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영화 팬들의 축제,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이 지난 29일 개막했다. 영화제는 부천의 '시 승격'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무장해 영화 팬들을 맞이했다. 그중 눈에 띄는 건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과 함께 하는 메가토크다. 최민식, 이선균, 이하늬 등 국내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자리에 참석해 부천을 빛냈다. 그중엔 올 상반기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의 주역 전도연과 변성현 감독도 있었다. 캐스팅 단계서부터 전도연 배우가 기존엔 볼 수 없었던 잔혹한 킬러이자 엄마 '길복순'으로 분한다는 보도에 높은 기대감과 화제성을 보였던 작품이다. 공개 후 2023년 넷플릭스 비영어권 영화 순위 1위에 오르는 등 좋은 성과를 냈다. <길복순>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고민할 새도 없이 부천으로 발걸음을 향해야 했다.
7월 1일 주성철 영화평론가와 변성현 감독, 전도연 배우가 만나 영화에 대한 비하인드 토크를 나눴다. 웃음이 많았던 현장의 분위기와 함께 세 사람의 대화를 전한다.
<길복순>을 하기까지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고, 어떤 계기로 전도연이라는 배우와 작업하게 되신 건지 궁금합니다.
변성현 설경구 배우의 소개로 뵙게 됐어요. 영화 <생일> 촬영 현장에 놀러 오라고 하셔서 갔었는데, 선배님이 제가 전도연 배우의 팬인 걸 잘 알고 있으셔서 자리를 만드셨던 거죠. 그렇게 알게 됐다가 어느 날 도연 선배님께 연락이 와서 어떤 작품이 하나 있는데 같이 해보지 않을래? 하는 제안을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쓴 시나리오로 연출을 하는 편이라 정중하게 거절을 드리면서 역으로 제안을 했죠. 혹시 제가 글을 쓰게 되면 같이 해주실 수 있냐고. 흔쾌히 해주시겠다 하셔서 놀랐어요. 그때부터 전도연이라는 배우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선배님의 필모에서 가장 안 해보셨던 장르를 해보고 싶어 액션을 골랐어요.
전도연 제가 <생일>이라는 작품을 하고 있는데 계속적으로 무거운 작품들을 찍다 보니 굉장히 많이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어요. 젊고 새로운 감독분들과도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죠. 그런데 아무래도 그분들께는 제가 이제 멀고 어려운 존재가 되다 보니 제가 먼저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어떤 작품의 시나리오를 받게 됐고, 감독님이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변성현 감독님이 생각나서 제안을 했죠. 거절당했지만 다른 제안을 주셨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나한테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며 시간을 갖던 중에 <길복순>을 만나게 된 거죠.
<길복순>은 전체적으로 장르 영화로서도 뛰어나지만 스토리텔링이나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전도연이라는 배우에게 바쳐진 오마주 같았습니다. 또 변성현 감독님 작품의 연장선이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변성현 이야기나 소재 자체도 선배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한 사람을 오래 알게 되면 장점도 보이지만 어느 순간 단점도 보이게 되는데, 도연 선배님에겐 그런 게 없었어요. 보면서 느낀 게 선배님은 진짜 본인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안 하시고 사시더라고요. 스스로에게 떳떳하면 괜찮다고 당차게 밀고 나가시는 분이에요. 사실 제 모토와도 비슷해서 거기서 <길복순>의 주제를 잡은 부분도 있어요.
복순이는 어렸을 때부터 킬러 생활을 했죠. 배우로 예를 들어보면 아역배우부터 시작한 배우들한테선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유년까지 남아 있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하는데, 성인이 된 복순에게서도 그런 천진난만한 모습들이 종종 보였습니다. 액션신에서도 슬로우 모션으로 활짝 웃는 모습들이 보였는데 길복순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나갈 때 의도된 바가 있었을까요?
전도연 의도했죠.
변성현 복순이 공격을 당할 때 웃는 장면은 사실 난관이 좀 있었어요. 디렉션을 드렸는데 선배님은 여기서 왜 복순이 웃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복순이가 (은퇴를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이 너무 즐겁게 느껴지길 바랐어요. 스태프들도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고. 선배님이 그 소릴 들으시고 "거 봐라" 하셨죠(웃음). 저는 그 장면을 찍는 순간 모니터를 보며 흡족해했는데 아쉬웠죠. 그런 상황에서도 복순이 웃는 일종의 아이러니를 주고 싶었거든요. 스태프들도 다시 찍자 하셔서 여론상 그 장면을 다시 찍을 수밖에 없었어요.
