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 고장으로 예정에 없던 도시에 불시착한 뉴욕행 비행기. 레이오버 호텔에 묵게 된 여섯 명의 여행객들은 낯섦과 설렘, 비밀과 진실, 폭로와 고백 사이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요동치는 잠들 수 없는 밤과 마주한다.
뜻밖의 목적지에 불시착한 여행객들이 마주하는 진실의 밤이라는 매혹적인 설정의 영화 <여섯 개의 밤>(감독 최창환)은 지난해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 시네마 부문에 상영되면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게다가 독립영화 대표 배우 6인이 각각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해내며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대구 출신의 최창환 감독은 2006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거리를 전전하는 실직한 가장을 주인공으로 한 첫 단편영화 <이만원>이 제32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본격적인 영화 연출을 시작했다. 주로 대구에서 노동문제의 무거운 현실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한때 ‘노동 영화감독’이라고 불린 바 있다. 건설 현장의 산업재해를 현실감 있게 스크린에 옮긴 <호명인생>(2008)과 청년실업을 다룬 <그림자도 없다>(2011) 등 묵직한 주제의식의 단편영화들을 다수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태일 재단에서 개최한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노동영화제’의 연출 제안으로 만들게 된 첫 장편영화 <내가 사는 세상>(2018) 역시 퀵서비스 아르바이트를 하며 DJ를 꿈꾸는 청년의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특히 <내가 사는 세상>은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CGV아트하우스 창작지원상을 수상하며 호평받았고, 이듬해 개봉해 언론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실제 최창환 감독은 서울로 상경한 후 독립영화 스태프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온갖 노동 현장을 전전했다고 밝혔는데, 이러한 감독의 삶의 한 단면이 영화의 소재가 되어 현실감을 높였다.
대구에서 제주도로 터전을 옮긴 최창환 감독은 지역과 밀착된 로컬 영화를 제작하며 복잡한 인간의 심리와 관계를 미학을 탐구하는 작품의 길에 들어섰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이주노동자 2세인 ‘김수’와 그의 친구들이 서핑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 <파도를 걷는 소년>(2019)은 이주 노동자의 현실과 서핑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두 소재를 자연스럽게 엮어 영화제 관객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 작품은 <내가 사는 세상>에 이어 연달아 전주국제영화제(2019)에 초청되어 한국경쟁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다. 2021년에는 전쟁 트라우마로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하는 종군 기자가 운영하는 카페 이야기 <식물카페, 온정>(2021)이 개봉해 일상에 지친 관객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폭넓은 주제와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룬 연출로 완성한 장편영화 4편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잇달아 초청 및 수상한 최창환 감독을 만나 신작 <여섯 개의 밤>과 그의 영화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늘 좋죠. 운이 너무 좋은 거 같아요. 독립영화 찍은 걸 벌써 네 번째로 개봉하는 거니까요. 이건 정말 운이 무지하게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죠? 작품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도 그렇고요.
여행 중에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우연한 이야기.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착안하신 건가요?
방금 운이 좋다고 말했잖아요? 사실 이번 영화도 제작사 덕분인 거 같아요. 벌써 3편을 함께 했으니까요. 김기현 매치컷 대표가 <여섯 개의 밤> 시나리오를 써서 제게 건네줬어요. 그전에도 저랑 작업을 했거든요. 둘이 “독립영화에도 기획영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요즘은 독립영화에서도 제작비 1~2억이면 적은 규모거든요. 그런데 김기현 대표가 어떻게든 제작비를 구해와요. 그리고 저더러 연출을 하라고 하고요. <여섯 개의 밤>은 예전에 <파도를 걷는 소년>(2020) 개봉일을 하루 앞두고 김대표가 숙소에 찾아와서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거죠.
김기현 매치컷 대표와 인연은 언제부터였나요?
<파도를 걷는 소년> 때 처음 만났어요. 제가 제주도에 사는데, 지인 소개로 본 거죠. 그때 당시는 매치컷이 아니라 컬쳐플랫폼이라는 이름의 제작사였어요. 웹툰도 만드는. 웹툰 중에 <파도를 걷는 소녀>가 있었거든요. 아주 트렌디한 내용이었어요. 삶에 지친 한 여자가 외제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서핑하는 내용이었는데, 이걸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영화를 본 적 있느냐’라고 물었죠. 없다고 하길래, 영화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영화 보고 연락이 바로 왔나요?
