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가 지난 3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영화음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그는 내한 공연을 세 차례 한 바 있으며, 2018년 서울 회현동에서 ‘Ruichi Sakamoto: Life, Life’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한국의 뮤지션 정재일과 새소년에게 관심이 있다고 전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정재일이 남북정상회담에서 펼친 환송공연 ‘하나의 봄’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고 밝혔다(두 사람은 전시회 기간 실제로 만났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식은땀을 흘릴 만큼’ 인정한 정재일은 누구일까. <오징어 게임>하면 생각나는 경쾌한 리코더 소리,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이라고 하면 전 세계 사람 누구나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오징어 게임>, <기생충>, <옥자>, <브로커> 등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현재 최고의 주가를 구가하고 있는 그. 정재일은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미키 17>에서도 음악감독을 맡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정재일은 영화음악만을 하던 사람은 아니다.

출처: LMTH 홈페이지 캡쳐

정재일은 어려서부터 ‘천재’라고 불리던 소년이었다. 그는 중학생 때 음악감독 원일을 만나 영화음악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나쁜 영화>(1997),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1998)의 OST에 참여하고, 1999년 고등학생 때는 이적, 한상원 등이 속한 그룹 긱스(지금 활동하는 동명 밴드 Geeks가 아닌 Gigs)로 데뷔했다.

뮤지컬, 연극 등의 무대음악 감독은 물론, 가수, 작곡가, 연주자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정재일은 스스로를 ‘영화음악 비전문가’라고 말한다. 근래 들어 “좋은 음악이 꼭 좋은 영화음악은 아니”라며 영화음악으로 활동 반경을 더욱 넓혀가고 있는 그. 정재일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를 소개한다.


<마린 보이>(2008)

<마린 보이> 스틸컷

정재일이 음악감독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작품이다. 영화 <마린 보이>는 그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답게 수중에서 촬영한 장면이 많다. <마린 보이>의 초반 시퀀스는 바닷속을 유유자적 헤엄치는 마린보이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투명하고 푸른 바다와 물고기 떼, 그리고 정재일의 음악이 만나 바다의 신비로움이 잘 표현된 장면. 더불어, 중간중간 극에 속도감을 더하는 음악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부분도 눈에 띈다. 한편 정재일은 이 영화에 카메오로도 출연했다.


<바람>(2009)

영화 <바람>의 이성한 감독은 이전작 <스페어>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우리나라 전통 악기만을 사용한 음악을 삽입했다. 그는 ‘우리 영화에는 우리 음악을 써야 한다’라는 굳은 믿음으로, <스페어>에서 마당극을 연상시키는 북소리와 추임새, 징 소리에 맞춘 액션씬을 연출했다. 이는 ‘고추장 액션’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바람> 스틸컷

정재일이 음악감독을 맡은 <바람> 역시, 이성한 감독의 주문대로 독특한 음악이 영화에 흐른다. 정재일은 국악기만으로 드라마틱한 주제곡을 만들어냈다.

영화 <바람>은 고등학생들의 성장통을 그려낸 영화다. 정재일은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 이야기에 우리의 가락으로 재미 요소를 더했다. 장면에 따른 악기 선정도 인상적이다. 싸움 장면에서는 대고와 장고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고, 가족애를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해금과 아쟁, 대금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구사했다.


<해무>(2014)

정재일은 영화 <해무>의 강렬함과 긴장감, 웅장함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50인조 프라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The City of Prague Philharmonic Orchestra)와 함께 작업했다.

영화 <해무>는 ‘전진호’의 선원들이 밀항자들을 돕던 와중, 해무(바다안개)가 몰려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영화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심리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해무> 스틸컷

정재일은 영화 내에서 해무가 몰려온 후, 캐릭터들이 표출해내는 인간 본연의 욕망과 광기를 음악으로 옮겼다. 그는 바이올린의 하모닉스 주법을 사용해 날카로운 음향을 내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한 ‘전진호’처럼, <해무>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은 첫 트랙이 ‘출항’, 마지막 트랙이 ‘만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무> 스틸컷

영화 <해무>는 봉준호 감독이 제작자로 참여한 탓에, 이때 맺은 인연은 후에 <옥자>, <기생충> 등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옥자>(2017)

정재일은 봉준호 감독의 <옥자> 시나리오를 읽고 마치 ‘로드 무비’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공간에 따라 다른 악기와 장르를 선택했다. 예를 들면, 강원도에서는 기타를, 뉴욕에서는 오케스트라, 도살장에서는 일렉트로닉을 선보이는 식이다.

<옥자> 스틸컷

정재일은 <옥자>의 모든 곡의 작곡과 편곡, 그리고 연주, 지휘까지 도맡았다. 브라스 밴드와 오케스트라, 빅밴드, 합창단까지. 다채로운 사운드는 영화에 깊이를 더하며, 다면적으로 특출난 정재일의 뮤지션적 기량이 어김없이 발현되었다.

