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버전은 마치 시공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 같네

영화의 모티브

2014년, 전주 LG유플러스 협력회사인 LB휴넷 콜센터에서 상담팀장이 자살했다. 고객이 인터넷을 해지하려고 하면 그 마음을 바꾸게끔 설득하는 일을 하는 해지방어 부서였다. 그가 자살하며 남긴 메모에는 수많은 인력의 노동착취와 정상적인 금액 지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언이 남아있었다. 처음엔 쉬쉬하느라 그의 죽음이 어느 업장에서 발생했는지 아는 것조차 알아내기 힘들었다. 사고가 일어났던 LB휴넷은 무노조 사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일로 치부됐고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유족은 산업재해라고 주장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산재로 인정받는 데는 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영화의 시작 지점

그러면 그 5년 사이에 노동 환경은 개선됐을까? 팀장이 사망하고 3년이 흘렀다. 2017년에 고등학교 3학년 홍수연 학생이 취직했고, 5개월 만에 자살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전임 팀장이 처한 노동환경과 거의 비슷했다는 유족의 증언이 있었다. 전화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남아서 채워야 했고, 이것은 회사 내에서 '귀책'이라 불렸다. 그리고 실수로 고객의 해지를 방어하지 못하면 자신의 녹취를 듣고 받아쓰는 업무를 했고, 상담을 잘한다는 직원의 녹취를 들으며 필사를 시켰다. 그리고 원청인 LG유플러스는 끝까지 사과는커녕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학교와 교육청은 홍수연 학생의 죽음에 대해서 '실족사'라고 표현했다.

실제 영업장에서도 방어 성적을 전시해놨다.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영화의 이미지와 연출

<다음 소희>(2023)는 위 사건을 영화화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찾아보면 영화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시종일관 블루톤의 스산한 톤을 보여주고 있으며 소희(김시은)가 혹한에도 불구하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차가운 이미지를 연속으로 배열되지만,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것들은 뜨겁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2부를 끌어가는 캐릭터 또한 너무 뜨겁다는 것이다. 유진(배두나)은 소희가 다니던 학교의 교감이 내뱉는 무책임한 말에 폭력을 행사한다. 형사의 그런 행동에 어이없을 수 있지만, 유진이 관객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그녀는 필요한 타이밍에 필요한 행동을 했다. 그러나 유진의 엄마와 관련한 어떤 연관이 있는 듯한 힌트만 던져놓고 풀지 않은 채, 급작스레 주먹을 날리는 부분은 유감스러운 요소가 있다. (원래는 유진은 10년간 엄마의 병수발 후, 엄마가 사망하자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는 설정이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나 <미안해요, 리키>(2019)가 고요히 맥동할 수 있는 이유는, 맹렬하고 을씨년스러운 이야기가 덥혀진 것이 아닌 식은 그릇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유진만큼이나 연출자의 태도도 뜨겁다. 그러나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무리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 희생된 학생의 주변인을 찾아가 네 탓이 아니라는 따스한 위로만 건넨다. 영화의 책무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소희>에서 연출자 정주리 감독이 던지는 논점은 소중하다. 감독의 다음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한 번쯤은 반드시 보고 상념에 잠길 필요가 있는 영화다.


1부의 끝과 2부의 시작. 가상의 컷이지만 상상만으로 비수가 꽂힌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협력업체나 학교는 자신들이 중간에서 피해지인 양 주장한다. 한국인의 전매특허인 떠넘기기도 빛을 발한다. 그래, 그대들의 말대로 정말로 피해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선 단체로 행동해야 한다. '정치'라는 단어를 쓰기 전에, '정치적'이란 무엇인지 그 효능감에 대한 지각의 밀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학교장이라면 주변의 학교장들과 교류하며 현재 부당한 것이 무엇이며, 학생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작금의 관행이 옳지 못하다면 성과만을 쫓을 것이 아니라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에 옮겨야 했다. 학생의 편에서 행동해주지 않는 교육감이나 그 상위의 권력에 대해서는 다음 선거에서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표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부족하다면 언론을 찾아가 호소라도 하는 것이 맞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그건 자신이 하는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는데서 나온다. 생각의 무능력은 곧 평범한 악으로 변모한다. 맥베스 같은 노골적 악의 화신만이 악마가 아닌 것이다.

타인의 입장과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 결정적 결함을 지니는 데는 극중 기업이 더하다. (실은 모티브가 된 현실과 별 차이가 없다) 그 관행이란 더 지독하다. 그냥 니네가 돈을 안 준 거잖아. 기업의 제1소임은 이윤이지만 그것이 노동자의 노동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듯한 현상을 보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10대에게 이중 계약서를 쓰고 가스라이팅 하며 악마화하는 것은 선을 넘은 행위다. 협력업체의 사람들 중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고용기업으로부터 하청을 받았을 뿐이고, 어쩌면 희생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 수 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을의 전쟁이 벌어지는 가동 원리가 어떻게 건조되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인 것이다. 성찰 없이는, 이런 일은 영원히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땐 정말 숨이 턱하고 막힌다. 힘이 남아있어야 도망간다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데 다 타버리면 그마저도 할 수 없다. 그런 식의 여정도 거쳐보지 않은 협력업체의 간부는 얼마나 안락하고 일방적인 삶을 살아왔던 걸까. 그렇게 연소가 끝나 숯이 된 노동자는 어딜 가든지 간에 다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혹이 자살로 이어지는 것은 무리한 경과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아직 10대 아닌가, 왜 걷기도 힘든 지점에서 시동도 걸기 전에 자빠져야 했을까.


사실은 이 버전도 영화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관람 후 이 포스터를 보면 어떤 심상이 떠오르는가?

왜 '다음'소희 인가

유진이 교감에게 주먹을 날릴 때에는 관객 입장에서 통쾌함을 느꼈을지는 모르나, 소희의 장례식에서 보면 그는 슬퍼하고 있다. 어떤 교육자가 학생이 죽는 일을 나 몰라라 하겠는가? 자신이 성과만 보고 달리는 일이 학생의 목을 죄었다면 왜 고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영구차 앞에서 울던 교감 선생의 마음이 진심이라 생각한다면, 적어도 이 영화를 본 관계자들은 (적어도 관객들은) 생각과 행동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다음 소희>라는 제목에서 '다음'은 없어야 한다는 뜻일 거다. 그러나 중의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다음'은 관객 당신이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를 탓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전력으로 막아야 하는 일이 될 것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