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 내용은 <엘리멘탈>, <이니셰린의 밴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영웅을 부른다…고 했던가.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다. 어떻게 보면 꽤 낭만적이거나 비장한 이 문장은 결국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 어떤 방식이든 표면에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현상에서 시대에 필요한 덕목이 보이듯, 시대의 문제도 여러 징후에서 읽을 수 있는 건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슷한 시기의 여러 작품이 동시다발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띠고 있다면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 아깝고, 당대의 사회를 읽는 단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지난 1년 사이에 접한 세 편의 영화에서 꽤 흥미로운 잔상을 접했다.


다정함의 힘, <엘리멘탈>

현재 한국에서 역주행 신화를 쓰고 있는 <엘리멘탈>은 그간의 흐름을 반추하게 한 영화다. 필자가 평소 좋아하는 픽사 스튜디오의 작품이라 눈여겨본 것도 있지만, 이 영화의 한 캐릭터가 유독 감명 깊게 남았다. 물 원소, 웨이드다.

엘리멘탈 시티의 조사원 웨이드는 댐을 조사하던 중 우연찮게 앰버의 가게로 (글자 그대로) 떠밀려온다. 그런 그의 첫 등장은 앰버 가족의 사진을 보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다. 세상에, 생면부지 가족을 보고 펑펑 운다? 웨이드의 순진할 정도의 다정함은 그 단 한 장면만으로도 명명백백하게 보인다.

이 세심한 공감 능력과 오지랖, 감성적인 성격의 웨이드는 이 영화의 한 축을 받치고 있다. 주인공 앰버가 영화 내내 시달리는 갈등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이면엔 배척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깔려있다. 앰버의 부모님은 이 땅에 희망을 품고 왔으나 다른 원소들에게 거절당하며 보금자리를 찾지 못했고, 지금의 '파이어플레이스'를 운영하면서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 “물 녀석들은 조심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는 앰버에게 (혐오나 공포와는 거리가 있지만) 타인과 완전히 공존할 수 없다는 질서를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웨이드는 이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가 단순히 착하고 눈물이 많아서가 아니다. '착하다'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상대를 곱고 바르고 상냥하게 대하는 것인데, 웨이드는 이보다 더 깊게 상대를 이해하려고 한다. 다정하다의 '정'은 (마찬가지로 국어사전에 따르면) 상대에게 사랑과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당장 본인이 물에 뒤섞여 떠밀려온 사고를 당했는데도 가족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가게가 문 닫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듣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순히 상냥하거나 공감력이 좋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곧 '다정함'이다. 웨이드의 다정함은 에어볼 선수 러츠가 부진하자 모든 관객이 실망감을 표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그런 냉랭한 분위기에서 웨이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본인이 느낀 대로, 러츠는 더 잘할 수 있는다는 응원을 있는 힘껏 외친다. 그의 진심 어린 외침은 관객과 팀 전체의 분위기를 북돋는다.

상기의 장면은, 그리고 웨이드의 설득에 끝내 앰버가 손을 맞잡는 장면은 이 영화의 제작진이 다정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물과 불, 영원히 상극이고 서로를 배척할 것 같은 양단의 것이 새로운 융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엘리멘탈>이 말하는 다정함의 힘이며 다정함의 기적이다. 심지어 클라이맥스에서, 사라진 줄만 알았던 웨이드가 다시 돌아오는 방법은 무엇인가. 공감과 이해, 그 특유의 다정함에서 샘솟는 눈물이다. 그 눈물 또한 '정이 많은' 사람만이 가능한 진심이다. 그러니까 요컨대 <엘리멘탈>은 우리가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다정함에 대한 예찬이다.


다정함의 패배, <이니셰린의 밴시>

그러나 다정함은 완전무결한가? 웨이드가 앰버의 부모님을 설득했듯, 다정함은 모든 걸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올 3월 15일 개봉한 <이니셰린의 밴시>는 '다정함의 실패'를 그린다. 아일랜드 인근 (가상의 섬) 이니셰린의 파우릭과 콜름은 둘도 없는 절친이다. 어제까지는. 파우릭은 오늘도 콜름과 술집에서 만나는 그 시간에 술집을 갔지만, 콜름이 없다. 콜름은 자신을 반기는 파우릭에게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그렇게 파우릭은 갑자기 절교를 선언 받는다.

