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부와 성공을 좇아 쉼 없이 달려온 기업 총수 움베르토 수아레즈(호세 루이스 고메즈). 바닥에서 시작해 정상에 섰으니 누구보다 득의만만할 것이다. 한데 80세 생일을 맞은 그의 표정은 어찌 된 일인지 영 마뜩잖다. 성대한 파티에 질렸고, 어떤 선물도 시큰둥하다. 늘그막에 접어든 억만장자가 여전히 손에 넣지 못한 게 있기나 한 걸까. “다르게 기억되고 싶어. 뭔가 남기고 싶어.” 움베르토의 혼잣말은 뭔가 더 갖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은 아닌 듯하다. 그럼 뭔가.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서막을 여는 건 다름 아닌 불멸의 욕망이다. 급작스레 치밀어 오른 움베르토의 욕망은 곧장 대형 프로젝트 착수로 이어진다.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끊임없이 회자될 지상 최고의 걸작 만들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격언을 그는 몸소 시연할 수 있을까.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원제는 ‘Competencia Oficial(Official Competition)’. 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을 가리키는 문구다.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이 집결한 일차적 목표이기도 하다. “훌륭한 영화”는 어떻게 탄생하나? 관객을 만족시키고 평단을 전율시키려면 어떤 요건을 갖춰야 할까? 사실 움베르토가 생각하는 세기의 걸작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원작, 감독, 배우 모두 최고여야 한다. 읽지도 않은 노벨문학상 소설 판권부터 냅다 구매한 움베르토는 뒤이어 얼마 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감독 롤라 쿠에바스(페넬로페 크루즈)를 영입한다. 천재라는 칭송과 괴짜라는 야유를 동시에 듣는 롤라는 제작자 움베르토 못지않게 야심으로 가득하다. 그는 배우들의 스승이라 불리는 연극계 거장 이반 토레스(오스카 마티네즈)와 유럽을 넘어 할리우드까지 접수한 월드 스타 펠릭스 리베로(안토니오 반데라스)를 주연으로 점찍는다.

인기와 권위, 창의와 연륜을 한꺼번에 흡수한 ‘필승 트리오’는 자신만만하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조합, 걸작 완성은 끽해야 시간문제처럼 보이는데 예상과 달리 영화 제작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는다. 파국으로 치닫는 ‘형제의 난’을 실감 나게 소화할 배우를 고르는 과정에서 롤라는 대립을 의도한다. 이반과 펠릭스는 정반대 영역에 속한 배우이고, 롤라가 기대한 대로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욕망은 번번이 충돌한다. 이반이 “멍청이들의 엔터 사업에 놀아나는 라티노”는 되지 않겠다며 자존심을 세우는 동안, 펠릭스는 쇼비즈니스 업계에서 한몫 두둑이 챙길 계획을 세운다. 첫 리허설에서 각자 연기론을 펼치는 신경전을 시작으로 두 남자의 반목은 갈수록 과열된다. 한편, 롤라는 “내가 진짜로 느껴야 한다”며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반복한다. 연출자의 명령에 따라 배우는 감정을 3으로 표현했다가 5로 올리고 다시 6.5 정도로 맞춰야 한다. 롤라는 자아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그간 배우들이 모아둔 트로피를 분쇄기에 갈아버리는가 하면, 공중에 들어 올린 커다란 바위 아래에 배우들을 앉히고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 메타 영화이자, 비릿한 농담을 연발하는 블랙코미디다. 조롱과 냉소로 가득 찬 영화에 과장은 있어도 가식이 끼어들 틈은 없다. 배우들은 저마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영화계 유명 인사를 과잉된 캐릭터로 연기한다.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지만 뒤에선 남몰래 수상 거부 소감을 연습하는 이반, 연기와 작품보다 인스타그램 업로드 영상에 에너지를 쏟는 펠릭스. 둘 다 별수 없는 속물이긴 마찬가지다. 까놓고 말해 이반에게 연기는 지식과 교양을 뽐내는 나르시시즘의 장이고, 펠릭스는 연기를 화려하게 지어낸 거짓말 정도로 여긴다. 기만과 유치한 행태를 일삼는 두 인물 사이에서 롤라는 폭군으로 군림한다. 연출자로서 권력을 상실하지 않겠다는 듯 심술궂게 웃으며 갈등을 조장하는 식이다. 상업적 목적으로 기획하고 대규모 자본까지 투입한,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예술영화’ 제작 현장의 이면을 카메라는 신랄하게 묘사한다.

노련한 배우들이 얽히고설킨 서사를 든든하게 떠받친다. 육중한 가발을 쓰고 등장한 페넬로페 크루즈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다. 폭발하듯 멋대로 뻗친 붉은색 곱슬머리처럼 예술을 향한 롤라의 열망은 뜨겁다 못해 광포하다. 롤라는 통치자의 자리를 선점하여 기행을 벌이고 육체적 매력을 과시하며 영향력을 확인한다. 서로 다른 욕망이 힘 겨루는 현장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에서 그는 자칫 범상하게 그려질 수 있는 인물에 미스터리한 매력까지 부여한다. 오스카 마티네즈와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능청스러운 콤비다. 그들은 꼴사나운 캐릭터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서로 모욕하고 치부를 들추는 일에 몰두한다. 오스카 마티네즈는 이반의 근엄한 가면 밖으로 슬며시 새어 나오는 열등감을 포착하고,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펠릭스의 거드름 피우는 말투 사이에 불안을 심어 놓는다. 이반과 펠릭스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집착하는 속 좁은 인물이지만, 두 배우 덕분에 그들은 마냥 짜증 나는 악역이 아니라 즐기며 따라갈 만한 캐릭터로 입체화된다.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엔딩을 제외한 대부분 분량을 특정 공간에서 촬영했다. 인물들이 9일간 연기 리허설을 진행하는 동안, 영화는 회의실은 물론 극장 시설까지 완비한 움베르토의 개인 저택을 세트장으로 활용한다. 앞뒤가 다른 이들의 속내를 투명하게 비추려는 듯 카메라는 종종 사방이 창으로 뚫린 공간에 위치한다. 근사하고 견고한 석조 건물에서 우스꽝스러운 연기 대결이 벌어지고 원색적 비난이 범람하다가, 끝내 ‘형제의 난’에 버금가는 비극이 닥친다. 겉보기엔 고상하지만 폭력과 배신을 은폐할 만큼 고립된 저택. 어쩌면 이 거대한 건축물은 결국 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영화를 상징하는 것 아닐까? 영화 말미, 영화제에 참석한 롤라는 “영화는 확언이 아니며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다”라는 말로 기자들의 질문을 모조리 튕겨낸다. 그와 같이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정교한 비판 대신 무뚝뚝한 유머를 선택한다. 다만 롤라가 세상에 내놓은 결과물이 “끝내주는 영화”라고 호평받는 순간,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했다는 찬사를 획득함으로써 영화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풍자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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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