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주성치 영화를 보는 걸까? 〈천왕지왕 2000〉(1999)으로 처음 주성치 영화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난 내가 주성치 영화와는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천왕지왕 2000〉은 주성치 영화 중에서도 유달리 뜬금없는 스토리 전개와 온갖 지저분한 농담들이 난무하는 정신 산란한 영화였고, 나는 내가 다시 주성치의 세계를 방문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내게 영화를 추천한 친구의 취향을 의심했고, 다시는 이런 영화를 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원래 약속은 깨라고 하는 거고 다짐은 어기라고 하는 거랬다. 내 다짐은 언제나 그렇듯 어그러졌고, 나는 그 이후 뭐에 홀린 것처럼 주성치 영화를 챙겨보게 되었다. 〈식신〉(1996)과 〈도성〉(1990), 〈소림축구〉(2001)와 〈쿵푸허슬〉(2004), 〈서유쌍기〉(1994)와 〈가유희사〉(1992)를 넘나들며 주성치의 세계를 섭렵하는 동안 나는 눈물을 훔치며 웃어댔다. 입문작으로 〈천왕지왕 2000〉을 추천한 친구와의 관계는 딱히 나아지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녀석의 취향은 내 영화 인생에 진한 흔적을 남긴 셈이다.
생각해보면 희한한 일이다. 난 〈천왕지왕 2000〉이 유달리 뜬금없고 지저분하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랑하는 주성치의 다른 작품들이 딱히 덜 뜬금없다거나 덜 지저분한 건 아니다.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에게 “내 제자가 되고 싶으면 저기 엘리베이터 앞에서 똥을 싸라!”고 일갈하는 〈식신〉 속 주성치는 얼마나 지저분한가? 아무런 복선도 없이 경기 막판에 골키퍼 대체 선수를 자처하는 〈소림축구〉 속 아매(조미)의 등장은 얼마나 뜬금없나? 〈서유쌍기〉에서 지존보(주성치)의 아랫도리에 반복해서 불이 붙는 장면은 또 어떻고? 그런데도 왜 난 주성치의 세계를 사랑하는 걸까?
그 궁금증은 언제나 한 영화 앞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영화의 제목은 〈희극지왕〉(1999)이다.
〈희극지왕〉은 너무 간절하게 배우가 되고 싶은 사내의 이야기다. 동네 복지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동네 주민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사내 윤천구(주성치)는, 어떻게든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에 영화 촬영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엑스트라 배역을 따려 노력한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고민이 지나치게 많은 천구는 시키는 대로 연기를 하는 대신 자꾸 제 배역을 나름대로 해석한 연기를 선보인다. 주연이었다면 배역을 입체적으로 선보이기 위한 노력이라 가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겠으나, 총을 맞고 단번에 쓰러져 죽어야 하는 엑스트라가 그러면 아무래도 곤란하다. 천구는 촬영장에서 쫓겨나기 일쑤고, 너 같은 게 무슨 배우냐는 조롱을 당한다.
복지관에 돌아와도 상황은 딱히 나아지지 않는다. 동네 주민들은 연기에 별 관심이 없고, 천구와 어울려주는 몇 안 되는 동네 불량배 홍야(임자선)는 천구에게 배운 연기로 자해공갈이나 벌일 뿐이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 이론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아침이 되면 다시 엑스트라 배역이 없는지 촬영장을 기웃거리고, 다시 너는 배우도 아니라고 조롱을 당하고, 복지관으로 돌아와 모두의 외면 속에서 쓸쓸하게 잠을 청하는 날의 반복. 언제 무릎이 꺾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날을, 천구는 악으로 버틴다. 넘실거리는 파도 너머를 한참 바라보다가 큰 소리로 “노력! 분투!”라고 외치는 것으로 제 각오를 다지며.
