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물이 공포물이 되는 순간
과거로의 타임슬립(시간 이동)은 미제 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하며, 놓쳐버린 사과의 기회를 선사한다. 때론 오늘의 '당연함'을 돌아보게도 하는데, 그 순간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고 다른 삶을 살아보게 된다. '경험 불가능한 것의 영화적 경험'은 세계를 상상하게 하고, 상상은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성찰로 이어진다. 내가 타임슬립물을 즐기는 이유다.
주인공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타임슬립이라면,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팝콘을 끼고 영화를 즐기는 것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오웬 윌슨)처럼 예술의 황금기인 1920년대로 시간 이동해 헤밍웨이, 피카소, 스콧 피츠제럴드 등 동경하던 예술가들과 친구가 되는 상상도 해보고, <어바웃 타임>의 팀(도 글리슨)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빌어 사랑과 행복의 비밀에 다가가는 공상에도 빠져보면서 말이다.
반대로 의지와 무관하게 과거로 회귀하는 타임슬립물은 일순간 공포물이 되는데, 주인공이 여성이나 유색인종, 장애인 등 소수자라면 그 공포는 배가된다.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킨>을 보는 와중 몇 번이고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 화면을 멈추고 숨을 골라야 했던 이유다.
여성, 흑인의 몸으로 1815년으로 회귀
2016년에 사는 26세 흑인 여성 데이나 제임스(말로리 존슨)는 드라마 작가로서의 기회를 찾고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다. 이사 직후 잠을 청하던 중 그는 꿈속에서 한 갓난아이를 구한다. 생생한 꿈에 소스라쳐 일어난 곳은 거실 한가운데.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몽유 증상이라 넘겼다. 같은 날,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진 데이나는 물에 빠진 백인 소년 루퍼스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강가에서 깨어난다.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해내는 와중에,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 총을 들이대고 그녀가 느낀 죽음의 공포는 데이나를 현재로 되돌려 놓는다. 그 후로 루퍼스가 성장하며 겪는 죽음의 순간마다 데이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임 슬립을 하게 되고 매번 그를 구한다. 그렇게 노예제도가 남아 있는 1815년의 메릴랜드로의 회귀는 더 이상 악몽이나 꿈이 아닌 데이나가 돌파해야 할 현실이 된다.
주인공의 불행을 돋보이게 하는 백인 남성 '케빈'
불행 중 다행으로, 데이나의 시간 여행에는 케빈(미카 스톡)이 함께 한다. 케빈은 데이나와 우연히 만나면서 호감을 갖게 된 인물로 얼떨결에 그녀의 시간 여행에 동참한다. 케빈의 동행이 다행인 이유는 과거로 간 데이나가 백인인 케빈의 노예로 그의 곁에 존재할 때 그나마 안전하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드러나지 않던 둘 사이의 격차는 케빈이 데이나를 따라 타임슬립하며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극에서 조력자인 것과 달리 케빈의 존재는 데이나의 불행을 돋보이게 하는데, 세속적 기준에서 별 볼일 없었던 2016년의 케빈이 1815년에는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단번에 호감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인 케빈은 19세기에도 안전할 수 있었던 반면, 데이나는 매 순간 위험에 처한다. 데이나에 따라붙는 백인 남성 '케빈'의 이미지는 젠더와 인종이 인간을 폭력적으로 규정하는 과정과 결과 그 자체다.
채찍질만큼 아찔한 것은
피부색으로 규정되어 물건처럼 매매되고 언제든 강간 당할 수 있는 노예제가 존속하는 사회의 공포를 케빈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흑인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 그 남편을 팔아버리는 일, 굴종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남김없이 팔아버리는 일을 데이나는 목격한다. 비극적 현실에서 노예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려던 데이나. 이를 말리던 케빈에게 그녀는 “내가 매일 보는 걸 당신은 안 보고 살잖아”라고 조용히 항변한다. 원작 소설 속 케빈은 주인공에게 이런 말도 한다. “여긴 굉장히 살기 좋은 시대일 수도 있어. 여기에 머무는 게 얼마나 큰 경험일지 계속 생각하게 돼. 서부로 가서 이 나라의 건설을 지켜보고, 옛 서부 신화가 어느 정도 사실인지도 보고 말이야.” 데이나의 등을 내리치는 채찍질도 따갑지만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둘 사이, 넓고 아득한 경험치의 차이는 새삼 아찔하다.
조연급 캐릭터들의 적절한 배치도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든다. 여느 작품이라면 농장주 와일린(라이언 콴튼)의 무자비한 폭력 뒤에 가려져 있을 백인 여성 억압자 '마거릿 와일린'의 부각은 성의 정치학과 함께 인종과 계급의 정치학 역시 중요한 억압의 기준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살아남기 위해 마거릿 와일린의 자식들을 살해하고 흑인 여성 노예를 배신하는 '사라'의 모습은 생존 자체가 투쟁이었던 노예제의 비극적 역사를 상기시킨다.
소설 '킨'과 드라마 <킨>
드라마의 원작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킨」으로, 원제 Kindred(일가친척)의 줄임말이다. 시간 여행의 주된 역설인 나의 조상을 과거에서 만난다는 큰 줄기 사이로 데이나와 케빈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는 이야기, 핏줄로 엮인 루퍼스, 데이나, 그리고 앨리스의 애증의 이야기가 가지를 친다. 주인공인 데이나의 현대적 시각은 과거의 제도나 시스템에 적응하고 편입되는 과정을 관찰해 연대의 복잡함과 우리 삶의 교차성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책은 흡입력이 대단해 과연 SF계의 ‘그랜드 데임’(대모님),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 흑인의 역사와 문화를 SF 요소로 활용하는 장르)의 거장으로 불리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저력이 느껴진다. 드라마를 재밌게 봤다면 책도 읽어보자. 원작을 먼저 보고 드라마와 다른 점을 찾아보는 것도 즐겁다.
드라마는 집안의 여자들이 26세가 되면 과거로 타임슬립한다는, 소설에는 없는 새로운 설정을 더한다. 이 설정은 새로운 캐릭터인 데이나의 엄마 '올리비아'를 시간 여행자로 등장시키는데, <킨> 시즌 1은 주인공 데이나와 엄마 올리비아가 현실 세계로 복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판타지로서 타임슬립물의 성패는 세계의 규칙이 얼마나 탄탄하냐, 그것을 얼마나 엄격하게 준수하느냐에 달린다. 주인공과 다른 시대를 산 어머니의 동시대적 등장이 드라마의 인과율에 어떤 영향을 줄지, 과거 회귀는 주인공의 조상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이뤄지고 복귀는 자신이 위험에 처한 순간 이뤄진다는 대원칙과 모계 대대로 시간 여행이 운명 지어져 왔다는 새로운 설정이 충돌을 빚진 않을지 걱정되지만, 일단 시즌 2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글을 쓴 후 찾아보니, 이런, FX가 <킨> 시즌 2 제작 계획을 철회했다. 하지만 종종 다른 곳에서 시즌이 부활하는 경우도 있으니, 너무 낙담하지는 말자!)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