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을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주-


제주도에서 남편이 사진을 보내왔다. 눈 덮인 한라산이 멋지게 담긴 사진이다. 그 설경 앞으로 남편과 고등학교 동창들이 나란히 섰다. 그런데 어째 남편 표정만 일그러졌다. 웃고 있는 얼굴들 속 그 얼굴이 유난히 눈에 띈다.

“나 죽을 뻔했어” 사진과 함께 날아온 문자. 그제야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는데... 아뿔싸, 남편 차림새가 영 시원찮다. 얼굴 절반을 가려주는 '방한용 넥워머'를 착용한 친구들 틈으로 휘황찬란 초록색 '쿨 워머'를 두른 남편의 모습이 도드라진다. 게다가 남편의 손에만 등산 스틱이 없다. 미끄러지지 않으라고 신발에 착용하는 아이젠은 어디서 벗겨졌는지 왼쪽 발에만 대롱대롱 달려 있다.


등산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영화 <히말라야>는 엄홍길 대장이 산을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얼굴은 눈에 반사된 햇빛으로 검게 그을렸고 며칠을 산에만 있었는지 수염이 덥수룩하다. 그리고 엄홍길의 뒤에는 대여섯 명의 대원들이 줄지어 있다. 엄홍길과 대원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한걸음 한걸음 정상을 향해 오른다.

이 영화의 특이점은 엄홍길(황정민)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홍길과 함께 등산하는 대원들의 서사를 폭넓게 다룬다. 특히 영화는 박무택(정우)과 박정복(김인권)이라는 인물에 집중했다. 산을 정복한다는 ‘승리’ 스토리보다 산으로 엮인 산악인들의 끈끈한 '우정'을 훨씬 깊이 있게 다뤘다.

엄홍길과 이들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열정이 지나치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박무택과 박정복은 엄홍길의 결정에 반기를 든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이들의 모습에 엄홍길은 산악인으로 기본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엄홍길은 엄포를 놓는다. “너희들 두 번 다시 산에 오를 생각하지 마.”

하지만 말 한마디로 이들의 인연이 끊어질 리 없다. 다음 등반을 위해 팀을 꾸리던 중 막내 팀원 후보로 박무택과 박정복이 언급됐다. 당연히 엄홍길은 이들의 합류를 반대한다. 그러나 박무택과 박정복의 노력이 이어진다. 엄홍길의 가족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고, 엄홍길의 다소 버거운 과제들도 묵묵히 치러내는 체력과 근성을 보여줬다. 그렇게 그들은 팀이 된다.

엄홍길에게 박무택과 박정복이 있었듯 남편에게는 친구들이 있었다. 산에 대해 무지한데다 준비성이라곤 하나 없는 남편은 친구들이 없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다.

다이소에서 급하게 산 오천 원짜리 아이젠은 한라산 초입에서 수명을 다했고, 방수가 되지 않는 옷을 입은 죄로 엉덩이에는 커다란 물자국이 남았다.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어야 하는 등산 복장의 정석도 어겼다. 집에서 제일 따뜻하고 두꺼운 패딩을 입고 갔다가 고지마다 달라지는 온도에 곤란을 겪었다.

거기에다 저질 체력까지 보태졌으니 5천 원짜리 아이젠과 같은 운명을 맞이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남편을 친구들이 이끌고 밀어줬다. 자신들의 아이젠을 친히 벗어주고 낑낑대는 남편의 배낭을 들어줬다. 남편이 포기하겠다고 말할 때마다 호통치는 것도 친구들의 몫이었다.


산에 오르막 내리막 있듯, 인생도 똑같네

박무택과 박정복이 합류하자 엄홍길 팀은 승승장구다. 그들의 등정은 재밌고, 따듯하고, 스릴이 넘친다. 14좌 완등으로 ‘아시아 최초’ 타이틀을 걸겠다는 목표도 ‘세계 최초’인 16좌로 올려 잡았다. 동료들만 있다면 엄홍길은 그 어떤 것도 무섭지 않다.

하지만 영화가 평화로워지자 거대한 산이 등장한다. 건강 악화라는 크고 험난한 산. 추락 사고 때 철심을 박았던 엄홍길의 다리가 결국 고장 났다. 오른쪽 발은 앞꿈치로만 걸어야 하고 평생 특수 제작 신발을 신게 됐다. 걸을 수는 있겠지만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진단이 내려진다. 결국 엄홍길은 산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투박한 등산화 대신 세련된 구두를 꺼내 신는다. 아끼던 산악 장비도 박무택에게 넘겨준다.

산을 오르는 것은 엄홍길의 인생에서 오르막이었다. 14좌 완등을 이뤘을 때에 엄홍길의 인생은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이제 엄홍길은 내리막을 택했다. 다치지 않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오는 연습을 시작한다.

