년 한 해에만 밀라 요보비치가 좀비와 싸우는 여성전사로 활약하는 <레지던트 이블>, 여성 요원들을 메인 캐릭터로 하는 <찰리스 앤젤>, 안젤리나 졸리가 정글을 누비는 <툼 레이더>의 1편이 개봉하며 프랜차이즈의 신호를 알렸다. 이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하여 현재까지 시리즈로 지속되거나, 리메이크로 재탄생했다.
(여성을 ‘액션’의 주체로 하는) 이 영화들을 하나의 장르로 지칭한다면 지난 20 여년간 여성 액션 장르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었다. 2000년대 이후로 여성 액션 영화의 제작 편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데다가 액션의 강도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아토믹 블론드>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보여준 원테이크 액션 씬을 떠올려보라!).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트렌드는 여성 킬러를 메인 캐릭터로 한 영화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케이트> (2021), <안나> (2019), <레드 스패로> (2018) 등은 모두 숙련된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로, 이들의 미션 배후에 숨겨진 음모를 추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최근에 넷플릭스로 공개 된 영화, <킬링 카인드: 킬러의 수제자> 역시 여성 킬러영화의 트렌드 속에서 탄생한 영화다. 영화는 킬러 ‘무디’의 수제자가 된 ‘안나’가 스승의 복수를 하는 과정을 담았다.
‘안나’(매기 큐)는 베트남 갱단에게 잔인한 방법으로 부모를 잃는다.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킬러, ‘무디’(사무엘 L. 잭슨)는 갈 곳 없는 안나를 돕기로 한다. 한번 눈으로 익히고 총을 완전히 조립하여 남은 조직원들을 처리한 안나를 보면서 무디는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챈다. 이후로 그는 그녀를 최고의 킬러로 길러낸다. 어느 날, 안나는 유일한 가족인 무디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의 죽음이 그가 한 마지막 미션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건에 가까워질수록 안나는 거대한 세력의 배후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안나 앞에 의문의 남자 ‘렘브란트’(마이클 키튼)가 나타나고, 그녀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그러나 의외의 장소에서 그는 안나를 적으로 다시 만나고, 그녀의 복수를 가로막는다.
<킬링 카인드: 킬러의 수제자> (이하 ‘킬링 카인드’)는 <007 카지노 로얄> (2006), <더 포리너> (2018), <엣지 어브 다크니스> (2010) 등 액션 장르에 특화한 마틴 캠벨이 연출한 첫 여성 주연 액션 영화다. <더 포리너>에 이어 아시아 배우를 주연으로 한 두 번째 액션 영화이기도 하다. 액션 장르에 커리어의 대부분을 바친 감독 답게 <킬링 카인드>의 이야기적 구성은 ‘노련’하다. 영화에서 안나와 무디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를 넘어 ‘유사 부녀’ 관계로 보여지는데 이들 관계의 특수성은 암살자로 자랄 수 밖에 없었던 안나의 삶과 그녀가 무디의 죽음에 분노할 수 밖에 없는 감정적 명분을 충분히 설명한다. 따라서 안나의 목숨을 건 복수가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무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안나’의 ‘무디’의 관계는 노련함을 넘어 진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여성 킬러 영화들, 예컨대 <케이트>나 <니키타> (‘마틸다’를 주인공으로 간주한다면 <레옹>까지) 에서처럼 부모가 없는 소녀를 ‘유사 아버지’ 캐릭터가 구원하고 이들을 자신과 같은 킬러로 키워낸다는 설정은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반복되며 재생산되었다. 이들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강인한 ‘여성성’은 남성 마스터에 의해 창조되고 길러진 셈이다. <킬링 카인드>가 전작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안나가 무디와의 절대적 관계 이외에 다른 유사 아버지 캐릭터, 램브란트와도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렘브란트는 서로를 처치해야 하는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끊임없이 안나에게 구애를 한다. 안나도 렘브란트와 목숨을 건 격투를 벌이면서도 그를 좋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킬링 카인드>는 베트남이라는 이국적인 배경과 꽤 볼 만한 액션 시퀜스들로 중무장을 하고 있음에도 안나가 두 남자들에게 종속되어 있거나 (무디) 종속 될 뻔한 (렘브란트) 이야기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니키타> (드라마버전)를 필두로 하여 <미션 임파서블 3> (2006), <다이 하드 4.0> (2006), <다이버전트> (2014), <판타지 아일랜드> (2020) 등 액션 장르에서 오랜 시간 활약해온 메기 큐가 주인공을 맡았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매기 큐는 아시아 여성 캐릭터로서는 보기 드문, 강인하고 냉철한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유사 아버지’와 ‘유사 남편’ 캐릭터로 연결 된 가부장적 관계의 주요 인물을 상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링 카인드>는 주목 할 만한 작품이다. 지난 할리우드 영화들이 백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배경을 착취하거나 탐험하는 수준으로 이용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배경을 넘어 베트남 출신의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형평성’을 더했다. 이는 여성 액션 장르로 범위를 줄여도 마찬가지다. <툼레이더>의 캄보디아와 <케이트>의 일본이 이방인, ‘라라’와 ‘케이트’가 배회하는 환타지적 장소로 재현된다면 안나의 베트남은 그녀가 속한 공간이자 정체성을 회복해 줄 실질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는 앞으로 제작 될 수 많은 아시아 배경의 (액션) 영화들을 고려했을 때 이 영화가 이루어 낸 작은 진보이기도 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