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남편이 '빌런'이 되는 특이한 상황

이것은 영화인가, 아닌가. 사실 누가 봐도 영화가 맞지만 대중이 보기에 다소 낯설고 뜬금없는 요소가 느껴질 수는 있다. 과장된 유머와 특이한 소품과 배경 장소, 영화 내내 들떠 있는 캐릭터 등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호감도와 관객 반응은 호불호가 갈리고는 있다. 바로 2023년 한국 관객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는 이하늬, 이선균 주연의 영화 <킬링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다. 개봉 일주일째 전국 10만 관객을 넘어선 이 영화,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할까. 혹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전했다가 요새 티켓값도 비싼데 실망하고 나오는 거 아닌가. 고민해고 있을 여러분께 이 영화의 킬링 포인트를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한다.


킬링 포인트 1. 여래의 몰락을 살려낸 이하늬의 살신성인 연기

여래 역의 이하늬

옛날 옛적에 여래라는 이름의 톱스타가 있었다. 시대의 아이콘과도 같았던 '랄라텐' 광고 모델을 하며 인기를 구가했던 그녀는 어느 날 결혼과 함께 대중에게 잊히는 듯했다.

이것은 모나코 공비 그레이스 켈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아니다. 가끔 복귀설만 들려오는 배우 심은하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킬링 로맨스>의 세계에서는 여래라는 톱스타가 있다. 아니, 있었다. 그런데 금세 대중에게 잊히는 분위기였다. 영화가 시작하면 할리우드의 웨스 앤더슨 감독 영화 풍의 동화 같은 인트로 장면이 등장한다. 아마도 의도적인 유머 소재로 웨스 앤더슨 영화의 스타일 (전체가 아니라 테두리만)을 차용한 느낌이다.

현실에서 배우 이하늬가 톱스타 여래의 모습을 연기한다.

1리터의 음료수를 4초대에 원샷할 수 있었던 대단한 여래의 연예계 생활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여래는 이 영화의 소개에 따르면, ‘대재앙 같은 발연기로 국민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그녀는 과연 어떤 연기를 어떻게 보여줬기에 국민 조롱거리가 됐을까. 아주 짧게 언급되고 지나가는 장면으로 유추해보건대, 여래는 기념비적인 SF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 <스타트렉> 시리즈를 상징하는 손동작, 벌칸족 인사법을 따라한 듯한 희대의 제스처를 선보인 여래는 해당 작품에 출연한 뒤 발연기 논란에 휩싸인다.

물론 현실에서 배우 이하늬는 국악과 전통 무용의 조예가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인재다. 다양한 언어에 능통하고 미스코리아 진 출신이고 필모그래피에 천만 영화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 결혼하고 출산까지 한 이하늬는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간 이하늬 본연의 캐릭터 매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여배우로서 결코 쉽지 않은 방향의 길을 걸어왔던 셈이다. <타짜-신의 손>의 우 사장이나 <부라더>의 오로라, 그리고 <극한직업>의 장형사와 이번 영화의 여래에 이르기까지 웃음기 빼면 퍽퍽할 것 같은 역할을 종종 맡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웨스 앤더슨적 모먼트'

f다양한 연기를 통해서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드는 배우의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유령>에서 이하늬가 연기했던 박차경의 카리스마를 떠올려보면, 무엇이 여래를 대중의 기억 밖으로 내몰았는지 고민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혼란스러워진다.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고민할 일이 아니잖아. 그렇다. <킬링 로맨스>는 자칫 진지하게 빠질 수 있는 고민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실상의 은퇴 수순을 밟으면서 ‘꽐라’ 섬으로 향한다. 진지할 틈이 없는 영화지만, 이 대목에선 제법 진지하게 그런 섬이 있다 치고 봐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것 같다.


킬링 포인트 2. 이선균이 배우 인생 걸고 연기한 JOHN NA

조나단 나 역의 이선균

‘꽐라섬’의 주인이자 부동산 재벌 조나단은 <킬링 로맨스>의 빌런 같은 존재다. 로맨스 영화에 무슨 빌런이 등장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조나단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여래가 남태평양에 위치한 꽐라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왜 하필 이 섬에 왔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마주치게 된 건 안하무인격의 현지인들로 구성된 소매치기범들이다. 하지만 이때 그녀를 구해주는 건 바로 억만장자 조나단. 영어 이름을 'JOHN NA'라고 쓰는 그는 무지하게 돈이 많다. 그리고 여래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조나단 역시 발연기 톱스타 출신 황여래를 만나면서 인생이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이선균은 하필 운도 ‘JOHN NA ‘ 좋다.

