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잘린 손가락’이었을까. 은희(박지후)와 다툰 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지숙(박서윤)이 학원에 나온 날, 어색해진 은희와 지숙을 바라보던 한문학원 선생 영지(김새벽)는 수업을 진행하는 대신 노동가요 ‘잘린 손가락’을 불러준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 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잘린 손가락 묻고 오던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

피 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

하루하루 지쳐진 내 몸 쓴 소주에 달래며

고향 두고 떠나오던 날 어머니 생각하며

술에 취해 터벅 손 묻은 산을 헤매고 다녔다오

터벅터벅 찬 소주에 취해 헤매어 다녔다오”

물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우린 영지가 운동권 학생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순간 아이들에게 들려줄 노래로 평범한 가요 대신 노동가요를 떠올린 거겠지. 하지만 수많은 노동가요 중 왜 하필 ‘잘린 손가락’이었을까.

‘잘린 손가락’은 얼핏 상실을 이야기하는 노래처럼 들린다. 화자는 덜걱덜걱 돌아가는 공장 기계에 손가락이 잘렸다. 그럼에도 (짐작할 만한 사정으로 인해) 병원에 가서 접합수술을 하는 대신 그 손가락을 야산에 묻어야 했다. 피 묻은 작업복으로 돌아오던 밤을 화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서 잘려 나간 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오늘도 술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묻은 산을 헤맨다. 이 거대한 상실의 무게.

하지만 다시 가사를 곱씹어보면, 노래는 상실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상실을 안고 그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압도적인 상실 이후에도 화자는 하루하루 지친 몸을 술로 달래가면서 살아간다. 상실과 훼손이 슬픈 건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상실과 훼손의 순간이 지난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는 빈 자리를 어떻게든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개포상가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걸린 지숙이 은희네 전화번호를 대고 풀려났으니, 그 배신 이후 은희와 지숙의 관계가 완전히 예전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실과 훼손 이후에도 두 사람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인 은희와 지숙이 ‘잘린 손가락’의 정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지는 제가 아는 노래를 불러준다. 상실과 훼손을 안고 살아가는 법에 대한 노래를.

<벌새>(2019)가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도 여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1994년 봄,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이 된 은희의 삶은 무언가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아파트 층계참에서 몰래 입을 맞추고 웃었던 남자친구 지완(정윤서)은 아들이 ‘방앗간 집 딸’과 만나는 걸 못마땅해 한 지완 엄마(이선주)의 손에 이끌려 떠난다. 은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후배 유리(설혜인)는 방학이 끝나고 나자 놀랄 만큼 무심하고 차가워져 있다. 술에 취해 집을 찾아왔던 외삼촌(형영선)은 알 수 없는 넋두리를 남기고는 집을 나갔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의 형태로 돌아온다. 엄마(이승연)는 이따금 은희가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 뒷모습은 무서울 만큼 낯설다. 심지어, 그 해엔 영원히 한반도 북쪽을 지배할 것 같았던 ‘수괴’ 김일성마저 세상을 떠났다. 은희의 세계를 구성하던 것들은 그렇게 하나 둘 씩 부서지거나 멀어진다.

그래도 은희에겐 영지가 있다. 새로 학원에 온 선생 영지는, 은희에게 다른 어른들이 해주지 않는 말들을 해준다. 오빠 대훈(손상연)에게 맞았다는 은희의 이야기를 들은 영지는, 나중에 은희를 병문안 간 자리에서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폭력적인 재개발에 저항하는 현수막을 걸어둔 철거민들이 불쌍하다고 은희가 말하면 영지는 이렇게 답해준다.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는 마.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영지는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 세상의 뒷면을 은희에게 이야기해주고, 그걸 사려 깊게 바라보는 방법을 일러준다.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냐는 은희의 질문에 영지는 그 순간을 견디는 법을 알려준다.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 것도 못할 거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은희는 영지를 통해서 가장 예민한 시기를 견디는 법을 배운다. 무기력을, 상실을, 자기 혐오와 자책을 견디는 법을 일러준 건 영지였다.

그리고, 1994년 10월 21일이 온다. 처음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은희와 은희 가족은 은희의 언니 수희(박수연)를 제일 먼저 걱정한다. 등하교를 위해 매일 다리를 건너야 하는 수희의 안녕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수희가 무사히 귀가한 날의 저녁, 모두가 안도한 마음으로 식탁에 모인 자리에서 대훈은 갑자기 오열한다. 대훈이 무엇을 그렇게 슬퍼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소중한 가족이 돌아왔다는 안도감? 그렇게 소중한 가족인데 그것도 모르고 은희를 때렸다는 죄책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향한 애도? 영화는 애써 그 울음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울고 있는 대훈도 잘 모를 것이다. 뭔지도 모를 감정들이 울컥울컥 눈물과 울음의 형태로 대훈의 몸을 빠져 나간다.

정작 그 날 영지가 성수대교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은희는 울지 못한다. 상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알려줬던 스승이 세상을 떠났다는데, 이런 상실에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은희는 알지 못한다. 대신 은희는 빈 자리를 오래 바라본다. 영지 엄마(길혜연)의 안내로 영지가 쓰던 주인 잃은 방을 둘러보고, 언니와 함께 가운데가 뚝 하고 끊어진 성수대교 교각의 빈 자리를 바라본다. 이 거대한 상실을 어떻게 견디면 좋지? 언제나처럼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했던 은희는, 영지가 남기고 간 마지막 편지를 읽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은희가 세상을 떠난 영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떤 상실은 인간의 삶의 궤적을 폭력적으로 뒤틀어 버리니까. 하지만 그 상실 앞에서 은희는 영지가 남기고 간 삶의 태도를 끌어 안는다. 영지가 알려준 생의 비밀을 자기 삶 속에서 온전히 실천하고 사는 것으로, 은희는 매일 영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빈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되, 그것만이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그게, 은희가 자신의 세상이 무너졌던 1994년을 견뎌낸 방법이었다.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