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소파만큼 거대한 남자가 땀을 잔뜩 흘리며 헐떡이고 있다. 찰리(브렌든 프레이저)는 걷는 건 물론이고 앉은 자리에서 크게 웃는 것도 힘겨워한다. 비만으로 인한 울혈성 심부전을 앓는 탓이다. 제대로 숨쉬기조차 어려운 모양인지 그는 연신 쌔근거리고 그르렁댄다. “들어봐도 돼?” 오래전 이혼한 아내 메리(사만다 모튼)는 오랜만에 조우한 찰리에게 울분을 쏟아낸 뒤 묻는다. 광활한 바다를 누비는 덩치 큰 동물의 호흡을 연상케 하지만 사실 찰리의 가슴에서 들리는 건 죽음의 소리다. “병원 안 가면 주말쯤엔 죽어.” 간호사로 일하는 유일한 친구 리즈(홍 차우)의 경고를 듣고도 찰리는 살 방도를 궁리하지 않는다. 대신 8년 전에 헤어진 딸 엘리(세이디 싱크)를 불러들인다. 아빠가 자기를 쓰레기처럼 버렸다고 여기는 엘리는 이제 와서 부모 노릇 하려는 찰리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물론 그에게도 사정은 있다. 찰리는 가정을 이룬 뒤 동성 연인을 만났고, 이혼하는 과정에서 양육권을 잃었다. 그의 연인은 그 이후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는 잔인한 얼굴로 찰리에게 갖은 욕설과 모욕을 퍼부어댄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찰리는 그런 엘리의 모습에서 희망과 구원의 실마리를 본다.

<더 웨일>은 2012년 초연된 동명 연극이 원작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블랙 스완>(2010)을 끝내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다가 연극을 접했고 곧 원작자 사무엘 D. 헌터와 함께 영화화 작업에 돌입했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광대한 탐구”라며 호평받은 원작의 뼈대와 설정은 고스란히 영화의 특징이 됐다. “주인공이 내내 소파에 앉은 채 진행되는” 연극처럼 영화 역시 한정된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 현관 밟는 게 최대의 외출인 찰리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도 어두컴컴한 집을 좀처럼 떠날 줄 모른다. 곧 죽으리라는 말을 듣기 전부터 찰리는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연인을 잃고 시작된 폭식은 그를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만들어 놓았다. 원작자의 이야기가 투영된 각본엔 비만인이 겪는 신체적, 사회적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낡은 노트북으로 원격 강의를 하는 게 찰리가 하는 사회 활동의 전부인데 그마저도 웹 카메라는 꺼둔 채다. “누가 날 자기 인생에 끼워주고 싶겠어.” 찰리는 자기 비하의 늪에도 빠져있다. 그런 와중에 영화는 너무나도 힘겹게 자위하고, 기름 범벅이 된 얼굴로 치킨을 뜯으며, 입에 음식을 마구 쑤셔 넣다가 전부 토해버리는 찰리의 모습을 태연히 보여준다. 그의 자조처럼 찰리는 정말 모두에게 외면받을만한 존재일까?

리즈

다른 모든 메시지에 앞서 영화가 일러주는 건 찰리가 문밖의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다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리즈와 함께 깔깔거리고 웃을 때 찰리는 세상 누구보다 낙천적인 얼굴이다. 하지만 자기 상태를 비관하고 낙담할 땐 곁에 가기 두려울 정도로 자제력을 잃는다.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지식인이며 귀여운 유머 감각을 지닌 평범한 이웃이다. 그런데 엘리를 대하는 태도에선 부성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집착이 엿보인다. <미이라> 3부작의 스타이며 어두운 공백기를 지나온 배우 브렌든 프레이저는 온화한 기운을 바탕으로 이토록 모순적 인간의 초상을 완성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명료한 목소리는 빤할 게 분명한데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한다. 커다랗고 깊은 눈은 그의 마음속에 육중한 슬픔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모질게도 세상은 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주었다. 본인의 종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의 연인은 남자를 만난다는 이유로 교회는 물론이고 집에서도 쫓겨났다. 그리고 잠과 음식을 거부하며 죽어갔다. 연인들의 몸은 개인과 세상의 불화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난폭하게 표출된 전장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찰리는 <더 레슬러>(2008)의 랜디(미키 루크)를 비롯한 아로노프스키의 다른 주인공들처럼 삶의 고통 속에서 육신의 파괴에 직면한 연약한 인간이다.

토마스

인생이 고단한 건 찰리의 눅눅한 아파트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다. 곧 세상에 종말이 닥친다고 믿는 새 생명 선교회의 토마스(타이 심킨스)도 그중 하나다. 이 어린 신도는 심장마비 직전의 찰리를 우연히 발견한 후로 그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갖은 애를 쓰는 중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신의 존재를 설파하는데 안쓰러울 만큼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일종의 고해성사를 통해 겨우 내뱉은 말로 짐작하건대, 그는 남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었으나 도무지 그 방법을 찾지 못해 전도의 길로 흘러든 가엾은 떠돌이다. 그에 비하면 엘리는 폭주족이나 다름없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여기저기 들이받고 다니는 행태는 그저 반항적인 10대 청소년의 가벼운 일탈을 훌쩍 벗어난다. 엘리는 툭하면 거짓말과 협박을 일삼고 타인의 사진을 함부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며 학교에선 낙제의 위험에 처한 위태로운 아이다. 엄마는 엘리를 두고 사악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찰리는 그 모습마저 두둔한다. 평생 모은 돈도 딸에게 전부 줄 요량이다. 찰리는 화만 내는 엘리에게 넌 완벽하다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쯤 되면 후회와 용서의 가족 드라마로 마무리될 법도 하건만, <더 웨일>은 그런 전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찰리의 딸, 엘리

결말로 향하는 길목에서 영화는 엘리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게 만드는 모호한 사건 하나를 보여준다. 등장인물의 신변과 관련된 이 일은 한편으로 엘리가 타인에게 어느 정도로 잔혹하게 굴 수 있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엘리에게 따스한 내면과 보살펴주어야 할 슬픔이 있다는 증거로 기능하기도 한다. 상처를 주려던 건지, 도움을 주려던 건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극 중 인물의 말처럼, 행동의 의미는 분명히 제시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몇 차례 반복된 원격 수업에서 찰리는 늘 주관적 글쓰기의 가치와 저자의 진실성에 관해 역설해왔다. 그는 계속해서 되뇐다.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항상 솔직해야 한다! 찰리가 『모비 딕』에 대한 엘리의 에세이를 그토록 사랑하는 까닭도 그것이 매우 솔직한 글이기 때문이다. 찰리는 엘리의 선택에서 구원의 제스처를 읽어내지만, 리즈는 찰리의 두서없는 말이 병증으로 인한 착란 증세가 아닌지 의심한다. <더 웨일>은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에 구원이 깃든다고 말한다. 애달픈 몸짓의 끝에는 우리가 겨우 스스로를 구할 뿐 타인은 구할 수 없다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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