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 그중에서도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부부의 날이라고 해서, 하루가 밝자마자 귀신같이 부부의 사이가 다시 신혼 때로 돌아간다던가,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아드레날린이 돈다던가 하는 마법 같은 일들은 펼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부의 날이라는 건 얼마나 좋은 명목인가. 오늘은 부부의 날이라는 핑계를 대고 다시 로맨스를 불러일으킬 때다. 그래서 준비했다. 부부의 날을 맞아, 배우자와 함께 보기 좋은 영화.


앞으로 걸어갈 노년을 그려볼 수 있는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2014)

“이곳도 많이 달라졌네요. 세련돼졌고, 개성 넘치고, 부자들도 많아요. … (중략)… 여기가 아무리 변해도 난 늘 그리울 겁니다.”

정든 브루클린을 떠나려는 그의 말. 사실은 비단 브루클린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부 관계에 대입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더 이상 예전처럼 계단을 쉽게 오르지 못해도, 더 이상 예전처럼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해도, 늘 함께 할 부부 사이.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 스틸컷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은 드라마틱한 사건을 담아내기보다는, 노년을 맞이한 부부의 일상을 잔잔하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40년 동안 함께 살았던 브루클린의 집을 내놓은 노부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그들은 함께 살았던 시간을 되새기고, 부부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사랑에 빠지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젊은 날의 자신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젊었을 적 아내가 쓰던 안경과 꼭 닮은 안경을 쓴 아이를 보며 젊은 시절의 그녀를 떠올리기도 하고, 함께 해결해왔던 사소한 의견 충돌부터 거대한 난관까지를 반추하며 앞으로 맞닥뜨려야만 할 과제들을 생각하고. 그렇게 노부부는 그들의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마주한다.


평범하고도 낭만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부부에게,

<패터슨>(2016)

모든 부부가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처럼 사건을 척척 해결하는 요원은 아니고, <비포> 시리즈처럼 여행지에서 만나 불같은 사랑으로 바로 결혼에 골인한 국제부부도 아니다. 사실 대개의 부부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잔잔히 살아간다. 일상에서 대소사가 있을지언정, 부부의 삶은 때로는 싱겁게, 때로는 무던하게 흘러간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패터슨>은 그런 99%의 부부에게 권하는 영화다. 평범한 일상에서 운율을 포착해 내는 건 당신의 몫이다. 매일 같은 풍경을 보며 똑같은 일상을 살아도 매일 다른 시를 짓는 패터슨처럼, 단조로워 보이는 삶일지언정, 그 안에 다른 이야기가 있고, 아내는 매일 다른 꿈을 꾸고, 버스에서 들려오는 승객들의 대화는 매번 다르다. 어쩌면 고요한 리듬 아래 반복되는 일상은 삶에 운율을 더하는 장치일 뿐일지도 모른다. 인생 전체는 시와 같은 것이기에, 펜을 들고 텅 빈 일상을 채워야만 하는 것일지도. 그래서 패터슨은 어느 영화의 히어로보다도 존경스럽다.

영화 <패터슨> 스틸컷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언제나 손 닿는 곳에 둔다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은 오하이오 블루 팁

전에는 다이아몬드 상표를 좋아했지만

그건 우리가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작지만 견고한 상자로

훌륭하게 포장되어 있고

진하고 옅은 청색과 흰색으로 쓰인 글자는

확성기 모양으로 쓰여 있어

마치 세상에 더 크게 외치는 것 같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 있어요

4cm의 매끈한 소나무 막대는

머리에 거친 포도색 모자를 쓰고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오롯이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를 하여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줄지 몰라요'

<패터슨> 중 패터슨이 쓴 시 ‘러브 포엠’


저물어가는 날들에 이별을 고하는 방법,

<아무르>(2012)

‘백년가약’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들어맞을 수 있을까. “검은 뿌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백년해로하세요”라는 주례사에 응답하는 듯한 <아무르> 속 부부의 모습.

영화 <아무르> 스틸컷

우리는 어떻게 늙어가면 좋을까. 우리는 어떤 노년을 보내야 할까.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유한한 삶 앞에서, 부부 중 누군가는 상대방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부 중 한 명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사랑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아픈 아내를 보살피면서도 남편은 그만의 방식으로 아내를 사랑한다. <아무르>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부부의 사랑은 어떻게 끝맺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영화는 꽃에 둘러싸인 채 침대에 누워 죽어 있는 아내의 시체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곤 아내의 죽음 이전까지의 날들을 그려낸다.

영화는 배경 음악을 최소화하며 잔잔하고 담담하게 흘러간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영화 속 남편 역시 그랬다. 그는 죽어가는 아내를 보며 호들갑을 떨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대단한 결심을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죽음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들의 여정조차 사랑이고, 심지어는 죽음 이후의 날들조차 사랑이라는 사실이 마음 깊이 와닿는다.


중년 버전 <비포> 시리즈? <사랑을 카피하다>(2010)

<사랑을 카피하다> 스틸컷

“신혼부부의 눈에서 반짝이는 희망을 보고 마냥 환상을 심어줄 순 없었어요.“

“달콤한 환상이잖아요.”

“오래 못 갈 환상이죠. 처음이 달콤할수록, 나중에 부딪치는 현실이 더 쓴 법이죠. 황금나무만 믿고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혼생활을 지탱하는 건 관심과 뚜렷한 인식이죠.”

“뭐에 대한 인식이죠?”

“모든 건 변하고 약속도 무의미하죠. 가을에도 지지 않는 꽃이 없는 것처럼요. 꽃은 열매가 되고, 익으면 떨어지니까요. “

“그 뒤에는요?”

“헐벗은 나무만 남죠.”

<사랑을 카피하다> 대사 중

정말 그럴까? 부부 행색을 하는 두 남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 많은 커플들이 찾아오는 가장 낭만적인 도시, 이탈리아 투스카나. 그러나 그곳에서의 두 사람의 대화는 로맨스보다는 현실에 가깝다.

<사랑을 카피하다>의 한국어 번역 제목과 포스터에서는 진한 멜로물의 향기가 느껴지지만, 사실은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철학적인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극 중 주인공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가 쓴 「기막힌 복제품」과 궤를 같이 한다.

<사랑을 카피하다> 스틸컷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난 남녀는 부부 행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과연 저 부부 행색이 과연 ‘행색’일뿐인지, 혹은 진짜인지를 점차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기막힌 복제품」 관련 강연장에서 만난 두 주인공은 부부 행색을 하며, 책의 내용을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며 의미를 알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부부 행색은 책을 행동으로 옮기는 작업 그 자체였을 수도, 혹은 책의 내용을 몸소 실행하며 의미를 깨달아가는 실험 그 자체였을 수도 있다.

<사랑을 카피하다> 스틸컷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하여금 영화 속 두 남녀가 정말 처음 만난 사람들인지, 혹은 진짜 부부였는지를 헷갈리게 만든 것은 감독이 의도한 모호함이다. 이 둘이 진짜 부부냐, 아니냐의 여부는 적어도 영화에서 논하고자 하는 주요 사안은 아니다. 영화라는 가상 위에 또 다른 가상을 입힘으로써 모조와 원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사랑을 카피하다>의 목적일 듯싶다.

영화 <사랑은 카피하다>는 진짜 사랑은 무엇일지,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무엇일지를 부부끼리 대화해 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