네. 보자마자 바로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오글거리는 영화는 못하겠다고 했죠(웃음). 그랬더니 “감독님, 청춘과 파도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마음가는 대로 만들라고요. 그래서 각색을 하고 영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김기현 대표도 연출 전공이에요. 저랑 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는데, 너무 고마운 제작자이자 동료입니다.
자,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요. 일단 오프닝 시퀀스에 나오는 한 마디부터 시작하죠. 철학자 마틴 부버의 문장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모든 여행은 여행자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이 있다”라는 문장이죠. 철학 하면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이 말에는 뭔가 매력이 있더라고요. 감독님은 어떻게 이 문장을 접하셨나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딱 들어가 있는 문장이었어요. 제가 마틴 부버 책을 읽어본 건 아니고요. 그저 독일 철학자고, 몇몇 저작을 아는 정도였어요. 영화를 만들면서도 책을 안 읽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문장 자체가 이 영화와 멋지게 맞아떨어진 거 같아서 그대로 갔습니다.
감독님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요?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면요?
지난주에 대구에서 제주도까지 바이크를 타고 간 여행이 기억나네요. 요즘 바이크에 푹 빠졌거든요. 그래서 제 영화에 바이크 타는 장면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요. 대구에서 완도까지 바이크를 타고 가서, 완도에서 제주도행 배를 타는 거죠. 두 시간 반이면 도착해요. 예전에는 목포항에서 제주도행 배를 탔는데, 거긴 배편이 많이 줄었고요, 완도에서는 아직도 하루 세 편이 있어요
여행하시면서 ‘여섯 개의 밤’ 같은 에피소드도 겪으셨나요?
어유, 너무 많죠(웃음). 일어나는 일이 참 많은데, 영화처럼 이렇게 극적인 건 아니고요. 아, 그냥 이런 경험도 많았구나 정도입니다.
더 이상 여쭤보지 않겠습니다(웃음). 배우들 연기가 너무 좋더라고요! 독립영화계의 선수들을 죄다 모으셨던데요. 어떻게 캐스팅하셨는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요.
첫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수정 역할의 정수지 배우는 이전 영화에서 캐릭터가 비교적 분명했어요. 항상 본인의 나이에 맞지 않은 청순하고 착한 대학생 역할을 많이 했죠. 그런데 저는 정수지 배우에게서 다른 면을 봤었거든요. 늘 그렇게 맑고 이쁜 역할을 많이 하는데, 얼굴에서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너무 흔쾌히 하고 싶다고 해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촬영하면서 정수지 배우에게는 “때를 묻히고 싶었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죠. 원래 수정이 캐릭터가 완전 고스트족이에요. 스모키 화장에 완전 블랙으로 옷을 입는. 그런데 연출부에서 너무 이미지가 강렬하다고 하더라고요. 문신은 꼭 그리고 싶었는데, 제작비 여건상 못했습니다. 그냥 블랙 의상에 스모키 화장 정도로 갔죠.
수정이 상대인 선우 역할의 이한주 배우는 원래 그전부터 저랑 다른 작품을 함께 하기로 한 사이에요. 그런데 이한주 배우가요, 눈빛이 정말 좋아요. 가만히 한 곳을 응시만 하고 있어도 멋져요. 그대로 십분을 찍어도 될 것 같은 눈빛이거든요. 그래서 선우 역할을 맡겼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결혼을 앞둔 커플에는 김시은 배우와 강길우 배우를 캐스팅했는데요. 이미 너무 잘 알던 배우라 너무 편했어요. 어떻게 연기하는지도 알고 있었고요. 같이 하자고 하면 할 것 같아서 시나리오를 건넸죠. 사실 제가 좀 낯을 가리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원래 작업을 했던 배우들이랑 같이 하고 싶었어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모녀 역할을 했던 강진아 배우와 변중희 배우는 그냥 제가 보기에 그 역할에 딱 맞았어요. 따로 뭘 하자고 안 해도 그대로 나오면 모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캐스팅했습니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영화죠. 시간이 좀 흘렀는데, 그때랑 지금 편집본이랑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거의 없어요. 타이틀 정도고, 본편 편집은 그대로라고 보셔도 됩니다.
촬영은 총 몇 회차로 하신 거예요?
10회차요. 한 여름에 부산에서 찍었습니다.
