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

“헤어지자.”

상우(유지태)는 모른다. 사실 사랑만큼 변하기 쉬운 것도 없다는 것을, 사랑이라서 변한다는 것을, 이미 자신의 사랑도 변해 있는 데다가, 애초에 두 사람의 사랑이 같은 것이 아니었음을.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속초 역에서 은수(이영애)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상우는 꾸준히 불쾌함을 느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은수는 “근데 좀 늦으셨네요”라고 차갑게 쏘아붙이고, 녹음기사 경력이 5년이라는 상우의 말에 “5년 치고는 잘 하네”라며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그런 순간마다 당황하고 묘하게 불쾌했으면서도, 상우는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은수에게 마음을 준다. 사람의 마음이라서 변한 것이고, 그래서 사랑이 된 것이다.

라면을 먹자는 말도 은수가 먼저 했고, 자고 가겠냐는 제안도 은수가 먼저 했다. 상우는 그게 자연스럽게 마음을 여는 신호라 생각했다. 그랬으니 각자 따로따로 잠들었다가 일어난 아침, 은수에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던 거겠지. 은수도 상우가 싫지 않았으니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춘 거겠지만, 상우의 입맞춤은 점차 격렬해진다. 외로움이 싫어 곁에 누군가가 필요했던 은수와, 사랑 앞에서 단순하게 직진만 알던 상우의 속도는 이렇게 다르다. 암묵적 동의라 생각하며 은수의 목덜미를 파고 들던 상우를 떼어내며 은수는 말한다.

“좀 더 친해지면 해요. 응?”

영화를 본 사람들은 흔히 은수의 이런 망설임을 ‘여우짓’이라고 쉽게 말한다. 아마 상우가 은수의 강릉 아파트에서 나오는 장면 바로 뒤에, 상우가 은수와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은 채 은수의 등을 긁어주는 장면이 나와서 그런 걸 테다. 어차피 바로 다음 씬에서 헐벗은 살갗을 서로 맞댄 채 “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고 말하는 사이가 될 거면서, 뭐 하러 그렇게 밀고 당기느냐고.

글쎄, “좀 더 친해지면 해요”와 “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 사이에 어떤 시간과 망설임이 있었는지, 관객인 우리는 잘 모르지 않나? 마흔이 되어 다시 보니, 이제는 은수를 좀 알 것 같다. 은수는 계속 겁을 낸다. 이미 한 차례 결혼과 이혼을 경험한 은수는 두 사람 사이가 너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맺는 것도 부담스럽다. 더 천천히, 편안하게, 얽매이지 않고, 그렇게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리라.


2.

“김치 담글 줄 알아?”

“그럼? 못 담글 거 같아?”

“나 어렸을 때,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은 적이 있었거든? 그때 내가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막 울었대. 그 후론 아버지가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으셨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나 했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회한 이야기 끝에, 상우는 숨도 안 쉬고 본론을 붙인다.

“사귀는 사람 있으면 데리고 오래. 아버지가.”

두 사람의 사이가 편안한 일상이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상우는 관계의 본질을 통째로 흔드는 말을 꺼낸다.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꺼내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어. 지금이 좋은 은수는 뒤로 물러선다.

“…상우씨, 나, 나 김치 못 담가.”

“내가 담가 줄게, 내가 담가 줄게.”

치매에 걸린 할머니(백성희)가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싶은 상우는 그 주저를 눈치채지 못한다. 상우에게 지금은 그저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고, 그러니까 어서 은수를 집에 데리고 가고 싶다. 두 사람의 사랑은 같은 것이었을까?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사랑은 생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변한다. 두 사람 사이가 부담 없는 속도로 유지되길 바라던 은수와 어서 결혼이라는 결과 안에 골인하고 싶은 상우는 각자 반대 방향으로 관계를 잡아당기기 시작했고, 당연한 결과로 관계는 늘어난 테이프처럼 쳐지기 시작한다. 설렘과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새 서로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건네는 지리멸렬한 일상이 되었고, 사랑을 은유하는 밀어였던 ‘라면’은 “어서 라면이나 끓여” “내가 라면으로 보여?”라는 대화 속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은수가 상우 대신 실없는 초대손님 지훈(백종학)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편안한 속도로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고, 상우와 헤어질 명분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한때 나란히 묻혀있는 산소를 보며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함께 묻힐까?” 이야기했던 두 사람이지만, 둘의 사랑은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었으며 시작과 끝도 이렇게 달라졌으므로.

그래서, 이별이다. 사랑은 변하는 거고, 사랑이라서 변하는 것이므로.


3.

이별은 힘들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희대의 명대사에 감탄한 탓에, 이별 후에도 한동안 상우가 은수를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이별을 납득하지 못하는 상우는 계속해서 은수를 찾아오고, 은수의 집 앞을 서성인다. 지훈과 은수가 함께 떠난 여행지까지 따라갔다가, 분한 마음에 열쇠를 꺼내 은수가 새로 뽑은 소형차 옆면에 잔뜩 흠집을 내다가 은수에게 걸리기까지 한다. 그 모든 찌질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상우는 은수와의 이별을 받아들인다. 이별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한 사람의 이별과, 이별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사람의 이별은 이렇게나 다르다.

강릉에서의 이별 씬을 강렬하게 기억하는 이들은, 이들이 두 차례 이별한다는 사실도 종종 잊는다. 서울로 찾아온 은수와 서먹하게 대화하던 상우는, 같이 있자는 은수의 손을 조심스레 뿌리치고는 돌아선다. 사람들은 은수가 다시 상우를 찾아와서 같이 있자고 제안하는 대목을 보며 한탄한다. 자기가 차 놓고선 다시 와서 함께 있자는 건 또 뭐람. 그렇게 어렵사리 헤어져 놓고서는.

글쎄, 난 그 이유도 이제 알 것 같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상우가 남기고 간 흔적이 제 생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은수는 그제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던 거겠지.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직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남았는지. 불행히도 상우는 그제야 이별을 납득한 것이고.

〈봄날은 간다〉(2001)는 대체로 상우의 관점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먼저 손을 내밀어 놓고는 망설이는 은수를, 먼저 시들해져서 금세 다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은수를, 헤어져 놓고서는 다시 찾아오는 은수를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은수의 조심스러운 “라면 먹을래요?”는 능란한 선수들의 작업 멘트로 오인받고, 어렵사리 두 번째 이별을 할 때 은수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쉬 이해받지 못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니 알겠다. 이 영화의 행간 속 은수가 얼마나 외로웠을지를. 매 단계마다 얼마나 조심스러웠을 것이며, 무심히 직진하는 상우를 밀어내는 손길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상우가 이별을 늦게 받아들이고, 은수가 상우의 무게를 늦게 깨달았던 것처럼, 이제 왔는가 하고 늦게 눈치 채면 어느새 가 버리는 봄날처럼, 〈봄날은 간다〉 속 은수의 외로움도 늦게서야 내 눈에 보였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