전도연 그 촬영이 진짜 힘들긴 했어요. 액션을 하면서 몸에 힘이 들어가는데 돌면서 웃기까지 해야 하니까 그 감정이 깃든 얼굴이 순간에 확 바뀌는 게 힘들더라고요. 초반에 감독님과 얘기할 때 감독님이 "길복순은 일을 즐기는 캐릭터였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배우와 같은 선에서 보면 저도 일을 즐기면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동의했지만, 막상 액션신을 찍을 땐 너무 힘들어서 어느 타이밍에 웃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변성현 또, 그 장면에 나무 파편들이 있어야 했어요. "액션!" 하면 먼지와 나무 파편들을 뿌려서 눈 뜨기도 힘든 상황인데 제가 가장 싱그럽게 웃어달라고 했으니... (웃음). 힘든 촬영이셨을 거예요.
최근 출연한 <유퀴즈>를 통해 딸이 중3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나이를 비교해 보니 극 중 재영이의 나이와 비슷하더라고요. 복순이의 상황이나 모습이 전도연 배우가 미래에 마주치게 될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기에 반영이 된 부분이 있을까요?
전도연 미래가 아니라 사실 그때 이미 겪고 있던 상황이었어요(웃음). 감독님께서 저희 집에 오시기도 하고 저희 모녀가 싸우는 모습, "꼴도 보기 싫어!" 하면서도 다음날 사랑하는 딸이니까 화해하는 모습들을 다 지켜보셨죠. 그 부분들이 영화나 연기에 많이 반영이 된 것 같아요.
변성현 실제로 영화에 많이 넣었어요. 제가 아들이다 보니 엄마와 딸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선배님께 부탁을 드려서 선배님 집으로 가 따님과 대화하시는 걸 많이 들었죠. 싸우는 모습과 풀어지는 과정도 다요. 그런 부분들을 영화에 녹여냈어요.
<길복순>은 어떻게 보면 변성현 감독의 첫 번째 가족영화인데요. 복순이와 딸 재영이의 관계만 봤을 때 전도연 배우는 어떤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전도연 되게 긴 신인데 딸과 제가 싸우고 와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어요. 둘이 서로 의견이 달라서 다투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한 얘기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죠. 저는 그 장면이 가장 좋더라고요. 사실 제 딸도 조금 성숙한 편이라 제 이야기를 들어주곤 하는데 딸과 엄마라기보다는 친구의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가장 좋은데 그 장면이 많이 닮아 있더라고요.
변성현 두 장면이 대치가 되는 부분이 있어요. 밥상 신인데 의도를 했죠. 복순이 딸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보수적으로 굴 때는 시금치를 놓아주는데 재영이 스팸을 먹어요. 그러다 나중엔 두 사람이 스팸을 나누어 먹는 장면이 나오죠. 이 영화에서 복순이 바라보고 싶어 하는 재영의 모습엔 녹색을 많이 썼는데, 반찬에 그 부분을 투영했어요. 스팸을 같이 먹는 건 재영이의 욕망을 인정해 주는 거죠. 그 부분에 제 생각을 많이 담기도 했고, 두 사람의 표정이 정말 좋았어요. 그 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길복순>은 고강도의 액션을 포함한 연기를 했어야 했는데 전도연 배우는 '지금의 내가 어디까지 가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염두에 두었을 것 같아요.
전도연 사실 액션 영화 대본을 많이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본만 봤을 땐 액션의 스케일을 생각 못 했어요. 나중에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걸 듣곤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죠.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노력밖에 없는 거잖아요. 끊임없이 연습했죠. 그래서 끝나고 난 지금도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그때보다는 잘 할 수 있지 않나 싶죠. 그렇다고 액션 영화를 또 하겠다는 건 아니고. 진짜 안 할 건데(웃음). 찍으면서도 스스로 액션을 잘 못한다고 저를 가두면서 액션을 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변성현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어요. <길복순>은 콘티가 대역 배우들이 할 수 없게끔 짜여 있어요. 액션이 이뤄지는 공간과 배우의 움직임, 표정이 다 보이길 바라다보니 움직임과 얼굴이 동시에 보이는 장면들이 많았죠. 다른 영화들처럼 컷이 빠르고 타격감이 강조됐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 도연 선배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분들도 대역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어려워했고, 저도 마찬가지여서 힘들었습니다.