영화 촬영하면서 가장 염두에 뒀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김기현 대표에게 말했어요. 이 영화는 무조건 예술영화로 찍을 거라고요. 그랬더니 김 대표가 “그러면 편집권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럼 감독판 만들어 줄 거냐?”고 했더니 그러겠다더라고요. 저는 이 영화를 롱테이크로 간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매 장면이 롱테이크였어요. 그래서 사실 제 첫 편집본 러닝타임은 두 시간 반입니다. 대신 전체 컷 수가 10컷 정도였을 거예요. 아까 이한주 배우 눈빛을 말했잖아요. 선우가 수정이를 바라보는 부분만 10분 가량 찍었어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서 이야기하는 장면도 15분 정도 찍었고요. 두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지원(김시은)과 규형(강길우)이 방에서 싸우는 컷은 23분짜리 테이크였어요. 에어컨도 안 나오는 호텔방에서 두 배우가 정말 열연을 했거든요. 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방을 뛰쳐나가는 데까지. 제가 컷을 외치지 않으니 배우들이 더 열연을 한 거 같기도 해요. 정말 사람 몸에서 ‘단내가 풀풀 난다’는 느낌이 날 정도로 찍었습니다.
두 시간 반짜리 영화가 81분으로 줄었으니 편집에서 덜어낸 씬들이 많겠네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규형이 혼자 수영장에 있는 컷들이나, 지원이 택시를 타고 떠났다가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장면도 찍었는데 다 뺐어요. 사실 전 촬영을 마치고 자신있있었거든요. 두 시간 반짜리 영화인데 한 번 줄여 보라고요. 그런데 편집기사가 첫 편집본을 가져왔는데, 아 글쎄 90분으로 줄어든 거예요. 그걸 나중에 더 줄여서 81분을 만들었으니(웃음).
나중에 디렉터스컷(감독판) 기대해도 될까요?(웃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나와야겠죠. 언론배급시사회 마치고 저녁에 김대표를 만났는데, 관객 3만 넘기면 만들어준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해볼게요. 먼저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수정과 선우가 우연히 밤을 함께 보내게 되죠. 수정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비밀을 처음 만난 선우에게 말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낯선 채 우리는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감독님은 이 커플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사실 시나리오 초고에서는 선우의 비중이 엄청 컸어요. 김기현 대표가 나중에 이 영화의 스핀 오프를 찍게 되면 선우를 주인공으로 만들자고 할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각색하면서, 선우라는 캐릭터가 바로 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영화에서 선우가 입었던 셔츠, 매고 있던 가방, 차고 있던 시계 전부 다 제 거예요. 그럴 정도로 선우라는 캐릭터가 저한테 너무 선명해진 거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선우 역할을 맡은 이한주 배우의 눈빛이 정말 좋거든요. 미지로 떠나는 여행에서 이상형 여자를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수정이는 어떻게 캐릭터를 잡으신 건가요?
수정이가 선우랑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잖아요. 물론 영화에서는 진심이었겠지만, 저는 이런 걸 느꼈어요. 여행지에서 만나는 친밀한 관계, 사람들이 있죠. 하루를 만나든, 이틀을 만나든 아니면 다음 여행지에서 만나든 할 수도 있죠. 그런데 그런 관계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과연 진실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여섯 개의 밤>에서 수정은 울어버릴 정도로 속마음을 털어놔요.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선우는 수정이를 바라보지만, 수정이는 선우에게 눈빛을 주지 않아요. 저는 두 사람이 뉴욕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을 거 같아요.
그렇군요. 저는 마지막에 수정이가 선우에게 한 귓속말 내용이 정말 궁금했거든요. 사실 내 진짜 이름은 00야 라든가, 내 전화번호, 뉴욕 주소는 00야 라는?(웃음)
촬영할 때 두 배우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사실 슛 들어가기 전까지 저한테 말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시나리오대로 했어요. 시나리오에는 ‘노래 불러줘서 고마워’였는데, ‘고마워’라고 말하는 버전도 찍었고요. 사실 그 부분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연출을 하는데, 캐릭터를 만들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정수지 배우에게 뭔가를 확 쏟아내는 연기를 준비해달라고 말하지도 못했어요. 시나리오에도 그 부분을 공란으로 비워뒀어요. 되게 평범한 문장으로 건조하게 적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현장에서 내가 이 부분은 수정이에게 어떻게 디렉션을 줄지 모르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아 비워뒀으니, 알아서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영화에서 나왔던 수정이의 독백은 아까 여행지에서 만났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진심일 수도 있고, 실제 정수지 배우의 사정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연기를 위해 준비한 걸 수도 있는 거죠. 다만 저는 연출로서 그걸 멋지게 소화해준 정수지 배우에게 고마울 뿐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수정이와 선우, 두 번째 에피소드의 규형과 지원이 마주치는 컷이 있죠. 엘리베이터 안에서요. 그 안의 공기가 느껴질 정도로 정말 어색하더라고요. 어쩌면 관계와 소통에 대한 감독님의 감정이 스며든 컷 같기도 한데요. 이 컷을 넣으신 이유가 궁금해요.
