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지 머리, 군더더기 없는 근육질의 상체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이한 괴성, <사망유희>에 등장하는 노란 타이즈와 석 삼 자를 연상시키는 흉터, 땀을 닦으면서 슬쩍 튕기는 콧볼과 잠자리같이 생긴 선글라스까지.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채, 인물의 특징만을 나열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 것이다. 바로 전설의 쿵푸 파이터 이소룡이다.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페이롱, 철권 시리즈의 마샬 로우, DOA의 잔리, 모탈 컴뱃의 리우 캉까지. 격투 게임이라면 이소룡을 오마주한 캐릭터는 무조건 등장하기 마련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킬 빌>(2003)의 키도(우마 서먼)에게 <사망유희>(1973) 속 이소룡의 시그니쳐인 노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혔다. 지금까지도 중국식 무술의 대표적인 아이콘은 단연 이소룡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소룡은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 1940년생인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32세의 나이로 <사망유희>를 촬영하던 도중 사망하고 만다.
이소룡은 <그린 호넷>(1966) 시리즈로 인기를 얻은 이후 홍콩 영화계에서 <당산대형>(1971), <정무문>(1972), <맹룡과강>(1972) 세 작품을 찍으며 열화와 같은 인기를 끈 뒤,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워너브라더스와 함께 걸작으로 꼽히는 <용쟁호투>(1973)에 출연한다. <사망유희>는 실질적으로 조악한 미완작임을 감안한다면, 이소룡의 주연작은 영화 4편에 불과한 상황.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며 ‘이소룡 표’ 쿵푸 영화에 대한 전 세계의 수요가 빗발쳤지만, 이소룡의 죽음으로 더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시장의 요구와 저예산의 홍콩 영화계의 묘수가 합쳐진 괴이한 결과물이 등장한다. 바로 이소룡의 아류 배우들이 등장하는 짝퉁 이소룡 영화, ‘브루스플로이테이션 (Bruceploitation)’ 작품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메리 고 라운드’ 섹션에 초청받은 데이빗 그레고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이소룡-들>(2023)은 이 기이한 현상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소룡-들>의 시작은 당연히 이소룡에서 시작한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배우였고, 홍콩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뛰어난 무술 실력과 불같은 성격을 지녔다는 이야기들. 이소룡과 무술 영화에 관심 있는 팬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그레고리는 빠르게 시선을 이소룡에서 이소룡의 아류 배우들과 영화로 돌린다. 이소룡의 영어 이름이 Bruce Lee라면, 이소룡의 아류들은 한두 글자씩 철자를 바꾸었다. 예를 들면 Bruce Li(하종도), Bruce Le(여소룡), Dragon Lee(거룡), Bruce Leung(양소룡), 심지어 Bruce Thai(장정의)까지. 이소룡의 외관과 하나도 닮지 않은 이들은 노란 타이즈를 입고,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거나 상의를 탈의하고는, 코를 튕기며 쿵푸로 적을 물리쳤다.
영화학자들은 후에 이런 아류작이 등장한 현상을 두고 ‘브루스플로이테이션’라고 일컬었다. Bruce Lee와 착취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Exploitation을 합쳐 이소룡의 사후 영광을 가로채 아류작을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합쳐졌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 등 서구 영화계에서 이소룡 사후에도 여전히 ‘이소룡’ 표 무술 영화를 원했고, 당시 홍콩 영화사들은 공장식 영화 제작으로 저예산 무술 영화를 양산했다. 이런 두 수요와 공급이 만나 이소룡의 외모 혹은 무술 실력이 닮았다(고 주장하는) 영화를 수백 편 넘게 제작하게 된 것이다.
홍콩뿐만 아니라 대만, 일본, 한국, 심지어는 태국까지. 이소룡을 자처한 아류 배우들의 국적은 전부 달랐다. 국내에서는 Dragon Lee라고 불린 거룡 (본명 문경석)이 36편의 브루스플로이테이션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이번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직접 GV에 참여했는데, 여전히 녹슬지 않는 무술 시범을 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여담으로 <무뢰한>(2015)의 감독인 오승욱 감독은 홍콩영화에 대한 소회를 풀던 당시 거룡의 연기를 좋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브루스플로이테이션 영화에는 국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본인 배우가 쿵푸가 아닌 가라테를 해도 영화는 이소룡의 이름을 달고 유통되었다. 서구의 시선에서 동아시아인들의 외관은 국적과 별개로 큰 차이가 없었고, 그들에게 ‘이소룡’이라는 이름은 한 인물이기보다는 동양인의 무술영화를 일컫는 일종의 대명사에 가까웠다.