산은 우리의 인생을 닮았다. 오르막에 힘들지만 내리막은 조금 편하다.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 싶을 때에는 꼭 내리막이 나타난다. 그리고 등산이든 인생이든 함께하는 동반자가 있다.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며 험하디 험한 여정을 함께 걸어간다. 그리고 그 산이 허락해준다면, 그 인생이 받아들여 준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편안히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등산하고 싶네!

영화를 보던 남편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한라산의 흑역사를 잊을 만큼 <히말라야>의 영상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히말라야> 속 에베레스트의 모습은 CG가 제대로 구현했다. 실제로 <히말라야> CG 팀은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서 한 달간 머물며 6200m까지 등반했다. 그러면서 작업에 필요한 소스를 직접 촬영했다. 실제 장면에 기가 막힌 CG가 더해지자 거대한 자연을 눈앞에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전해진다.

등산 욕구를 끓어오르게 했으니 이 영화를 선택한 나의 묘수가 통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운동이 실로 필요했다.

우리 부부는 운동 부족형 인간이다. 체력을 키우겠다고 1년 치 헬스 이용권을 끊었다가 기부 천사가 되었고, 부모님을 따라 시작한 골프는 늘지 않는 실력에 손을 놨다. 결국 만만해 보이는 등산에 눈을 돌렸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등산을 위해 사놓은 트래킹화는 몇 달째 신발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트래킹화를 산 데에도 나름의 슬픈 이유가 있다. 작년 겨울 등산을 시도했다 쓴맛을 맛봤기 때문이다. 동네 뒷산을 올랐을 뿐인데 오르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어린아이들이 우리 부부를 추월할 때는 부끄러움을 넘어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등산화 구매라는 핑계를 택했다. 장비 탓이라도 해야 우리의 저질 체력이 조금 덜 부끄럽지 않겠는가.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오를게요

박무택은 친구들과 에베레스트에 간다. 엄홍길이 은퇴를 했기 때문에 자신이 대장이 되어 팀을 꾸렸다. 엄 대장 대신 박 대장이 대원들을 이끈다. 하지만 변화는 항상 사건을 만드는 법. 박무택과 함께 등반을 하던 대원이 절벽에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

박무택과 연결된 끈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지만, 이번에는 박무택이 문제다. 동료를 구하다가 잃어버린 고글 때문에 그의 눈이 햇빛에 노출됐다. 고글이 없는 상태에서 햇빛을 보게 되니 설맹(눈에 반사된 자외선으로 인한 각막 손상)이 왔다. 박무택의 시야는 점점 흐려진다.

결국 박무택은 조난됐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발버둥 쳤을 테지만 눈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구조대도 박무택을 구하는 것을 포기한다. 해는 이미 졌고 영하 40도가 넘어가는 상황에 구조 활동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복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동료가 뻔히 죽어가는데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 사람이 없으면 산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박정복은 산을 오른다. 목이 터져라 박무택을 부르며 암흑천지를 걷고 또 걷는다.

하지만 박무택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온몸은 동상이 와서 꽁꽁 얼었고 숨을 쉴 때마다 쌕쌕거리며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박정복은 그런 박무택 옆에 눕는다. 그리고 박무택이 쓸쓸히 죽어가지 않게 그 옆을 지킨다.

이번에는 은퇴한 엄홍길이 나선다. 동료의 시신을 산에 둘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엄홍길은 박무택과 박정복의 시신을 찾아 오기로 마음 먹는다.

우선 뿔뿔이 흩어진 대원들을 찾아간다. 원정대를 꾸려야 에베레스트에 다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고 있다. 결혼, 취업, 그리고 두려움. 여러 이유로 대원들은 주저한다. 주저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대원들은 옛 동료를 찾기로 마음먹는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명예도 따라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친구들 찾아 나선다. 그들은 그렇게 ‘휴먼 원정대’라는 이름을 달게 된다.


새드엔딩일까 해피엔딩일까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라 할 수 없다. 휴먼 원정대가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신을 찾았지만 악천후와 생각보다 무거워진 시신의 무게 때문에 난항이 거듭된다. 결국 휴먼 원정대는 시신을 산 아래로 운구하는 일은 포기한다.

그렇다고 새드엔딩이라 할 수도 없다. 산을 좋아하던 박무택과 박정복은 산에 남게 됐다. 햇빛 잘 드는 동쪽 능선에 그들의 돌무덤이 만들어졌다.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에베레스트 한켠에 그들의 자리가 마련됐다. 그렇게 그들은 산에 올라갔고, 산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이번 주 주말 등산을 하기로 약속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그야말로 해피엔딩이다. 고이 모셔놨던 트레킹화를 개시했고 껴입을 옷을 꺼내 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상식량도 든든히 챙겼다. 조난이 반복되는 <히말라야>의 후폭풍이랄까. 아, 주말이 오기 전에 무시무시한 약속도 하나 받아 놔야겠다.

내가 혹시 조난되면 목숨 걸고 꼭 구하러 오기!


매일신문 임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