상황이 나아질 줄 모르는 설움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유표표(장백지)도 공유하는 점이다. 첫사랑에게 배반당하고 빚을 져서 접대부로 일하게 된 표표는, 웃음을 팔며 살아가는 제 삶에 제법 체념한 상태다. 손님들 앞에서 수줍은 연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마담이 단체로 아가씨들을 끌고 복지관에 방문해 천구에게 연기 강습을 요청했을 때에도, 표표는 천구에게 연기를 배울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껏 무시했던 천구의 충고가 실전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 표표는 천구를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내가 무시했던 얼뜨기가 알고 보니 얼뜨기가 아니었다고? 그리고 서로를 알아본 두 밑바닥 인생은, 아주 서툴게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록키〉(1976)가 실베스터 스탤론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된 작품인 것처럼, 〈희극지왕〉 역시 주성치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친구 양조위를 비롯한 동기들이 자신을 앞질러 성공하는 광경을 보면서 7년간 엑스트라 생활을 해야 했던 주성치는, 〈희극지왕〉의 주인공 윤천구에게 제 경험을 투사한다. 어떻게든 감독의 눈에 한 번이라도 더 들고 싶어서, 죽는 연기를 할 때조차도 감독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는 대신 제 나름대로 해석한 연기를 했다던 주성치의 모습은 고스란히 〈희극지왕〉 속 윤천구의 특징이 된다.
그렇게 무명시절의 주성치의 모습을 고스란히 빼다 박은 윤천구는, 주성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원형질을 보여준다. 주성치 영화의 주인공들은 윤천구가 그렇듯 대체로 답이 없는 루저다. 설령 출발 지점이 루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나락에 떨어지곤 한다.(1992년 〈무장원 소걸아〉) 그는 툭하면 촌뜨기 취급을 당하며 (1991년 〈신정무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1994년 〈파괴지왕〉) 모멸을 겪는데(〈소림축구〉), 그가 겪는 수난은 우스꽝스럽고 때로 지저분하며 자주 졸렬한 탓에 서럽다고 제대로 울 수도 없다.
사람들이 주성치 영화를 가슴 깊이 사랑하는 이유는, 그 많은 루저와 언더독과 촌뜨기들이 세상에 제 진가를 드러내고 인정받는 과정을 우직하게 지켜보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줍던 넝마주이 아성이 마침내 전 세계에 소림무술의 진가를 선보이는 〈소림축구〉의 설정이나, 엉터리 사기꾼 요리사였던 주성치가 처절하게 몰락한 끝에 진정한 식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식신〉의 설정만 봐도 그렇다. 우스꽝스럽고 지저분하고 촌스러운 주인공이, 온갖 모멸을 이겨내고 끝내 정상에 서는 순간의 환희란.
그런데 〈희극지왕〉은, 그 절정의 순간에 다시 천구를 아래로 떨어뜨린다. 아니, 정확하게는 천구가 스스로 아래로 뛰어내린다. 오디션을 통해 톱스타 두연아(막문위)의 상대 배역을 따내 스타가 될 일만 남은 천구에게, 표표는 묻는다. 날 먹여 살리겠다던 그 말, 진심이었냐고. 사실 천구는 눈 한번 딱 감고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벼락 스타가 될 마당에, 술집 접대부 애인이 있다는 건 흠이 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천구는 누구보다 큰 소리로 답한다. “당연하죠!” 천구는 기꺼이 다시 뛰어내린다. 손잡아 주겠노라 약속했던 상대의 손을 잡기 위해.
공교롭게도 그 외침 이후 천구의 삶은 다시 달라진다. 오디션을 통해 따냈던 주연 자리는, 원래 그 배역을 거절했던 스타 배우가 다시 마음을 바꾼 탓에 금방 빼앗기고 만다. 두연아가 천구를 배려해서 기껏 다시 마련해 준 배역은 대사가 딱 세 마디뿐인 단역이다. 정상의 영광은 짧고 현실은 유달리 냉혹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구는 그 순간을 견뎌낸다. 주성치는 가장 자전적인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이렇다 할 성공을 가져다주는 대신 주인공의 진심을 지켜낸다.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를 기억하는 마음, 그곳에서 함께 출발한 이들을 잊지 않는 마음.
다시, 우리는 왜 주성치 영화를 보는 걸까? 그건 그가 중국에서 제일가는 희극 배우가 된 이후에도, 중국 박스오피스를 호령하는 흥행 감독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처음 출발한 자리를 잊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막막하고 서러운, 기댈 곳 하나 없는 가난하고 초라한 자리,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버거운 평범한 사람들의 곁 말이다. 마치 그가 ‘기념으로 몇 줄 적어달라’며 사진을 내민 기자에게 적어줬다는 문구처럼. “为什么坚持? 想一想当初.” (왜 버티는가? 처음을 생각하자.)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