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말은 문학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우리 시대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세상의 지도다. 지난해 7월 박찬욱 감독, 정서경 작가의 <헤어질 결심> 각본집은 출간되기도 전에 예약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는데, 한 온라인 서점에서는 예약판매를 시작한 당일 6천 부 이상 주문이 몰렸다. 이처럼 ‘대중문화’ 카테고리 안에서 작게 자리한 ‘영화’ 분야, 그 안에서도 영화 각본집이 온라인 서점 전체 1위로 등극한 일은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해준(박해일)의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나 서래(탕웨이)의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영화 속 대사들을 포함해 “마침내”라는 짧은 한마디도 전대미문의 유행어가 됐다. 영화의 대사가 우리 정서 깊숙이 뿌리내린 행복한 증거라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 각본집의 흥행은 영화의 흥행만큼이나 반가웠다.

<헤어질 결심> 각본집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자료원)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아카이브 프리즘」 12호가 바로 그 한국영화의 명대사 100선을, ‘대사극장: 한국영화를 만든 대사 100’이라는 주제로 선정했다. 편집진은 서문에서 “대사의 순수한 매혹과 함께 한마디 대사가 시대와 영화를 어떻게 관통하는지 정중히 묘사하고자 했다”며 “조금 거창하게 표현하면, 여기서 대사는 서사를 좌우하는 영화의 핵심 저작 도구인 동시에, 시대를 함축하는 문학이자 한국사회의 고뇌와 욕망을 드러내는 풍속화”라 밝히고 있다. 100개 대사 선정은 <아카이브 프리즘> 편집진과 김도훈, 김형석, 손희정, 허남웅 영화평론가 등 8명의 외부 필자가 협업해 이뤄졌다.

「아카이브 프리즘」 12호 ‘대사극장: 한국영화를 만든 대사 100’

“선생님은 제 마술에 걸린 거예요.” 한국영화사 최초로 키스신이 나온 것으로 유명한 영화인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에서 북한 간첩인 마가렛(윤인자)이 영철(이향)을 유혹할 때 했던 대사를 시작으로,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2023)에서 텔레마케터로 일하던 소희(김시은)의 죽음을 수사하던 유진(배두나)이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라고 말하던 대사에 이르기까지, 1950년대 이후 한국영화 속 명대사들을 무순위로 100개를 선정해 개봉연도 순으로 나열했다.

<아카이브 프리즘> 발췌


이제 막 상경한 시골여자 명자(윤여정)가 당시 종로의 삼일빌딩을 보고는 “31층? 떨어져 죽기 편리하겠다”라고 얘기하며, 윤여정이라는 대배우의 출현을 알렸던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 너무나도 익숙한 문호(신성일)의 대사인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의 <별들의 고향>(1974), 그만큼이나 유행어가 됐던 <봄날은 간다>(2001)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친구>(2001)의 “니가 가라 하와이” 등을 지나 <베테랑>(2015)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소공녀>(2018)의 “봄에 하자”, <기생충>(2019)의 “믿는 사람 소개로 연결 연결, 이게 베스트인 것 같아요. 일종의 뭐랄까… 믿음의 벨트?” 등 시대를 아우르는 대사들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한국영화의 지난 역사가 슬라이드 쇼처럼 펼쳐진다.

<아카이브 프리즘> 발췌

흥미로운 점은 ‘대사의 전문가들’이라는 항목으로 <아카이브 프리즘>이 선정한 100개 대사의 출처를 통계화한 부분이다. 물론 “100개의 대사는 예외 없이 연출자와 원작자, 각본가, 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뤄 창조한 것들이다. 영화는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고, 대사 영역에 있어서도 누구의 역할이 더 중요했는지 일률적으로 측정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애초 시나리오에 있던 대사도 여러 번의 수정이 가해지거나 작가가 바뀌기도 하고, 감독의 대사냐 작가의 대사냐 하는 문제도 있을 것이며, 현장에서 나온 즉흥적인 대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카이브 프리즘> 발췌

연출자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1위 감독은 역시 아래 7개의 대사가 선정된 박찬욱이었다. “야, 야, 야… 그림자 넘어왔어. 조심하라우.”(<공동경비구역 JSA>)부터 “너 누구냐?”(<올드보이>), “너나 잘하세요.”(<친절한 금자씨>),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박쥐>),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아가씨>), “나 너 땜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주세요.”(<헤어질 결심>)

“너 누구냐?”(<올드보이>)

“너나 잘하세요.”(<친절한 금자씨>)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다음으로는 “큰 성 그때 생각나? 그때 생각나?”(<초록물고기>)부터 “나 다시 돌아갈래!”(<박하사탕>) 등 5편의 대사가 선정된 이창동 감독,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짝패>),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부당거래>) 등 4편의 대사가 선정된 류승완 감독이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배우 부문으로는 “밥은 먹고 다니냐?”(<살인의 추억>) 등 4편의 대사가 선정된 송강호와 “니가 앞으로 뭘 하든 하지 마라.”(<넘버3>) 등 4편의 대사가 선정된 최민식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각본가 부문에서는 “너나 잘하세요.”(<친절한 금자씨>),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박쥐>) 등 6편의 대사가 선정된 정서경 작가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아카이브 프리즘> 발췌


자료원은 2008년부터 11년 동안 발행했던 기관지 「영화천국」과 작별하고 2020년부터 단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싱글 이슈 매거진 「아카이브 프리즘」을 계간으로 발행해오고 있는데, 매호 하나의 주제 아래 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자료와 기록을 담아오고 있다. ‘90년대 영화 전단’으로 창간호를 시작한 「아카이브 프리즘」은 해마다 정기구독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매해 갱신), 이벤트 모집에 실패했더라도 자료원 홈페이지에서 PDF 전문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번 12호를 받아들고 우리가 기억하는, 혹은 잊고 지냈던 수많은 대사들을 1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마치 <시네마천국>이 내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 같은 아련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한국영화가 우리와 함께 오래도록 호흡해 왔다. 자료원의 허락하에 일부 대사들을 큼지막하게 캡처해서 발췌했다.

<아카이브 프리즘> 1호 '90년대 영화 전단'

물론 100선으로도 다 담아내지 못한 수많은 대사들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카이브 프리즘」 편집진과 외부 필자들의 고뇌가 그대로 느껴졌다고나 할까. 과거 박찬욱 감독은 영화잡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난 딸이 동진(송강호)에게 나타나 “아빠. 나, 수영 좀 일찍 배울 걸 그랬나 봐.”라는 대사를 그때까지(<올드보이>까지 연출했던 시점) 자신이 쓴 대사 중 가장 마음에 든 대사라고 밝힌 적도 있다. 당신도 여기에 어떤 대사를 더하고 싶은지,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란다.


씨네플레이 편집장 주성철