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중국 태생의 영화감독 겸 시인 비간은 천카이거(<패왕별희>)와 장이머우(<국두>, <붉은 수수밭>)가 속한 5세대, 지아장커(<강호아녀>, <사라진 시간들>)로 대표되는 6세대 이후 중국 영화의 선두 주자다. 중국의 역사(5세대), 그리고 사회 이슈(지아장커)를 비판적으로 그렸던 이전 세대의 중국 영화감독들과는 달리, 비간은 본인의 정체성인 ‘시’라는 매개를 통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억, 꿈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고도 개인적 주제를 추구하는 것으로 주목받았다(비간은 시 쓰기를 좋아하며 영화감독이 된 건 우연이라고 말했다). 특히 영화의 상당 부분에 쓰이는 롱테이크 촬영 기법은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데에 다양하게 활용되며 비간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았다. 데뷔작 <카일리 블루스>로 그는 제68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신인감독상, 제52회 금마장 신인감독상/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제37회 낭트 3대륙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탕웨이 주연의 두 번째 작품 <지구 최후의 밤>은 제71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소개되었다.
비간 감독의 활약에 많은 해외 평단은 열광했다. 「필름 코멘트」(Film Comment)는 그의 존재가 “눈부신 오리지널리티”라고 정의하며 비간의 부상을 주목했고, 고전·예술영화 전문 회사 '크라이테리온'(Criterion)은 그가 “아트하우스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극찬했다.
<카일리 블루스>는 개봉한지 8년이 지나 뒤늦게 한국에서 공개되는 비간 감독의 데뷔작이다(두번째 작품인 <지구 최후의 밤>은 먼저 개봉했다). <카일리 블루스>는 비간 감독의 실제 출생지인 ‘카일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실제 그의 삼촌인 ‘진영충’이 주연을 맡는다. 영화는 조카를 찾으러 여행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안개가 자욱한 도시 카일리에서 의사 겸 시인 천성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꿈을 반복하며 꾼다. 그는 곧 버려진 조카를 찾기 위해 카일리를 떠나 전위안으로 향한다. 그 길에서 당마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을 통과하게 되고 천성의 과거, 현재, 미래가 꿈 같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카일리 블루스>를 읽는 코드 1: “롱테이크”
영화는 ‘천성’이 사라진 조카, ‘웨이웨이’를 찾아 떠나는 로드 무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길을 따라나서는 여정이 아닌 시간을 따라 떠나는 여정을 택하는 듯하다.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변모하거나 변태(變態)하며 주인공의 기억과 새로 마주하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부딪힌다. 제작 당시 불과 26살이었던 비간은 ‘시’를 재현모드로 선택하고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도전적인 시도로 첫 작품부터 자신만의 작품관을 확고히 구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톱모션으로 정체해 있는 듯한 자연, 그리고 인간의 이미지들과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롱테이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잉그마르 베르히만 같은 선대의 아티스트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그가 영화를 전공하거나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랍다. 비간은 대사보다는 시 구절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전달하고 롱테이크와 움직임 없는 이미지로 시간을 가두거나 멈춘다. 시간과 기억은 비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화두다. 따라서 어쩌면 그에게 시간의 흔적을 담는 ‘롱테이크’는 영화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롱테이크에 대해 “꿈 같고 자유로운 행위”라고 이야기하며 그런 의미에서 롱테이크는 시와 비슷하다고 언급했다. 롱테이크는 시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긴 롱테이크를 통해 (예컨대 30분이 넘어가는) “존재와 죽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롱테이크와 같은) 사실적 기법이 영화의 리얼리즘을 전달하고 확장하는데 중추적인 기능을 한다고 한 바 있지만 비간의 롱테이크는 조금 다른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롱테이크를 ‘존재와 죽음’을 모호하게 할 수 있다는 수단으로 인식했듯 비간의 롱테이크는 사실과 리얼리즘을 기록하는 매개가 아닌, 시간의 흐름을 늘려서 그 사이의 추상적인 행간을 들여다보게 하는 현미경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의 ‘시’가 그렇듯 말이다.
<카일리 블루스>를 읽는 코드 2: “원시인”
영화의 초반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서부터 천성이 (아마도) 성장한 웨이웨이를 만나 그에게 듣는 이야기까지 영화에서 ‘원시인’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갈색 털이 뒤덮이고 붉은 눈을 가졌다는 이 원시인은 사람을 보면 뒤쫓아와 들러붙어 안 떨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도시괴담 같은 이야기지만 뉴스에서는 원시인을 보게 되는 바람에 놀라서 차 사고를 냈다는 남자의 이야기를 기정사실처럼 보도한다. 그럼에도 원시인은 귀신과 같은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라기보다, 현시의 삶을 서성이는 과거 같은 존재다. 웨이웨이는 원시인이 뒤에서 안으려고 할 때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면 도망간다고 설명해준다. 마치 과거의 기억이 혼령처럼 엄습해 올 때 순간적으로 겁을 주거나 털어내면 된다는 듯이 말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원시인의 존재를 증명하듯, 당마이를 자적하는 천성을 바라보는 듯싶다가, 그가 마주하는 마을의 인물들, 그들이 응시하는 것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부유하듯 떠다닌다. ‘원시인’은 천성과 같이 일하는 할머니 의사가 문화대혁명 때 헤어진 남자에게 낡은 카세트테이프와 그가 입던 셔츠를 전해주라는 이야기와 연결된 중요한 단서다. 천성은 두 가지 물건을 할머니가 찾는 남자의 유족에게 주지 않고 다른 곳에 써버린다. 예컨대, 카세트테이프는 당마이에서 만난 한 여자에게, 셔츠는 본인이 입어버림으로써 결국 물건은 주인에게, 혹은 주인의 후손에게 당도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천성은 문화대혁명과 같은 역사의 얼룩을 현세대로부터 단절하는 인물인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동시에 등장하지 않는) 원시인은 그런 존재다. 현세대에게는 (죽일 수는 없지만) 도망가게 하고 싶은 버거운 과거 같은 존재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간은 앞선 5세대와 6세대 감독들이 그랬듯, 중국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카일리 블루스>는 진입장벽이 높은 영화다. 다소 난해한 표현들로 이루어진 시가 그렇고, 전조 없이 이루어지는 시간 혹은 시제의 변화가 그렇다. 그럼에도 영화는 시각적인 문장과 문학적인 스펙터클을 끊임없이 변환하고 치환하는 방식으로 과연 최대의 찬사가 아깝지 않은 영화적 경험을 전달한다. 극장에서 ‘볼거리’가 사라진 지금, 단연코 놓치면 안 될 영화가 분명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