이소룡의 죽음을 매개로 영화가 시작한 만큼, 초창기 브루스플로이테이션 영화는 주로 이소룡의 죽음을 매개로 다뤘다. 자신들이 이소룡을 계승했다는 의미 혹은 이소룡의 죽음 이후로 그를 복수하겠다는 일종의 전기 영화 혹은 속편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많았다. 이소룡의 장례식 장면이 삽입되거나 그의 아역 배우 시절 장면이 난삽하게 교차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관문이었던 ‘이소룡의 죽음'은 곧 걷잡을 수 없이 기이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감독의 코멘터리에 따르면 ‘마치 죽음의 5단계’를 거치는 것처럼 이소룡의 죽음을 부정하고 분노하는 방식(이소룡에 대한 복수를 선언하듯)을 지나면 이내 이소룡의 죽음을 ‘수용’하고는 곧 자신이 이소룡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이소룡의 아류 배우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소룡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소룡의 시그니처 무기였던 쌍절곤을 거룡은 한 손가락에 꼽는 외마디 곤봉으로 바꿨고, <용쟁호투> 속 이소룡의 적인 마약 굴은 여소룡과 양소룡의 손을 거쳐 이탈리아 마피아나 아프리카의 주술 부족이 되었다. 제임스 본드의 플로이테이션 필름처럼 반라의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거나, <그린 호넷> 속 카토가 슈퍼맨 망토를 두르고 슈퍼히어로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압권인 작품은 1980년도에 제작된 <브루스 리의 클론들>. 거룡, 여소룡, 양소룡 등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이소룡의 죽음에 분개한 영국의 미치광이 과학자가 이소룡을 복제해 세계 정복을 노린다는 내용이다. 태국, 홍콩, 한국에서 모인 아류 배우들은 심지어 각기 다른 공간에서 촬영하고 이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이소룡의 후광을 입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류 배우들과 홍콩의 영화사뿐만이 아니다. 이소룡의 <용쟁호투>에 등장했던 흑인 배우 짐 켈리는 흑인 이소룡을 자처하여 B급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영화 초반 이소룡의 여동생으로 출연한 모 영은 ‘여성 이소룡’, 최종 보스였던 한 역의 석견은 브루스플로이테이션에 상대 역으로 종종 등장했다. 어쩌면 이소룡을 가장 착취한 것은 다름 아닌 이소룡과 함께했던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일지도 모른다. 그의 유작으로 홍보한 <사망유희>는 사실 생전 촬영본 40분에 그의 대역들의 씬을 조악하게 편집하여 만든 영화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소속 영화사와 그의 동료 배우들도 모두 이 열풍에 가담했기에 이소룡의 아류 배우들과 B급 영화 제작사에만 모든 문제를 전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소룡-들>은 브루스플로이테이션 필름의 흥미로운 가치와 역사를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역사적 대안의 순간까지 담으려고 노력한다. 1970년대 말 당시 홍콩의 저예산 영화사들은 무술 씬을 여러 컷으로 찍을 여유가 없었고, 대역을 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류 배우들은 뛰어난 무술을 기반으로 롱테이크 시퀸스와 스턴트 액션을 몸소 감당했다. 그들이 당당하게 지금의 무술 영화들은 진짜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주장은 그 시절 무술 영화가 나름의 낭만과 진정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계는 더 이상 짝퉁 이소룡 영화를 원하지 않았고, 홍콩의 무술 영화사들은 결국 도산했다. 이소룡의 생가였던 홍콩의 집도 2019년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등장한 홍콩의 액션 스타는 홍금보와 성룡이었다. 홍금보는 <용쟁호투>의 오프닝 시퀸스에서 이소룡의 상대로 등장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홍금보의 풍만한 풍채는 이소룡을 모방하기에 벅찼고, 그는 1978년 <비룡과강> (Enter The Fat Dragon)에서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소룡을 닮은 척하는 뚱뚱한 무술인을 연기하며 오히려 이소룡의 아류작들을 강하게 조소하기 시작했다. 또한 성룡 역시 <정무문>의 감독이었던 나유와 <정무문>의 속편을 제작하며 이소룡의 아류 행세를 잠시 했지만, 곧장 <사형도수>(1978)로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이어서 등장한 <취권>(1978)은 성룡이 이소룡과는 완벽하게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선언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절도 있고 화려한 이소룡의 액션 대신 코믹한 슬랩스틱을 무술과 절묘하게 섞은 코믹 무술을 선보였다. 성룡은 실제로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하여 “이소룡과 모든 것을 반대로 하려 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소룡의 시대가 지나가고 그의 죽음마저 돈벌이로 전락했던 시절, 성룡과 홍금보는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무술 영화의 활로를 개척해 냈다.
데이비드 그레고리의 <이소룡-들>은 이소룡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이소룡의 복제품들과 이를 사용했던 전 세계의 영화 산업을 훑고 이내 홍금보와 성룡에 도착했다. 칼 더글라스의 노래 <Kung Fu Fighting>을 연상시키는 유쾌한 리듬 아래서 1970년대의 광풍을 흥미롭게 포착했다.
사진제공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