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컨택트> 결말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음을 명시한다.
이런 일이 한 번씩은 있었을 것이다. 시험 기간을 앞두고 마음 쓸 일이 생긴다거나, 이때 쉬어야지 했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업무가 잡힌다거나. 무조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한 일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수난이 되고, 다 끝났다고 단념했던 일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고. 이렇듯 삶은 (평온한 일상이 대부분일지라도) 예기치 못한 사고들의 연속이다. 녹록지 않은 '사고'들을 마주할 때면 늘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2016년 영화 <컨택트>다.
<컨택트>는 세계 각지에 미확인 비행 물체가 나타나면서 시작한다. 어떻게 봐도 현 인류의 과학력을 훨씬 뛰어넘는 비행체의 등장에 각국은 제 나름대로의 대책위원회를 꾸려 이 비행 물체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려 한다.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도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외계 비행체 안에 있는 외계 생명체, 일명 '헵타포드'의 언어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꼭 거대한 음모나 우주적 스케일의 비밀을 품고 있을 듯한 초입으로 시작한 <컨택트>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사건을 담고 있지 않다. 헵타포드들이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왔고 그것 때문에 인류가 큰 혼란을 겪은 건 물론 큰일이지만, 그들이 왔기에 진짜 '큰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외계인이란 소재만 빼면 소박하다 싶을 정도로 별 탈 없이 끝난다. 이 과정에서 루이스가 겪는 커다란 변화를 빼면 말이다.
언어학자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하면서 큰 차이점을 발견한다. 이들의 언어는 분명한 시제가 없다. 글자보다 도형이 가까운 헵타포드의 언어는 그 안에 시간적 구분이 없으며(비선형 철자법) 곧 시간에 대한 개념이 인류와는 판이한 것을 나타낸다. 루이스가 자신의 책 서두에 쓴 것처럼, 언어의 다름은 곧 문화의 다름을 의미하기에. 헵타포드의 언어 중 시제의 부재는 그들이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이 인류처럼 선행이 아닌 비선행에 가깝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봐놓고도 놓친 사실이 드러난다. 영화 오프닝으로 배치된 루이스의 딸 '한나'의 죽음은, 곧 루이스의 미래다. 오프닝으로 만났기에 우리는 한나의 죽음이 루이스의 삶에 있었던 일로 간주하고, 이 사건이 루이스에게 커다란 변화가 줬을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하지만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힘으로써 미래를 볼 수 있는 루이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죽음을 목도한다. 그렇게 절망스러운 미래를, 그는 심지어 외면할 수도 없게 된다.
<컨택트>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하는 마력은 이 순간에 피어난다. 루이스가 이 비극을 받아들이는 순간.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긴 하다. 헵타포드처럼 시간을 본다면,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며 바꿀 수 없다. 루이스가 본 건 '일어날' 미래가 아닌 '일어난' 미래인 것이니까.(시간을 비선형적으로 본다는 개념은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에서 좀 더 재밌게 체험할 수 있다)
<컨택트>의 숭고함은 여기서 발생한다. 이야기의 원형을 파헤치면 그곳엔 대체로 영웅 신화가 있다. 영웅 신화는 길을 떠난 영웅이 위기를 극복하고, 그것이 승리든 패배든 상관없이, 달라진 모습으로 귀향하는 것이 기본 골자다. 즉 이야기는 영웅의 활약에 중심이 있는 듯하나 그것보다 그로써 발생하는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컨택트>의 루이스는 물론 변했다. 그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완벽하게 익혀 그들의 시간관념처럼 시간을 초월한 사람이 됐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달라진 것이 없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두 건이나) 목격하면서도 '기쁘게 맞이하지'라고 못 박기까지 한다. 그는 달라졌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비극일까? 그건 또 아니다. 비극은 신이 정한 운명, 숙명에 따라 살던 인간이 마침내 그 비극으로부터 벗어나려 함에도 실패한다는 패배가 분명 존재한다. <컨택트>는 결국 루이스가 이미 일어난 시간을 살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패배의 결말이 아닐뿐더러 거기에 저항하려는 시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루이스는 도리어 이 시간을 그저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임을 분명히 한다.
모든 것은 사실 정해진 것에 불과하다. 이 명제를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대부분은 (영웅 신화처럼) 저항하려 하거나(비극의 인물처럼) 그냥 포기한다. 전자의 경우 우리가 사랑하는 수많은 이야기의 원형이지만 이른바 '인간 찬가'라고 불릴 만큼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을 그린다. 평범한 사람들이야 감히 운명에 맞설 수나 있을까. 저항하고 싶어도 결국 포기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다고 깨닫는다. 정해진대로 사는 거라면, 나 자신이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한데 무엇 하려 열심히 살고 고민하겠는가. 그래서 고민하거나 행동하길 포기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수동적 허무주의에 도달한다.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자신의 주체성마저 잃고 만다. 루이스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선택한다. 의미가 없기에 일어나는 일 자체와 그것에서 발생하는 스스로의 감각과 경험에 집중하는 능동적 허무주의의 길인 것이다.
<컨택트>가 자꾸 떠오르는 건 훌륭한 영화고 취향에도 맞기 때문도 있지만,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투명한 미래와 변화의 속도가 여느 때보다 빨라진 환경에 불안을 느끼며 나 자신의 삶에서조차 의미를 찾지 못한다. 웬만큼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삶의 순간순간마다 찾아오는 허무가 전보다 짙어졌음을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허무의 시대에, 의미를 찾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의미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서 발화하는 것들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것이다.
많은 관객들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환호할 때, 비단 필자만의 마음이 아니었구나 느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또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극중 모든 멀티버스를 파괴하려는 조부 투바키는 말한다. 모든 멀티버스를 다 들여다봤지만 의미 있는 것이 없다고. 그렇게 모든 걸 체념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에블린(양자경), 그리고 웨이먼드(키 호이 콴)은 다르게 말한다. 그들에겐 다정함, 타인과 마음이 통하는 한 줌의 시간이 있다. 그것으로 그 모든 것의 무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도피의 수단이 아닌 지금의 나와 지금의 시간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어떤 일은 정말 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도, 내게 큰 영향을 준다. 억울하다.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닌데. 어쩌면 그 비슷한 일조차 원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그것을 되돌릴 순 없다. 일어난 일은 언제나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든, 의미를 두든 이미 일어난 그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저 매 순간 일어나는 일을 밟으며 다음, 또 다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건, 이 관념적인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고 쉽게 풀어냈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컨택트>의 마지막. 모든 게 마무리되고, 루이스는 이안(제레미 레너)에게 묻는다. 인생을 통째로 볼 수 있다면 삶을 바꿀 거냐고. 거기에 이안은 대답 대신 루이스를 만난 것이 기적이라고 고백한다. 루이스는 이 대화를 안다. 이안이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그래도 그는 거절하지 않는다. 부정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루이스는 그 모든 걸 알고 동시에 처음 겪으며 이안을 안는다. 중요한 건 '그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다시 한번 제대로 느끼고 기억하는 것뿐이니까. 우리는 영원히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루이스가 이안의 따뜻함을 처음 느끼면서 동시에 기억하듯) 지금의 감각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