아쉽게도, <옥자>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은 음원 사이트에서 만나볼 수 없다. <옥자>는 국내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가 아닌 탓에, 계약상 음원 공개가 불가능하다. 넷플릭스에서 사운드트랙을 내지 못하게 해, 정재일은 넷플릭스 가입도 하지 않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정재일의 이전 작업 영화 <해무>의 ‘출항’과 ‘만선’이 그랬듯, 정재일은 유난히 영화의 시작 음악과 끝 음악에 공을 들인다. <옥자>의 엔딩 곡 역시, 정재일 스스로가 말하길 ‘가장 정재일스러운’ 곡이다.


<기생충>(2019)

“멋있게 걷는 것 같은데 휘청거리고 절뚝거리는 느낌이 필요하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에 필요한 음악의 색깔을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정재일은 <기생충>의 시나리오를 수십 번 읽은 끝에, 봉 감독의 말을 음악의 언어로 표현해냈다. 그의 제작기에 따르면, 그는 오르락내리락하는 계단 이미지에 집중해서 마치 계단처럼 이뤄진 선율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바로크 음악을 본떠 <기생충>의 음악을 제작했는데, “우아하기도 하고 점잖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트로트 같기도 한 그 느낌”이 영화에 딱 어울린다고 판단한 것. 상류층을 동경하는 인간의 허상과 천박한 속성이 ‘야매’ 바로크 음악과 닮아있던 탓이다.

<기생충> 스틸컷

영화 속 인물들의 모순과 야단법석은 우아한 음악과 맞물려 부조화스러운 장면을 연출해내고, 이는 기묘함과 부조리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정재일이 무려 7개의 버전을 만든 끝에 탄생한 ‘믿음의 벨트’는 봉 감독이 가장 공들인 시퀀스에 삽입되었다. ‘믿음의 벨트’가 흐르는 7분 동안, 네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문광(이정은)을 쫓아내는 과정이 담긴 ‘복숭아 신’은 <기생충>의 명장면이다.

더불어, 봉 감독이 작사하고 배우 최우식이 부른 엔딩곡 ‘소주 한 잔(A Glass of Soju)’은 아카데미 주제가상 부문의 예비후보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2021)

정재일의 첫 드라마 작업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할리우드 뮤직 인 미디어 어워즈’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다. 더불어, 국내 넷플릭스 드라마 사상 최초로 스코어 앨범(연주곡 앨범)이 공개되기도 한 작품이다.

출처: 넷플릭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불어봤던 리코더 소리는 <오징어 게임>을 상징하는 음악이다. 이 친숙하고도 명랑한 리코더 소리는 <오징어 게임>을 만나 잔혹함과 그로테스크함을 증폭시킨다.

실제로 정재일은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연습하던 리코더나 소고, 캐스터네츠 같은 악기로 결투의 음악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며, 어른들의 갈등을 담은 이야기에 추억의 소리를 입힌 이유를 전했다. 음악의 박자 역시 학창 시절 운동회에서 한 번쯤은 쳐봤던 ‘3·3·7 박수’에 기초했다고.


<둥글고 둥글게>(2021)

‘둥글게 살자’라는 말을 강요받던 시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둥글고 둥글게>는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감독 장민승의 공연융합영상 프로젝트다.

<둥글고 둥글게> 포스터

<둥글고 둥글게> 스틸컷

장 감독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한국 사회가 지나온 중요한 순간을 담은 영상, 사진, 문서 등의 기록을 재구성해 <둥글고 둥글게>를 연출했다.

음악감독을 맡은 정재일은 성경의 시편에 기반해 작곡한 라틴어 합창곡을 선보였다(그는 이후 발매한 3집 앨범도 <시편>이라고 지었다). 정재일은 합창곡을 선보인 이유로 “삶이 생겨난 지점부터 함께 태어나는 고통과 상실을 노래하기 위해 고대 기독교 전통의 합창곡 형식을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둥글고 둥글게>에서는 합창 아카펠라와 국악의 구음, 일렉트로닉과 현악 앙상블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기억과 애도에 무게를 더한다.


<브로커>(2022)

작업내내 비워내는 연습을 했습니다.

음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이야기와 계속 멀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음, 한 음 긴장하고 주의를 기울여 연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이 조금만 빨리 혹은 늦게 연주되어도 계속 이야기와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음악들이 오로지 화면 속 사람들의 여정과 함께 공기와 바람이 되기를 바랬고 동시에 그들과 함께 웃고 울기를 바랬습니다.

브로커 OST 음반소개 중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성공을 통해, 정재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작업할 기회가 생겼다. 정재일은 평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좋아했던 탓에, 스스로를 ‘성덕’이라 일컫기도 했다.

<브로커> 스틸컷

정재일은 좋은 음악이 꼭 좋은 영화음악은 아닐 수도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피아노와 기타의 음 하나하나가 아주 정확한 장소에 나오길 바랐다. 그렇게 하기 위해 계속 영상을 보며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이야기와 꼭 맞는 음악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브로커>는 베이비 박스를 둘러싼 다섯 사람의 여정을 담은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휴머니즘과 정재일의 음악이 만나 이야기의 여운을 증폭시킨다. 프랑스의 한 언론은 “재일의 음악은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