일단은 영화적인 장치였어요. 동시간대에 벌어지는 세 개의 에피소드잖아요. 분할하면 같이 일어난다는 시간적인 느낌을 전달할 수 없는데, 이 모든 일들이 같은 시간대에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두 번째로는, 레이오버하면서 분명 이들이 서로를 봤을 거잖아요? 비행기 안에서도, 호텔 체크인 하면서도요. 그런데 동양인은 인사를 안 해요. 아마 외국인이었으면 인사를 했을 거예요. 오늘 하루 여기서 쉬는데 어디 갈거야? 이런 대화를 하면서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데면데면하고 가만히 있어요. 그런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 그럼 롱테이크로 찍은 건 아니겠네요.
그렇죠.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기 위해 2~3분 정도 찍은 거 같아요. 그런 장면이 몇 개 있었어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유진(강진아)이 노래를 부르면서 해변가를 걷다가 엄마(변중희)를 찾으러 호텔로 들어가는 씬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의 규형이 지원을 찾아 뛰어 내려오는 장면이 교차되는 거죠. 물론 편집 과정에서 덜어냈습니다(웃음).
이제 두 번째 에피소드 이야기를 해볼게요. 결혼을 앞둔 커플의 이야기에요. 호텔방에서의 시퀀스가 꽤 긴 시간 동안 롱테이크로 촬영됐습니다. 한 공간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감정의 변화를 끌어내신 게 정말 놀랍더라고요. 왜 그렇게 찍으셨는지, 당시 현장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우리가 싸울 때 컷을 나눠서 싸우지는 않잖아요(웃음). 저는 그 느낌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영화를 자세히 보면, 방 안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데, 표정 변화에 따라 카메라도 움직여요. 카메라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팬으로 돌거든요. 지원이가 한창 길우를 응시하고 있으면 그 시선을 따라서 카메라가 느린 속도로 팬을 합니다. 반대로도 또 따라가고요. 카메라가 가면 또 거기에 맞춰서 배우가 연기를 해요. 그 앙상블이 두 배우 사이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모니터를 보고 있는 저와 연기를 하는 두 배우의 호흡이 같이 가빠졌을 정도였어요. 롱테이크로 간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그 씬 안에서 배우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가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감독판은 두 시간 반이었군요.
네(웃음).
두 번째 에피소드의 화두는 결혼 제도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져요. 남자를 따라 고국을 떠나야 하고 모든 커리어를 버려야 하는 여자의 막막함, 그리고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무엇이라도 확실하게 기반을 마련하려는 남자의 고군분투. 그 사이에서 둘 사이에 피어나는 서운함과 불신의 감정들이죠. 결혼을 앞둔 거의 모든 커플들이 겪는 통과의례 같아요.
말 그대로 연인들끼리 싸우면서 헤어지는 과정이 이렇게 단순하구나 하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단순함이 영화를 볼 때 되게 지긋지긋하잖아요. 그 과정을 그래도 영화니까 잘, 이쁘게 아니, 다른 말로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사실 규형 역할의 강길우 배우와 지원 역할의 김시은 배우랑 촬영 들어가기 전에 전라도로 워크샵을 갔거든요. 거기서 이야기를 했죠. 두 사람의 캐릭터가 제일 마음에 안 든다고요. 뉴욕으로 가는 건축가에 잘 나가는 콘텐츠 기획자라니, 제가 그런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알겠어요? 저만의 방식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더니, 캐릭터 바꾸면 절대 안 할거라고 두 배우가 입을 모으더라고요. 그 워크샵에서 두 배우에게 설득당한 측면도 좀 있습니다(웃음).
연출하는 감독님 입장에서는 뭔가 구체적인 전사가 필요했을 텐데요.
두 배우 모두 그랬어요. 전문직에 일하는 사람에 대해 꼭 감독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요. 그래서 저는 두 배우에게 캐릭터의 가정사를 잡아보자고 이야기했죠. 말하자면 전사를 설정해본 건데요. 지나가는 대사에서 살짝 나오기도 하는데, 규형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해요. 열심히 돈을 벌었고, 규형은 자수성가한 거예요. 지원은 원래 잘사는 집안의 무남독녀 같은 배경으로 전사를 만들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리딩할 때는 담담하게 대사를 주고 받던 두 배우도, 실제 촬영에서는 진짜로 싸우더라고요. 그래서 테이크를 길게 가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 씬만큼은 편집기사가 많이 안 잘랐더라고요. 팬도 많지, 배우간 열기가 너무 생생하고 하니 본인도 못 끊었던 거 같아요(웃음).
