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의 꿈과 희망은 모든 만화가 대신했다. 순정만화 속 주인공들은 때 묻지 않은 여린 감성을, 어드벤처 속 영웅들은 뜨거운 모험심을 우리 대신 펼쳐주었다. 하지만 세상은 신비한 모험의 나라가 아니었고, 우리는 어느새 쓴맛도 음미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여기, 그런 성인들의 세계를 괴랄하고 발칙하게 그려낸 애니메이션들이 있다. 환상의 세계 속 무해함에 더 이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어른들의 염세와 괴팍함 속에서 풍기는 씁쓸함을 음미해 보자. 모두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으로, OTT 특유의 개성과 재치를 톡톡히 녹여낸 작품들이다.
보잭 홀스맨 - 화려함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성장통
90년대 인기 시트콤인 '말장난'(Horsin' Around)의 주연을 맡아 인기를 끌었지만, 20년이 지난 후 퇴물 배우 겸 인격 파탄자가 되어버린 보잭이 재기를 통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한다. 인간과 수인이 공존하는 현대 속 방탕하고 소란스러운 할리우드 업계를 배경으로 하며, 한때 인기 스타였던 보잭이 현재 하는 일이라고는 화려한 스웨터를 입고 할리우드를 어슬렁거리는 것뿐이다. 이처럼 한물간 배우는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 죄의식의 늪에 빠진 채 세상을 비관하며 깊은 우울과 싸우게 된다. TV쇼와 현실도 구분하지 못하는 어른아이의 모습이다. 어른과 아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성장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다. 허무주의에 빠진 보잭에게서 성장은 찾아볼 수 없지만, 끝내 어두운 곳에 가라앉아 있던 자기 자신을 구원해낸다.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할리우드 재기가 아닌 온전한 자기 구원이었음을 이야기한다. 화려함과 씁쓸함의 공존이 긴 여운을 남기며, 한 남자의 뒤늦은 성장통은 시즌 6으로 막을 내린다.
미드나잇 가스펠 - 삶과 죽음으로의 몽환적인 여행
우주 시뮬레이터를 통해 가상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 방송 진행자가 삶과 죽음으로의 몽환적인 여행을 떠난다. 카툰네트워크 최고 인기작이자 간판 애니메이션인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을 제작한 애니메이터 펜들턴 워드, 코미디언이자 팟캐스트 진행자인 덩컨 트러슬이 공동제작을 맡았다. 팟캐스트 ‘미드나잇 가스펠’의 진행자 클랜시가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는 형식으로, 겉보기와는 달리 심오한 철학적 고뇌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은 ‘굳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간다. 공허함을 이겨내기 위한 헛소리나 말장난, 설교로 느껴질 수 있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신의 삶을 멀리서 관망하지는 않는다. 방대하고 모호한 대사들 속 궁극적인 메시지는 결국 실존과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SF의 독특한 창의성, 환각적인 연출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묻어나기에 거부할 수 없는 작품이다.
러브, 데스 + 로봇 - 우주에서 전쟁터, 무덤까지 넘나드는 암울한 여정
코미디, 미스터리, 호러, SF, 전쟁, 괴수물, 사이버펑크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장르를 담아낸 성인용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다. <파이트 클럽>의 감독 데이비드 핀처와 <데드풀>의 감독 팀밀러, 톱 애니메이션 제작사 블러 스튜디오의 합작품으로 공개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 실험적인 서사와 시각적인 즐거움을 짧은 러닝타임으로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며, 가장 파격적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원초적인 생존 본능부터 뒤틀린 욕망, 불경한 사랑 등 심오한 세계관 속 주인공은 인간, 로봇, 요정, 때로는 요거트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우주에서 전쟁터, 무덤까지 넘나들며 각자의 암울한 여정을 펼친다. 경로를 벗어난 우주선의 기이한 모험을 그린 호러 스페이스 오페라 <독수리자리 너머>, 예술과 욕망의 관계성을 그려내며 철학적 질문을 던진 <지마 블루>, 개조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얼음>, 거대 식인 괴물과 인간의 생존게임을 그린 크리처물 <어긋난 항해>, 신화 속 세이렌의 유혹을 화려한 영상미로 표현한 <히바로>는 필히 감상해야 한다. 격렬하고 강렬하고 선정적이며, 모든 금기가 무너진 미지의 세계를 목격해보자. 현재 시즌 3까지 공개되었다.
은밀한 회사원 - 아찔하고 도발적인 미국식 블랙코미디
그림자 정부가 은밀히 세계를 조종하는 가운데, 각종 음모론적 요소를 관리하는 그림자 정부 직원들이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한다. <그래비티 폴즈>, <레귤러 쇼>의 작가진을 담당했던 시온 타케우치가 제작한 청소년 관람불가 애니메이션으로, 대담한 풍자와 도발적인 대사가 난무하는 작품이다. 아찔한 미국식 유머와 풍자를 선호한다면 만족스러운 블랙코미디가 될 것이다. 유명인들의 열애설과 정치적 이슈, 사이비 종교와 세뇌, 기업인들의 음모, 우주에 관한 수많은 이론 등 세간에 떠도는 음모론이 실재한다는 배경과 실존 인물들의 등장이 더욱 흥미를 자극한다. 그 많은 음모론의 발단이 어디였는지, 얼마나 사소하고 황당한 일들이 이 세계를 뒤흔든 것인지 확인해 보자.
휴먼 리소스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한 감수성 훈련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한 인력 자원들의 분투를 그린다. 사춘기의 발칙함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애니메이션 <빅 마우스>의 스핀 오프 작품이다. 휴게실에서 민망한 행위를 일삼은 호르몬 괴물들이 감수성 훈련을 받게 되며 배신과 사랑, 야망과 좌절, 모성애와 유대감 등 인간의 양가적인 감정들을 배워간다. 넷플릭스 식 성교육을 보여주던 <빅 마우스>에서 나아가 더 복잡한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감정의 비밀과 반짝이는 성장을 그려낸 <인사이드 아웃>이 따뜻한 가족용 애니메이션이라면, 본작은 존재의 가벼움에 초점을 맞춘 유쾌하고 천박한 성인용 버전이다. 또 한 번 불가사의로 가득 찬 사춘기의 혼란을 겪고 있다면, 하지만 진지한 교훈은 참을 수 없다면 <휴먼 리소스>를 추천한다.
성인용 애니메이션은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적당히 유해하며 매혹적인 일탈을 선사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유머를 구사하며, 당신의 비관조차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한다. 꿈과 희망 대신 허무와 체념으로 얼룩진 쓰디쓴 세상에서, 함께 허우적거릴 친구가 필요하다면 꼭 감상해 보자. 현재 모두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이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