배우 이선균을 대표하는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파스타>를 잘 모르는 요즘 관객과 시청자도 있겠지만 2000년대 중반 당시의 이선균의 연기는 화제를 불러 모았다.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특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등장했던) 삼각관계의 장본인 음악감독 한성 역을 비롯해서, 버럭버럭 화를 내는 연기로 주목받았던 <파스타>의 셰프 최현욱은 배우 이선균에게는 인생 캐릭터였다. 이선균 성대모사의 대표적인 레파토리, “봉골레 파스타 하나”라는 대사가 바로 이 드라마에서 등장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목받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쩨쩨한 로맨스>의 정배, <내 아내의 모든 것>의 두현 모두 이선균식 찌질한 남자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지만 이 방면에서 주목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끝까지 간다>처럼 강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역할로 더 주목받았다. <기생충> 역시 남성성에 집착하는 캐릭터의 연장선상에서 흥미롭게 관찰해 볼 여지가 많은데 이선균 배우가 갖고 있는 유니크한 남성성이 폭발하듯 구현된 작품이 바로 <킬링 로맨스>라 할 수 있다. 그와 완전 반대편에 놓여 있는 작품이 바로 <나의 아저씨>라고 설명을 덧붙이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왜 이렇게 이선균의 전작에 대해서 길게 설명했느냐면, <킬링 로맨스>의 조나단을 재밌게 즐기기 위해서는 지금껏 이선균 배우가 본인이 타고난 외모와 목소리를 가지고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왔는지를 떠올리면서 봐야 한다. 그래야 자의식 과잉 소시오패스 조나단이 보여주는 희화화된 남성성을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은 채로 즐길 수 있다. 이번 영화로 이선균은 (의외로) 유행어 대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배우의 대열에 확실히 들어섰다. 이게 다 꿀성대 덕분이 아닐까.


킬링 포인트 3. Y2K 감성에 호소하는 개그

<킬링 로맨스>의 장르적인 특징은 코믹한 치정 스릴러에서 시작해서 야생 버라이어티 어드벤처를 거쳐서 최종 ‘엔드게임’식 전투로 이어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여래의 ‘남편살해작전’을 돕는 조력자로 옆집 사는 서울대 재수생 범우(공명)가 등장해서 히치콕 감독의 <이창> 같은 컨셉으로 옆집 대소사에 ‘푹쉭확쿵’, ‘슥컥훅’ 소리를 내며 개입하게 된다. 해당 의성어는 수많은 어떤 행위의 의미가 있다.

범우를 맡은 공명. 이하늬와는 <극한직업>에 이어 재회했다

아무튼 여래와 범우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조나단을 규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전설의 찜질방 ‘극열지옥’ 장면이나 타조와의 추격전, 들국화의 ‘제발’, H.O.T.의 ‘행복’과 비의 노래 ‘레이니즘’으로 만든 가상의 응원가 ‘여래이즘’ 노래 대결 등은 요즘 말로 ‘항마력’을 든든하게 채워 두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게 다 의미가 있다. 아무래도 2000년대를 전후로 세상의 많은 것들이 뒤바뀌고 새롭게 탄생하던 시절의 감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화에 구체적인 설명은 등장하지 않지만 최근에 이원석 감독과 이선균 배우가 가수 정재형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요정재형’에 출연해서 곡의 사용 의도에 대해 설명한 적 있다. 이원석 감독은 “’행복’은 과거, ‘제발’은 현실, ‘레이니즘’은 퓨처”를 뜻한다고 설명했는데 풀어서 설명해보자면, 톱스타 시절의 여래와 여래를 기억하는 팬들을 상징하는 곡이 ‘행복’인 것이다. 그리고 남자를 잘못 만나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혀서 살아가는 여래의 현실은 ‘제발’이란 곡이, 앞으로 영화가 끝나고 나서 맞이하게 될 여래의 미래는 ‘레이니즘’, 그러니까 ‘여래이즘’이란 곡이 상징하고 있는 것. 이런 의미는 영화를 한 번 보면 바로 캐치되기 쉽지 않지만 여러 정황상 20세기말, 밀레니엄 직후의 시대 감성에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는 유머 코드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여래의 팬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들도 찾을 수 있다.


킬링 포인트 4. 그래서 어떤 영화?

정리해보자면, <킬링 로맨스>는 한국 영화 중에서 보기 드문 B급 감성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다. 과장되고 독특하고 별난 소재로 이뤄져 있지만, 한물간 톱스타가 현실을 자각하고 도태되어 가던 나 자신의 현재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 영화라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물론 감독이 영화 곳곳에 심어 놓은 유머 코드를 영화 내내 잘 이해했더라도 타조의 등장만은 끝까지 못 받아들일 수도 있다. <킬링 로맨스>는 적당하게 대중의 취향과 밀당하듯 적정선을 지키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고 극장을 찾는다면 가슴속 깊이 숨겨뒀던 진짜 나만의 취향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바로 여래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현수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