세 번째 에피소드는 ‘남아선호’라는 오래된 화두죠. ‘요즘 세상에 설마’라고 하겠지만, 사실 아직도 아들에 대한 부모의 편애는 크게 드러나지 않을 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영화에서도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린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집값도 보태주고요. 한국에 홀로 남은 어머니를 돌보는 몫은 오롯이 딸인데도요.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어머니도 여자인데, 딸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거예요.
일단 가족 사이의 이야기죠. 아들들은 도저히 느껴보지 못하는 감정이잖아요. 저만 해도 어머니가 영화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거든요. 부모자식 간 감정이란게 참…. 사실 아무도 안 보면 제일 먼저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서 되게 밉고 싫지만, 어쨌든 죽을 때까지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관계잖아요. 그런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여기에 모녀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긴 했어요. 영화에서도 드러나죠. 남아선호사상이요. 굉장히 한국적인 상황이잖아요. 예전에 <아들과 딸>이란 드라마가 엄청 시청자들의 공감을 샀어요. 엄마도 본인이 여자면서 딸이 공부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요. 딸인 네가 왜 공부를 하느냐고 찾아가서까지 따지죠. 아들보다 잘 되는 꼴도 못 보고요. 영화에서 엄마 역을 맡은 변중희 배우 역시 촬영하면서 본인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 시대를 살아온 분이니까요.
반면에 강진아 배우의 캐릭터 유진은 현실에서 정말 능동적이거든요. 출판편집인이자 동성 커플이기도 하고요. 어떻게든 자기 삶에서 최전방에 서 있는 똑부러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엄마를 보면 열불이 나는 거죠.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더 자신의 이야기를 못할 것 같고요. 그래서 가족끼리 할 수 없는 말들이 폭발하게 된 데는 그걸로 마음이 상하지만 그 상황을 통해 치유되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욕실에서 딸이 독백하는 장면도 사실 시나리오에서는 공란으로 뒀어요. 제가 감히 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더라고요. 분위기와 톤만 있는 거지 연기는 배우가 하는 거잖아요.
완벽한 타인에게,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모태에서 태어나 끊을 수 없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데요. 관계와 소통이라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여섯 개의 밤들은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기자님이 에피소드를 정리하다 보니 가족이라는 키워드가 하나처럼 붙긴 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맨 처음 나오는 단어를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관계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죠. 영화에서는 단계별로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처음 만나기도 하고, 남이었지만 가족이 되는 관계도 있고, 마지막에는 가족을 떠나는. 개인적으로 저는 친구가 적어요.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도 어렵고요. 그런 어려움이 유일하게 풀리는 지점이 여행입니다. 여행을 가면 관계와 소통이 훨씬 쉬워지는 것 같아요. 물론 여행에서 오랜 친구와 함께 하기도 하지만, 다시 안 볼 사람을 만나기도 하니까요. 그런 것들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싶어요. 또 낯설게 보는 기분이 정말 멋있잖아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선우와 수정의 만남이 그런 관계의 시작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들이 계속 구현되고 끝나는 그런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피소드는 세 개지만, 여섯 개의 밤이 되는 거고요.
<여섯 개의 밤>은 감독님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입니다.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이 영화는 감독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지점에 위치하는 영화인가요?
제 필모그래피에서 개봉 순으로 치면 네 번째 영화고, 촬영으로 치면 세 번째 영화입니다. <내가 사는 세상>(2019)가 제 시나리오로 데뷔한 입봉작입니다. 두 번째 영화가 <파도를 걷는 소녀>였고요. 촬영 순서상 <여섯 개의 밤>이 세 번째 영화인데, 개인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로 찍는 첫 연출작이라 욕심도 좀 있었어요. 그래서 예술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롱테이크를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숨어드는 산>(2020)과 <식물카페, 온정>(2021)이 먼저 개봉하다 보니, 관객들이 좀 의아해할 거 같기도 해요. 저 감독은 왜 맨날 옴니버스 영화만 찍느냐고요(웃음).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은 언제부터 꾸신 건가요?