감독 겸 각본 마틴 맥도나가 고향 아일랜드 내전을 빗댄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대사에서 직접적으로 주제의식이나 메시지를 전한다. 음악적 성취를 거두기 위해 파우릭과의 절교를 선택한 콜름은 말한다. “다정함은 영원히 남지 않는다”고. 콜름은 반박한다. “다정함도 남는다”고. 그리고 그는 마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듯 강력하게 덧붙인다. “난 파우릭 설리반이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사실 이 시대의 관객이라면 콜름의 입장도 적잖게 이해갈 것이다. 우리는 '손절'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해가 되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손절하라는 조언을 심심찮게 듣는 우리에겐 자신을 손절한 콜름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파우릭이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파우릭 같은 사람에겐 그게 올바른 것이다. 정을 나눈 상대를 어떻게 그저, 쉽사리 버린단 말인가.

매정하게도 <이니셰린의 밴시>는 다정함이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세계를 논한다. 파우릭은 콜름에게 나눈 정을 쉽게 거둬내지 못한 채 그와의 관계 회복에 집착하다가, 동네바보로 통하는 도미닉에게마저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결국 똑같네”라는 말마저 듣는다. 스스로 자제하지 못한 파우릭의 다정함은 자신과 상대를 모두 훼손하는 상황까지 몰고 가는 발단이 된다.

그 와중에도 그 다정함은 콜름의 개를 챙기는 선택에서 빛을 발한다. 그럼에도 콜름과의 관계는 여전히 이전과 다르고, 결코 나아질 수 없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았다. 결국 상대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다정함은 성취를 향한 맹목적 갈구와 다름이 없음을, 영화는 지적한다.


다정함의 방법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그러면 이 다정함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정함이 '기적'을 만들면서, 동시에 '상처'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세 번째에 소개하지만 가장 먼저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찾을 수 있다.

수많은 멀티버스를 들여다보고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절감한 조부 투바키, 그리고 그런 조부 투바키를 막아야만 하는 에블린, 여기에 에블린을 죽여서 이 모든 싸움을 종결시키려는 알파 세력까지 더해져 난장판이 된다. 이 와중, 아무 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웨이드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외친다.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특히 뭐가 뭐지 혼란스러울 땐 더욱더”라고.

사실 여기까진 다른 작품에서나 명구에서 봤을 법한 흔한 말이다. 서로에게 친절하라. 그러나 여기에 웨이먼드는 (정확히는 다른 멀티버스의 웨이먼드가 하는 말이지만) 하나의 단서를 더 붙인다. “당신(에블린)은 스스로를 투사로 여기잖아. 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이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일견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처럼 들리는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싸운다는 개념이다. 다정함이 타인에게 친절한 것을 의미하는 건 맞지만, 그것에만 매몰된다면 파우릭과 콜름 같은 파멸을 맞이할지 모른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마냥 다정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을 지키는 무기로서 쓰는 응용법을 강조한다. 무기로서의 다정함,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게 아니다. 다정함을 '나'의 무기로 사용해야지 온전하게 다정한, 너도 나도 해치지 않고 온전한 교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파우릭이 실패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다정함은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다. 오로지 콜름이란 상대에게만 향했다. 그가 다정함으로 싸웠다면, 적어도 자신의 온정은 지켰을 것이다. 하나 그는 다정함을 정을 준 상대에게 휘둘렀고, 그 정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는 다른 방법으로 그의 다정함을 돌려버렸다. 그 과정에서 둘은 끊임없이 상처만 입고 만 것이다.

웨이먼드의 다정함은 그와 다르다. 그는 자신을 해하려는 상대들을 가로막고 외친다. “다정해야 한다”. 그 방식이 그의 싸움이다. 내가 아끼는 사람을 지키고, 그로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웨이먼드의 다정함은 모든 우주를 파괴할 수도, 지킬 수도, 모든 우주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에블린의 파멸을 막는 데 성공한다(진짜 큰 위기는 또 일어나지만). <엘리멘탈>의 웨이드 또한 앰버의 어머니가 훼방을 놓으려 할 때, 그 관계를 납득시키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신체를 이용해 불을 붙이는,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 답을 대신한다. 말로 하는 설득이나 언쟁이 아닌, 그 순간의 해법을 찾는 것. 다정함을 무기로 쓰는 이들의 힘이다.


마땅한 접점 없는 세 편의 영화 모두 다정함을 작품의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광경은, 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세 영화 중 한 편이라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면(다정함이 필요해!) 그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를 인정받기 위해 주장하는 것이 많아지고, 그만큼 격정적인 분투와 갈등이 늘어나고 있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수많은 취향의 시대를 살지만 내 취향 외의 것들을 배척하는 일도 심심찮다. 개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많은 시대이기에 이런 일들은 특정 집단이나 세력이 아니라 개인에게마저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다정함이 필요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남을 공격하지 않고, 남을 위해 나를 버리지 않는 다정함이란 무기가. 나를 위해, 너를 위해, 건강한 관계의 우리를 위해.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