<길복순>의 여러 장면들 중에서 찍고 싶었지만 찍지 못했던 장면들이 있었나요?
변성현 시나리오에 있는 장면들은 다 찍었던 것 같아요. 사실 안 찍은 장면이 있는데 그건 영화의 에필로그 격이 되는 장면이에요. 재영과 복순이 같이 치타 모녀의 이야기가 담긴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근데 그건 너무 뻔한 엔딩 같아서 찍지 않고 지금의 엔딩처럼 하게 됐죠. 전 이 영화가 딸이 엄마에게 문을 열어주는 영화라 생각해서 두 사람의 관계도 열린 결말처럼 끝내고 싶었어요.
전도연 대본 상에 있었는데 감독님이 엔딩을 열린 결말로 보고 싶다 하셨어요. 저도 동의했죠. (김)시아 양이 활짝 웃으면서 가는 장면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엔딩으로 가면 좋겠다고 했어요.
비하인드 토크 자리이니 감독님께 여쭤볼게요. 솔직하게 영화 촬영이 끝나고 작품을 마무리 했을 때 전도연 배우가 더 좋아졌다, 아니면?(웃음). 너무 대답이 뻔한 질문일까요.
변성현 끝나고 난 직후는... "어후" 이거였어요(웃음).
전도연 저도 그랬어요! (일동 웃음)
변성현 선배님이랑 저랑 영화 찍기 전에 굉장히 사이가 좋았는데(웃음). 장난이고 편집하면서 선배님이 대배우라는 걸 새삼 다시 느꼈어요. 편집하면서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제 주변 지인들에게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사람들이 전도연을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라고 하는 '여'를 빼고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전도연 배우가 아니면 누가 최고의 배운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저는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가진 능력에 비해 작품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생각 안 해요. 그래서 팬으로서 앞으로 더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질문을 전도연 배우에게도 드릴게요. 감독님과의 호흡, 어떠셨나요.
전도연 이 자리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잖아요(웃음). 감독님이 자기 현장은 즐겁다, 모든 스태프들이 즐겁게 일하고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이랑 쭉 일하고 있다 자랑을 하셨어요. 기대감에 첫 촬영을 갔는데, 처음으로 감독님이 현장에서 소리 지르는 모습을 봤어요. 사실 첫 촬영으로 좀 부담스러운 신이기도 했어요. 대사가 좀 길었는데 NG 나면 진짜 큰일 나겠다 생각했죠. 촬영이 끝나고 감독님께 장문의 문자를 드렸어요. 너무 실망스럽다고(일동 웃음). 근데 사실 감독님이 부담감이 크셔서 그랬던 거예요. 젊은 감독들이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데리고 하려면 부담감이 크다는 얘기를 많이 하곤 해요. 제 필모에 남는 작품이고, 다른 작품들보다 떨어질까 봐 하는 걱정도 있었을 거예요. 오죽했음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도 저런 모습을 처음 본다고 하셨겠어요. 부담감을 많이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영화가 끝났을 때는 감독님과의 작업이 좋았고, 두 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다 생각했죠. 감독님한테 다음 작품 뭐 하실 거냐 물어봤는데 감독님이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를 찍을 거다"라고 하셔서(웃음). "넵, 알겠습니다" 그랬죠.
변성현 촬영 시기가 코로나 시즌이어서 모두가 다 예민한 상황이었어요. 부담감도 컸지만 그런 상황에서 스태프들이 계속 바뀌고, 코로나에 걸려서 부재하게 되고 그런 상황이 이어졌죠. 저도 선배도 스태프도 모두 촬영은 못 하고 몸은 피곤해지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를 더 존중하면서도 예민해서 날이 서게 되는 그런 상황이 초반엔 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하인드 토크이니 인사 겸 말하지 못한 게 있으시다면 시원하게 말씀해 주세요.
변성현 평론가님이 물어봐 주시고 생각나는 대로 대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왔는데, 얘기하다 보니까 선배님과 첫 촬영 생각도 많이 나네요. <길복순>은 제가 찍은 영화 중에 제일 치열하게 찍었던 영화예요. 치열했고, 그만큼 애정도 많이 가는 작품이지요. 이미 다 보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한 번 더 틀어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전도연 다른 배우분들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바쁘셔서 못 만나 아쉽네요. 많은 분들이 집에 가셔서 <길복순>을 더 봐주시면 이런 시간이 또 생기지 않을까요?(웃음) 감사합니다.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루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