저는 완전히 ‘씨네키드’였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영화에 빠졌죠. 음악을 할까, 영화를 할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열세 살부터 기타를 쳤는데요, 엄청난 뮤지션들을 보면서 자신이 없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영화는 머리 속에 있는 걸 구현하기만 하면 되니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실수였습니다(웃음).
영화학과로 진학하신 건가요?
아니요. 저는 국졸이에요.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흔히 말하는 비행청소년은 아니었고요, 그냥 제도권 학교라는 제도가 저한테는 맞지 않더라고요. 럭비를 했거든요. 매일 학교에서 운동을 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둔 거죠.
그럼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어요?
영화를 계속 봤어요. 동시개봉관에 가서 영화를 봤고요. 또 동시개봉관 옆에 휴게소에서 비디오를 틀어줬거든요. 홍콩영화를 정말 많이 봤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처럼 집 바로 옆에 비디오가게가 있었는데, 사장님이 장애인이셨어요. 휠체어를 타고 계셨는데, 비디오테이프 정리해 줄 동네 꼬마가 필요했던 거죠(웃음). 그때 영화를 정말 많이 봤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봉영화를 불법으로 카피해서 유통하기도 했으니, 워너브러더스 영화사의 직배 영화들도 거의 다 봤죠.
그때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나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열다섯 살 때였는데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1984)를 보고 이상한 경험을 한 거죠. 영화가 이렇게도 되는구나 하는. 척 노리스 영화부터 재미있다는 영화는 다 봤던 시기인데, 그때 이 영화가 현대영화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는지도 몰랐음에도 뭔가를 느낀 겁니다. 그때부터 소위 말하는 아트필름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프랑스 영화도 보고요. 그러면서 영화감독의 꿈을 굳혔습니다.
실행은 어떻게 옮기신 건가요?
스물한 살에 상경했어요. 풍문으로만 듣던 충무로에 딱 내렸는데, 어린 마음에 영화 촬영을 하고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인쇄소밖에 없는 거예요(웃음). 거기서 공장일, 막노동을 하면서 영화판을 전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예술영화에 경도되어 있던 시기라, 저 자신이 엄청 잘난 줄 알았거든요. 트뤼포, 고다르 이야기하면서요(웃음). 그렇게 10년을 지내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다시 고향 대구로 내려갔어요. 그때 돌아봤죠. 제가 살아왔던 경험을 떠올리면서요. 예전에 제게 영화는 너무 화려했어요. 개봉은 못했지만 그때 작업했던 영화는 왕가위 감독 영화처럼, 뮤직비디오 같았어요. 대구에 와서 처음 제 느낌으로 만든 영화가 <이만원>이었거든요. 그 단편영화가 지금 제 필모그래피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게 단편영화들을 찍으면서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고요.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찍고 싶으세요?
늘 꿈처럼 말하는 게 장르영화를 찍고 싶다는 겁니다. 느와르나 서부영화, 무협영화 쪽으로요. 시나리오도 그렇게 쓰고 있어오. 그런데 이번에 영화 개봉 앞두고 서울에 왔다가 어떤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장르영화라고 하면 상업영화랑 결부되잖아요. 그런데 그 작가의 말이 제가 말하는 장르영화는 지금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 장르영화 카테고리 안에서도 마이너에 속하는 장르라고 하더라고요. 아, 또 마이너여야 하는 건가 하는, 갑자기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웃음).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독립영화를 하면서 버티기가 상당히 힘들거든요. 재능 있는 많은 동료들이 영화판을 떠나가는 것도 봤고요. 그래도 지금까지 독립영화를 하고 버틴다는 거 자체가 영화가 없으면 안 되는 삶인 것 같아요. 계속 영화를 찍고 싶어요.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즐겁고요. <여섯 개의 밤> 찍던 그해에 영화를 세 편 찍었습니다. 정말 드문 경우죠? 그만큼 현장에 있는 게 참 좋아요. 힘들기도 하지만 제일 즐거운 일입니다.
차기작은 뭘로 준비하고 있으세요?
당분간 쉬려고요(웃음). 2년 동안 다섯 편을 작업했으니, 올해는 쉬어야지 하고 있어요. 그런데 뭐 준비된 건 없고요. 시나리오는 있지만요. <수학영재 형주>(가제)라고 〈굿 윌 헌팅>(감독 구스 반 산트, 1998) 같은 영화도 준비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개의 밤>을 볼 관객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역병의 시절이 끝나가는 지점에 이 영화를 개봉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거리두기에 지친 관객분들이 서로의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였으면 좋겠습니다. 독립영화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