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에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관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이런 다중우주를 상상해야만 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한국 수입에 관여한 이들이 영화의 제목을 원어 음차하는 데 그치지 않은 우주 말이다. 입에 붙지 않는 13자의 제목에 무성의부터 느끼는 건, 이 글을 쓰는 나의 우주에선 필연이었다.

그렇다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적어도 <모든 것, 모든 순간, 한꺼번에>로 직역돼 극장에 걸린 우주는 실재하는가? 그건 상자 속에서 죽어 있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다. 상자를 열고 관측하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으면 고양이는 두 개의 다중우주 속에 머무를 것이다. 인류가 '모든 것'과 마주치는 '모든 순간' 해 온 선택은 셀 수 없는 멀티버스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 우주들의 존재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다. 현재의 다중우주는 다만 상상 속에 '있을' 따름이고, 그것들은 다른 상상과 실체적으로 섞일 수 없는 형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미국에 사는 중국계 이민자 에블린(양자경) 가족의 삶 어느 순간을 떼어다가 다중우주의 실존 가능성을 시각화한다. 현재 세무 조사를 앞두고 있는 세탁소 주인 에블린은 중년 여성, 영어가 서툴고 백인을 싫어하는 중국인, 레즈비언 딸이 부끄러운 엄마, 생계에 도통 도움이 안 되는 유약한 남편의 아내이자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는 딸이다. 이건 에블린의 우주에서 그를 존재하게 하는 '관측된 사실'이자 선택의 결과물이다. 또 에블린이 머리를 싸매고 씨름하는 영수증 더미에 기록된 인생의 굴곡이기도 하다. 영화에선 이 우주에서 에블린이 영위하는 삶을 도무지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 '최악'으로 그린다.

세무조사에서 또 퇴짜를 맞고 남편 웨이먼드(조너선 케 콴)은 이혼 서류를 꺼낼 타이밍만 보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 더 나빠질 것이 있었냐며 놀랄 사이도 없이 에블린은 멀티버스의 존재에 대해 듣게 된다. 갑자기 인격이 달라진 듯 진지한 눈빛을 한 웨이먼드의 입을 통해서다. 그는 다른 우주에서 '지금'을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능력을 빌려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다중우주 전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알파 버스의 '조부 투바키'라는 존재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하지만 에블린은 단번에 다중우주 세계관에 납득해 웨이먼드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 그런 선택을 할 의지를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잠시 멀티버스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괴물이 된 국세청 조사관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과 성실한 디어드리를 착각한 에블린은 그의 코를 가격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경찰에 잡혀갈 신세가 됐음에도 버스 점프를 거부한다(버스 점프는 다른 우주의 자신과 접속해 능력을 빌려 오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는 멀티버스를 알기 전의 에블린이 '장난감 눈'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행동과 궤를 같이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집 안 물건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그 눈들이 에블린은 몹시 거슬린다. 현재의 자신에게 잠재된 가능성들이 관측되는 것을 회피하는 모습이다. 그 동안 에블린은 가능성이 '보여지는' 순간 선택으로 끌려 갔고, 직접 고른 삶의 연쇄가 지금의 비참한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에블린에게 더 이상의 가능성을 마주친다는 것은 희망이 아닌 불행이다. 그건 지난 모든 순간들이 에블린에게 남긴 어떤 트라우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에 줄곧 등장하는, 안이 뚫린 동그라미들은 에블린을 비롯해 자신의 선택에 좌절한 모두가 빠질 수 있는 허무주의를 상징한다. '화룡점정(畫龍點睛)'의 고사는 잘 그린 용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은 순간 용이 실체를 얻어 하늘로 날아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블린은 자신이 그간 그려온 그림이 잘 빠진 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속이 빈 동그라미에 점을 찍어 또 하나의 가능성을 이 우주로 소환하기 보다는, 그 동그라미 안의 '아무것도 아닌' 우주로 도망치기를 택하려 한다. 에블린의 딸 조이이자 무적의 빌런 조부 투바키(스테파니 수)가 거대한 베이글의 구멍 사이로 '모든 것', '모든 순간'들을 '한꺼번에' 흡수해 버리려는 이유다.

알파 버스에서는 천재 과학자인 알파 에블린의 딸 알파 조이가 조부 투바키로 변모한 건 방향 없는 가능성들을 강요당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연속된 버스 점프로 자신이 가진 모든 잠재력들을 보고 만 알파 조이는 깊은 허무주의에 잠식당한다. 그 무한한 가능성들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들인지 알파 조이는 알 길이 없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상영되고 있는 이 우주 기준으로 말해 보자. 한글도 못 뗀 아이에게 피아노, 미술, 수학, 논술, 컴퓨터, 태권도, 영어를 마구잡이로 떠먹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움직여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한 채, 가능성은 그 크기만을 불리게 된다. 에블린의 용이 치열한 선택의 삶을 지나며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는 데 실패했다면, 조부 투바키는 용을 그릴 붓조차 뗄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는 이와 함께 모든 가능성을 가시화하는 행위, '관측'의 함정을 말한다. 가능성은 에블린과 그 가족들에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짐 같은 것이지만, 관측의 무의식적 회피가 불가능한 멀티버스에서 가능성은 허무의 늪에서 그들을 꺼낼 긍정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과도한 관측으로 비대해진 가능성의 덩어리는 결국 '무(無)'로의 회귀를 갈구하게 한다. 결국 삶은 멈출 수 없는 흐름이다. 그래서 매번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을 외면해 버릴 수도 없고,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모든 선택을 다 준비할 수도 없다. 끝내 삶이란 그림이 내 우주 기준으로 멋지게 완성되지 않더라도,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다른 이의 우주에서 그 그림이 미학적으로 완벽할 수 있는 것임을. 모든 것을 너무 못하기 때문에 잘 할 가능성이 있다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세계관처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블린은 결국 무한대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멀티버스로 걸어 들어간다. 각 우주에서 가장 개연성 없는, 완벽히 가능성의 영역에 존재하는 행동들을 하며 자유자재로 버스 점프를 하는 수준까지 성장한다. 매 순간의 선택이 다른 가능성의 파도 위 징검돌처럼 고독하게 떠 있을 뿐일지라도, 에블린은 그렇게 묵묵히 삶을 걸어 나가기로 결심한다. 아직 가능성을 두려워 하는 모든 우리가 그래야 하듯이.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